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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이기는 단순한 믿음 (시 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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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단순한 믿음 (시 9:1-20)


고훈 목사님 간증입니다. 어느 주일예배 후 교인들과 인사를 하는데 심장병으로 고생하시던 할머니 한 분이자녀들에게로 가시게 되었다고 선물을 가지고 와서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고맙습니다. 10년 동안 안수기도를 해주셔서 내 심장병이 나았습니다.”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수해 준 적이 없어서 “언제 제가 안수해 드렸습니까?” 물었더니 그 할머니 집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 목사님을 만나 손을 잡을 때마다 한손은 자기 가슴에 얹었답니다. 자기는 그것이 10년 동안 목사님한테 안수기도 받은 것으로 믿었답니다. 그러는 사이에 심장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믿음은 참 단순한 것이구나 깨달았습니다.

오늘 ‘큰 은혜를 받고 가야 하겠다.’ 는 마음으로 오신 분들에게 눈에 번쩍 뜨이는 말씀이 본문 시편 9:1에 나옵니다. 

시 9: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시편 기자가 무엇인가 놀라운 일을 간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그리 기이한 일들인가? 하고 읽어 보니 3-8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정말 악인을 심판하시더라는 것이고, 9-12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아는 자, 주를 의지하는 자, 주를 찾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더라는 것이고, 18-20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은 구원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실망스러운 분도 계실 것입니다. 다 아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무슨 기이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은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알고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정말 믿느냐?’ 그것이 정말이고, 또 정말 믿는다면 인생이 얼마나 쉬워집니까? 고민하고 갈등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살기 힘들다, 혼란스럽다, 우울하다, 죽고 싶다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하지만 실제로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정말 믿는 자는 “그래 맞아, 정말 기이한 일이야.” 하고 화답할 것입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고 집에 갈 때 고민하고 방황하고 염려할 분이 있겠습니까? 날씨가 좀 춥고 비바람이 불고 어두워졌어도 집에 가는 길은 너무나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생은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상황과 여건이 아무리 어려워도 잘 되는 길, 결국 복을 받는 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길임을 분명히 믿는다면, 묵묵히 찬송하며 감사하며 사랑만 하며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집에 가는 길은 수도 없이 가 보아서 어떤 처지에서도 집에 가는 길을 가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 길은 믿음으로 별로 살아본 적이 없기에 갈등과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이 단순한 확신이 엄청난 능력이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형편이 좋을 때가 아닙니다. 죽을 위기에 있습니다.

13절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승리를 노래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9절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1절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8절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어떻게 이렇게 단순 명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다윗은 10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가 주를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우리도 다 압니다. 그러나 다윗이 아는 것처럼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무엘하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고백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이 고백은 단지 전해 들어서 아는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다윗 자신이 실제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을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지 수도 없이 경험한 사람인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너무나 유명한 시편입니다. 이 시편을 기록할 당시 다윗의 형편은 사울 왕의 지독한 시기를 받아 죽을 힘을 다하여 도망다닐 때였습니다. 무슨 잘못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왕이 시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습니다. 원수와 맞딱뜨리는 일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다윗은 잠잠히 묵상하였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그러면 그는 주저없이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난 주간 최고의 엘리트 신자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예수님을 믿으셨으니 부족함이 없으시지요? 너무 행복하시지요?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시지요? 질문했을 때,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셨습니다. 아니 지옥에 갈자가 천국에 가게 되었고, 마귀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임마누엘하고 계신데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점이 다윗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보다 더 큰 은혜를 받고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고 고백하지 못합니다.믿음으로 고백해 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텐데 말입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이런 기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기도의 약속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있는지를 점검하지를 않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아, 나도 그 말씀을 압니다.” 합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에는 그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설교 열등감에 시달리던 어느 날 큐티 본문이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내용은 아는 내용인데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 때 내가 말씀을 아는 것이 곧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속으로는 하나님도 잘난 사람 유능한 사람을 택하여 쓰실 것이라고 믿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3일을 고민하다가 3일째 되는 날 “이 말씀을 믿겠습니다.” 하고 고벡하면서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몰랐습니다. 제 마음 속에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단순하고 강력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고 짐승까지도 다 죽이라고 하신 명령을 분명히 듣고도 아각 왕을 산채로 잡아 오고 수많은 양과 소를 죽이지 않고 끌고 의기양양하며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서 사무엘 선지자를 만났습니다. 사울 왕은 너무 기뻐하면서 말했습니다. 

