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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살게 하시는 예수님 (요 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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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게 하시는 예수님 (요 8:10-11)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I. 본문해설 

본문은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대면하시고, 그를 다루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간음 중에 잡혀온 여자가 등장합니다. 시간은 아침이었고, 장소는 성전이었습니다. 물론 이른 아침에 이 여자가 어디에선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 목격되어 사람들에게 끌려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받는 느낌은 꼭 그날 아침이 아니어도 언젠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런 여자를 준비했다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II. 간음 중에 잡혀온 여자 

어쨌든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니 우리가 판단할 바는 아닙니다만은 어쨌든 죄를 범한 여자가 끌려왔습니다. 서기관과 율법사들이 주동이 되었고, 무지몽매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과 함께 동조하며 이 여자를 에워 쌓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거기에 계셨습니다. 

A. 율법에 호소함 

그들은 제일 먼저 이 여자의 죄에 대해서 율법에 호소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어느 쪽으로 예수님이 답변을 하시든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율법에 이 여자를 돌로 치게 되어 있다고 율법에 호소한 것이 충심이었는지를 의심하게 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남아있습니다. 

율법의 규정에 의하면 이런 여자를 신명기 22장 24절에서 돌로 쳐서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여자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반드시 같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남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율법에 대한 충성이 있었다면 당연히 남녀를 모두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웠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율법에 의하면 이러한 여자들은 죽이되 성 안에서는 죽일 수 없고 더욱이 성전 안에서는 그런 일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반드시 성문 밖으로 끌어내어 거기에서 처결하도록 율법이 규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으로 미루어볼 때 오늘 요한이 내리는 이 해석적인 판단, ‘이는 예수를 시험하려 함이라’고 하는 이 해설은 정확한 것이었다고 우리가 동의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B 예수님의 판결 

예수님은 이러한 요청을 받고 자리에 앉으셔서 땅 바닥에 글을 쓰셨습니다. 무슨 글을 썼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답 대신 앉아서 글씨를 쓰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기세등등해졌고, 그래서 예수님을 추궁하듯이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에는 ‘묻기를 마지않는지라’ 라고 하였습니다.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추궁하도록 물었을 때에 이들은 아마 이 시험에 예수님이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제3의 요청을 그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새로운 판결이었습니다. ‘너희 중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보신 율법의 최종적인 완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주옥과 같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향한 당신 자신의 태도를 이미 오래전에 말씀하신 대로 지키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율법을 폐하려 함이 아니요. 온전케 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점일획이라도 변경시키거나 바꾸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그 뜻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새까맣게 잊고 있던 자신의 죄로 돌아가도록 예수님이 찌르셨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회개를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 둘로 나누었습니다. 율법적인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그 두려움 때문에 회개하게 되는 것이니 회개의 동기조차도 자기 사랑이 동기가 됩니다. 이것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회개가 아니라 하나의 공포와 두려움입니다.

 반면에 복음적 회개는 율법적 회개의 과정을 거칠지라도 궁극적으로 회개하는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사랑하시고 생명을 버리신 희생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회개를 하는것입니다. 복음적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깊은 후회, 자신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주님이 불명예를 당하셨다는 후회, 여기에서 오는 자기 사랑의 포기에 뒤따르는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적 회개야 말로 진정한 회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 모두 다 성령의 역사이니 율법적 회개는 성령의 일반적 역사이고 복음적 회개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인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일반적 사역 속에 깊은 찔림을 받고 그 양심의 가책으로 돌아갔으니 그 양심의 가책으로 돌아간 것도 이들의 선함에서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때려주신 성령의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진정한 성취가 바로 사랑의 원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III. 절망 중에 만난 예수님 

그 여자의 자리에 여러분이 한 번 서보는 관점을 가지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에 이 여자였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기 때문에 부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끌려왔습니다. 그 여자도 아마 율법을 알고 있는 여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죄가 어떠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말로 고소했는데 그것은 정확하게 사실들로 이루어진 고소였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변명할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군중들은 성나 있었고, 그들을 충돌 질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떠한 자비심도 기대할 수 없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무서운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랍비 같은 분이 한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의 모습이나 모든 걸로 볼 때에 이 커다란 난관에서 여러분들을 단번에 구해줄 것이라고 하는 확신 같은 것은 주실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이 이 여자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까?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부끄러움에 눈을 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희망은 끊어지고 잠시 후 사람들의 손에 들린 돌로 자기를 내칠 때에 피를 흘리고 죽는 장면밖에는 생각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을 꽉 감고 기왕에 올 것이라면 죽도록 수치스러운 이 환경에서 도망치도록 ‘속히 죽음이여 오너라’고 속삭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A. 죄인을 만나주심 

어떠한 희망의 실낱같은 빛도 발견할 수 없는 캄캄한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는 절망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죄인을 이 절망 속에서 만나 주셨던 것입니다. 언제든지 예수님에게는 죄는 죄였고, 율법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모세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권위에 도전하지도 물론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 율법이 시퍼렇게 살아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가 지은 죄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그 죄 때문에 더 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여자를 지극히 불쌍히 여기셨고, 오히려 이렇게 죄를 지은 사람, 율법에 의해서 돌로 쳐 죽임을 받아야 되는 정죄에 처해질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이 여자가 한없이 불쌍한 존재였고, 복음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B. 죄인을 용서하심 

거기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만이 이 여자를 돌로 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일체의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보든지 율법을 집행할 양심의 가책으로 보든지 예수님은 이 여자를 정죄할 충분한 권위와 자격을 갖추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입니다.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목적은 ‘너를 정죄하는 것이지만 내가 온 것은 너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왔노라’ 고 하는 말씀하십니다. 

잠시 후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터인데 너는 분명히 죄를 지었고 정죄 받아야 하고, 그리고 너는 형벌 받아야 하지만 그 죄의 형벌을 내가 대신 담당할 것이니 너는 이제 나의 용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죄가 너무나 크고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가 없기 때문에 죄와 죄인을 분리시켜서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관심사는 사람의 과거의 행위에 있고 그것을 정죄하는데 목적이 있지만 복음의 관심사는 그들을 용서하고 새 삶을 살게 해 주는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피 묻은 돌멩이에 치여 조용히 인생을 마름하고자 했던 가엾은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에워싼 모든 사람들은 이 여자에게 일어난 과거의 과오가 관심사였지만 예수님에게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여자의 남아있는 인생의 날들이 예수님의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IV. 결 론 

우리는 의인도 아니요 그리고 정결한 자도 아니요, 다만 용서받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주님의 그 큰 사랑이 뒤덮여 용서해 주신 사람들, 죄 가운데 눈을 지그시 감고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의 사람들이었지만, 생각지도 않게 주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신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 피 같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내버려 두고, 이 십자가 사랑을 안 여러분들은 매일매일 정성스럽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아침마다 맞이하는 하루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눈부셔야 합니다. 바로 그 날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여러분들에게는 허락되었기에 생명이 있는 그날까지 이렇게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기억하며 주 앞에 사는 그런 사랑스러운 성도들이 된다면 오늘 불순종과 죄에 잠시 미끄러진 것도 주님의 찬란한 은혜를 깨닫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이렇게 살게 하셨으니 이 복음을 붙들고 여러분도 이 여자처럼 다시는 가서 범죄하지 않고 새 희망을 갖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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