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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염려하지 말라 (눅 12: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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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 (눅 12:22-26) 
  

눅12장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을 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나왔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지만, 조금 후면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사람들이다. 

이 사실을 다 알고 계셨기에, 제자들에게 몇 가지로 당부하셨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 그들이 핍박할텐데,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하셨다. 그때 돌발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눅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갑자기 한 사람이, 형과 발생한 유산문제를, 예수님께 해결해달라고 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자리잡은 탐심을 보시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다. 농사가 잘 되어 소출이 풍성했다. 그러자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곳간에 모든 것을 쌓아 두고자 했다. 

그리고는 여러 해를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고자 했다. 하나님은 그 날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겠다 하셨다. 그렇게 되면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이런 비유를 무리에게 말씀하시며 비유의 결론을 내리셨다.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 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부자는 자기를 위하여, 땅에 재물을 쌓아 두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혼을 도로 찾으면, 부요 할 수 없으니, 자기에게 부요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라고 했다. 

진정한 부자는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재물을 쌓아둔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을 때, 앞날을 예비함이 왜 어리석은가? 예비하지 않는 사람이, 더 어리석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에 대한 답변으로 말씀을 주셨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부요한 자는, 하나님이 친히 돌보신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못해도,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국한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세상 사람은 스스로 책임져야 하기에, 염려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염려한다. 쉬지 않고 염려한다. 범사에 염려한다. '염려하다'는 메림나오(        )로, 메리조(      나누다, 분리하다 +    (마음, 지능) = '마음이 나누어지다.'라는 말이다. 염려하면 마음이 나누어진다. 

심령이 병들고, 몸이 병든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어, 죄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염려를 바꿔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고 돌보신다. 따라서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다. 

1. 하나님의 목적을 깨달아야, 염려하지 않는다(22-23).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의 주인이다. 우리에게 목숨을 주시고, 몸도 주셨다. 왜 하나님이 목숨과 몸을 주셨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면,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다.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구약을 보면, 때때로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찾아왔다. 그렇게 되면 먹고살기 어려워진다. 어려운 경제 여건 때문에, 의복을 사서 입기도 힘들어진다. 

(딤전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문자 그대로 그 당시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여기던 때였다. 그만큼 형편이 어려워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늘 염려하면서 살았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이런 제자들을 향해, 앞으로 먹고 입는 문제로 인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눅12: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먹고 입는데 있지 않다고 하셨다.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이유는, 삶의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먹기 위해 산다면, 짐승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옷을 입기 위해서 존재한다면, 마네킹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이 목숨을 주신 이유는, 음식이나 먹고, 의복을 입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이보다 더 크고 고귀한 목적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삼으셨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가기 바라신다. 

이러한 사명을 위하여, 목숨과 몸을 주셨으니, 먹고, 입으려고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하여 살자. 어리석은 부자처럼, 먹고 입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면, 곳간을 헐고 새로 지을 수밖에 없다. 물론 곳간을 넓힌다고, 우리 미래가 보장되지 않고, 염려도 사라지지 않는다. 

(학1: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학개 선지자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몹시 궁핍했다. 많이 뿌렸지만, 수확이 적었다. 

그래서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못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나? (학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육신을 돌보는데 바빠서, 삶의 목적을 잊어버렸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했다. (학1: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삶의 목적을 잊어버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벌을 내려, 궁핍하게 만드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시23:1-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부족함이 없게 된다.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선한 길로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자.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숨을 주셨고, 몸을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다. 그래서 다윗처럼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게 되며,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늘 깊이 체험하며 살게 된다. 이런 은혜가 넘쳐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어야, 염려하지 않는다(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이스라엘에는 새들이 참 많다. 

서쪽은 바다요, 동쪽은 사막이다. 남쪽은 광야와 사막이다. 그래서 지형적으로 새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겨울철이 되면, 많은 철새들이 떼를 지어, 북쪽에서 날아오지만, 더 이상 동서남쪽으로 갈 수 없기에, 새들이 이스라엘에 모인다. 이런 철새들 때문에, 비행기가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겔39장)과 (계19장)에는, 말세에 이스라엘의 아마겟돈에서,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을 말한다. 그때 수많은 사람의 시체가 생기는데, 새들이 그 시체들의 살을 먹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계19:17下-18)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이스라엘에 그만큼 새들이 많다. 예수님은 이처럼 흔한 새들을 들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까마귀를 예로 드셨다. 까마귀는 (레11:13)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15) '까마귀 종류와'라고 하였다. 율법은 까마귀를 가증히 여겨, 먹지 못하도록 금지했는데, 예수님은 까마귀조차 하나님이 먹이시며, 기르신다고 했다. 

(욥38:4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시147:9)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도다." 하나님은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까마귀를 비롯한 모든 새에게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새들은 본능적으로, 새끼에게 먹이를 갖다 먹인다. 그러면 까마귀를 비롯한, 모든 새들에게 본능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본능을 통해, 까마귀를 먹이신다. 