삼상 15:13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그 말을 들은 사무엘의 마음은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사무엘은 지난 밤 사울 왕 때문에 진노하신 하나님 때문에 철야하며 기도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에게 소리치며 말했습니다. 14절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19절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그 때 사울 왕은 사무엘에게 무엇이라 대답한 줄 아십니까?  

20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있다는 것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몰라서 문제라면 우리는 올바른 말씀을 가르치면 됩니다. 바로 살지 못했던 자가 복음과 진리를 깨닫고 바로 서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나 큰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말씀을 몰라서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결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 실제 말씀 앞에 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전 6:19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후 5:15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빌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 말씀들이 복음으로 들리십니까? 부담스럽게 들리십니까?

어떤 목사님은 계속하여 이 말씀이 마음을 괴롭게 하여 이 성경 구절들을 칼로 잘라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 책을 보는 순간 성령께서 그가 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책을 붙잡고 통곡하며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목사님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마음으로 얼마든지 성경책의 말씀을 오려내고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선교대회를 마치고 한 교수님이 강단 앞으로 나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절망했습니다. 나는 구원도 못 받은 사람 같습니다.”너무나 귀하였습니다. 그는 말씀에 반응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바로 알면 됩니다. 

마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예수란 이름의 뜻이 구원자입니다. 우리를 죄와 저주에서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또 한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이 놀라운 진리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항상 바라보며 살면 하나님의 약속이 아멘하게 됩니다.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예, 아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새벽기도를 선포하면 약 1/4 정도의 교인이 반응하십니다. 지난 기도의 항아리를 채우자 기도한 시간을 체크하여 항아리에 담아주세요. 했는데 1/15 280명 정도 참여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어린 아이같이 반응해 보시면 더 큰 역사를 경험하실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책망할 마음은 없습니다. 주님이 이번 주에‘너는 잘했냐?’하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목요일 부산 기독교수 선교대회 집회를 인도하느라 밤 늦은 시간에 영적일기를 쓰는데 오후 4시 기도 24365 시간을 갖지 못하였음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부산 집회로 인하여 4시 기도 24365 열방을 위한 기도를 하지 못하였다. 이런 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이 너무 율법적인 것은 아닌가? 그러니 형편대로 하면 결국 안하게 되었었는데, 고민이다.”. 이렇게 썼습니다. 

그런데 그 날 큐티도 빠뜨린 것이 생각났습니다. 새벽같이 공항에 나와 내려오느라 큐티를 못한 것입니다. 밤이 늦었지만 큐티는 해야지 하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본문이 다니엘 7장 9-14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본문은 환란이 있겠지만 심판이 있을 것이고 어린 양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 7장 14절을 읽는데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이 말씀은 24시간 365일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바쁜 일정을 핑계로 열방을 위한 기도를 하지 못한 것을 주님께서 책망하심을 깨달았습니다. ‘고민은 무슨 고민이냐? 네가 이런 일로 고민할 군번이냐.’즉각 대답하였습니다.‘기도 24365 중보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놀라운 느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세세히 나의 삶을 주관하고 간섭하고 이끄심이 생생히 느껴졌습니다.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부담스러워하면서 은혜로운 말씀은 들으려고 하는 자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딤후 3: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선교사들에게 ‘무엇이 두려우냐?’고 물으면 매 맞는 것, 가난, 배고픔도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단 한 가지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랍니다.  
그래도 이 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 본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 보지 못하고 사는 교인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끊임없이 돈이나 사람이 주위에 없는 것을 두려워하며 삽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왕이 아니면 결국 내 생각에 옳다는 대로 살게 마련이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 징계받고 회개하고 또 징계받고 회개하던 사사 시대 사람들처럼 살게 마련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조건 순종하겠다고 결단하고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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