새들은 농사짓는 법이 없다. 심지도, 거두어들이지도 않는다. 골방이나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다. 그렇지만 새들은 염려하지 않는다. 어디서 먹이를 찾을까 염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본능에 따라, 먹을 것을 부지런히 찾아다닌다. 먹이를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날아다닌다. 

이처럼 새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만 의존할 뿐이다. 그러기에 새들은 둥지를 헐고서, 더 크게, 짓는 법이 없다. 잡은 벌레들을 더 많이, 쌓아 두고서, 평안히 쉬고 먹고, 즐거워하자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새들은, 하나님이 길러주시니, 아무 염려 없이 잘 지낸다. 

하나님은 새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풀을 키워주고, 먹이가 되는 벌레들을 줘서, 새들을 길러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지혜를 주셔서, 농사를 지을 줄 안다. 사람은 심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고, 곳간에 모아들이기도 한다. 계속 무엇을 먹을까 염려한다. 참 어리석다. 

(24下)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어떤 새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지를 못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찮은 새들도, 부정한 까마귀조차도 잊지 않고 기르신다. 

사람은 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존재인데, 왜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겠는가? 따라서 어떤 염려가 생길 때, 공중의 새들을 생각하면, 모든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했으니, 우리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새들은 본능을 따라, 부지런히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얼굴에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해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다. (창3:17下)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9上)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새들에게는 본능을 통해 먹을 것을 주신다. 사람들은 얼굴에 땀을 흘리는 것으로, 먹을 것을 먹게 하셨다. 그러니 일하기 싫어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쓸데없이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염려가 많았던 사람이다. 물위를 걸어가면서도, 물에 빠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다 염려한 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염려하면서, 제발 그러지 말라고 강하게 항변했다. 그러다 예수님께, 호된 책망을 받았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베드로는 일어날 일을 염려하면서, 검을 빼어 대항했다. 

만일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가 저지른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베드로는 살인미수죄로 감옥에 갇혔을 것이다. 이처럼 베드로는, 염려가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마침내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염려에서 벗어났다.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성했다. 

그래서 나중에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염려에서 벗어났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신다. 우리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자. 

그리고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자! 하나님은 까마귀도, 아름답게 기르시는데, 당신의 자녀들을 어찌 귀히 돌봐주지 않겠는가? 


3.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아야, 염려하지 않는다(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여기서 '한 자'는 '한 규빗'이다. 한 규빗은 사람의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가리킨다. 요즘말로 약45cm 정도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자기 키를, 한 규빗이나 더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키가 150cm 되는 사람이라도, 한 규빗을 더하면, 그 키가 무려 195cm나 된다. 그 정도로, 자기 키가 커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예수님은 사람이 그 키를 한 자나 더하는 것을, 가장 작은 일이라고 하셨다. 사람이 자기 키에, 한 규빗을 더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엄청나게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말 성경은, 예수님의 의도를 살려서 올바로 번역하지를 못했다. 여기에 키(헬렝키아)는 (      ) 사람의 신장을 뜻할 때도 있지만, 사람의 나이나 수명을 뜻한다. (요9:21下)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여기에 '장성'이라는 단어가, '키'와 같은 단어다. 

사람이 장성했다고, 반드시 큰 것은 아니다. 삭개오는 장성했지만 키는 작았다. 따라서 여기서의 장성은, 키가 아니라 나이를 뜻한다. 마찬가지로 본문에 '키'라고 번역된 단어도, 사람의 신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의 나이, 곧 사람의 수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염려해보았자, 자기의 수명을 한 자도 더하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시39:5上)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다윗은 자기 날이, 한 뼘 길이만큼 될 뿐이라 했다. 그만큼 자기 수명이 짧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예수님은 상징적으로, 사람이 염려함으로,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할 수 없다고 하셨다. (욥1:21下)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우리에게 목숨을 주시고, 몸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목숨을 거두어 가시고, 몸을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다. 우리는 언제 태어나고, 어디서 태어날 것인지, 결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결정하셨다. 마찬가지로 얼마나 살 것인가? 이것도 우리가 결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인간의 생과 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온갖 노력을 한다. 예를 들면, 음식을 가려먹고, 열심히 운동과 다이어트를 한다. 비타민을 비롯해서, 많은 약들을 복용한다. 병원에서 정기검진도 받는다. 

물론 이런 일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인간적인 방법과 노력으로,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어리석다는 말이다. 인간의 생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이 염려한다고 해서, 그의 생명을 일각이라도 더할 수는 없다. 

염려는 오히려 건강만 해칠 뿐이다. 그러기에 염려는 아무 소용없다. '다른 일들'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하는 일들이다. 이처럼 염려도 소용이 없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자. 먹고 입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자.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자.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 사는 날 동안, 필요한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신다.  

하나님께 모든 주권이 있기에, 우리의 생사화복은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이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을 살기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도 늘 우리를 부요하게 하실 것이다.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 시간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우리의 모든 염려를 떨쳐버리자.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만 하나님의 나라를 힘써 구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자. 

그리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풍성함으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부요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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