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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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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 (마 20:20-28)    

 
[쇼퍼홀릭(shopaholic)]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쇼핑중독증>이라는 말입니다. 하루라도 쇼핑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며 소화도 안 되고, 머리가 아프고 심지어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현상을 <쇼핑중독증>이라고 하는데 정신과 의사들은 이것을 병이라고 진단합니다. 

이 증세의 사람들은 물건을 목적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특이한 제품을 보면 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영복을 일곱 벌씩 사지를 않나, 옷을 사도 꼭 서너 벌씩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입을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집안 장롱에 처박아 놓고 곰팡이가 나더라도 그걸 염려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구입하는 것 자체를 즐깁니다. 

이 <쇼핑 중독증>에 걸린 사람을 보면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가정도 불행으로 끝납니다. 아무리 남편이 경제적 능력이 있다 해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목적 없는 낭비벽, 이것을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제로 이혼사유 중에 상대방의 경제파탄이 수위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불행한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또한 입을 것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한 인간이 불행해질 수도 있고, 행복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은 <삶의 방식>이 문제요, <삶의 목적>이 문제입니다. 즉 <어떻게 살아가느냐>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는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참 부유하게 삽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부자가 되게 했습니다. 남들보다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유를 주셨단 말입니다. 저 집은 저 정도면 됐다 싶은데도 이상하게도 재물이 자꾸 불어납니다. 그런데 이걸 좋게 사용하지를 못합니다. 베풀 줄도 모르고, 나눌 줄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쌓여 가는 이 재물을 지켜내야 합니다. 집을 비울 때는 통장을 어디에다 숨겨야 안전한지가 걱정입니다. 은행에다 다 맡기자니 요즈음은 은행도 못 믿겠어요. 별의별 안전장치를 다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24시간 지켜 줄 사람을 사서 보초를 세웁니다. 자, 이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까? 불행한 것입니까?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월급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겨우 한 가족이 먹고 살만합니다. 그런데도 조금의 여유만 있으면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합니다. 몇 만원만 있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늘 이런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나누어줍니다. 나도 굶지 않고 그 사람도 굶지 않을 수 있어서 언제나 기분이 좋습니다. 이 사람은 언제나 이 즐거움에 삽니다. 이것을 행복이라고 합니까? 불행이라고 합니까? 분명히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는 목적의 문제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건강을 버리면서 열심히 뜁니다만 그 수고의 목적을 아직도 모릅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그래서 허무해지고, 피곤해집니다. 채워도 채워도 허전하기만 한 자신을 위해 아무리 뛰고 또 뛰어보지만 목적을 모르는 뜀박질은 끝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나오는 목적도, 신앙생활 하는 목적도 잘못 되어 있습니다. [D. L. 무디]목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늘 입버릇처럼 `‘이 설교는 누구누구가 꼭 들어야 하는데...’라고 말한다.” 설교를 듣는 목적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즘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사람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설교를 듣는다고 합니다. 첫째로, 설교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둘째로, 자기 교회 목사님이 얼마나 지식이 많고, 말을 잘하는가를 보기 위해서 설교를 열심히 듣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거 목적이 잘못 된 겁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느 설교에서든지 적어도 한 번은 하나님께서 설교자의 말을 뚫고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통해 바로 나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나온 것이지 마음에 안 드는 김 집사에게 빗대어 전해 주려고 대신 설교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요, 감정 많은 박 집사에게 한 바탕 쏘아붙이라고 설교를 듣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이 잘못 되면 이렇게 모든 것이 빗나갑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방식도, 목적도 비뚤어진 이와 같은 인간의 불행의 시작이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기주의>에서 비롯됩니다. 처음에는 주려고도 하고, 베풀려고도 하며, 사랑하려고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마음이 변해서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이기주의>입니다. 나누어주다 보니까 내가 망하는 것 같거든요. 더 많이 생기는 건 좋은데 더 많이 주어야하거든요. 그래서 못 주는 겁니다. 중단합니다. 이기주의가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kant, Immanuel)]는 이기주의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논리정연하게 설명합니다. 


첫째 이기주의의 형태는 이런 것입니다. 

다른 어떤 판단도 인정하지를 않고 자기 자신의 판단만이 가장 옳다고 생각합니다. 논리라고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논리가 있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논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의 논리는 전혀 들으려고 조차 하지를 않습니다. 무조건 자기만 옳고, 남들이 뭐라고 해도 자기생활은 항상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작 자기의 논리도 맞지를 않습니다. 순 억지의 논리를 앞 세워서 따라오라고만 합니다. 이 사람은 <논리적 이기주의>에 빠져 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이기주의의 형태는 언제나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취향에만 만족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이기주의입니다. 남들은 빨간색이 다 싫다는 데 다짜고짜 자기는 빨간색을 좋아하니 빨간색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결정하고 의논할 때도 나만 생각하고 자기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이야 어떻던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기 기분, 자기만족, 자기감정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래놓고 자기는 행복에 겨워할지 모르겠지만 남들은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학적 이기주의>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도덕적 이기주의>입니다. 

아무리 좋다, 선하다 떠들어도 자기한테 유익하지 않은 것이면 모두가 나쁜 것이요, 자기한테 유익한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다 선한 것이요, 또 그 누구에게도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형태입니다. 이것 역시 나쁜 것입니다. 어떤 형태의 이기주의도 우리는 버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기주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지지 말아야할 신앙의 독(毒)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민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역시 이기주의에 대한 책망으로 시작됩니다. 

한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청합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오직 우리 가문, 내 자식이 잘돼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는 우리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한 어머니의 열정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기주의에서 오는 생각입니다. 얼핏 우리가 생각할 때도 이 어머니는 문제가 있어요.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전부 몇 명입니까? 열둘입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 중에 하나만이라도 잘 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열둘 중에 자기아들 둘을 다 출세 시켜달라고 하면 다른 사람 열 명은 뭐가 됩니까? 그러니 24절에 보니까 다른 열 명은 화가 났지요. 

20절에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씩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겠다고 하니 다른 제자들이 가만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렇듯 사람이 이기적이 되면 언제나 적을 만들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같이 싫어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이기주의적 발상을 뒤엎어 놓는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26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렇습니다. 높아지려고 발버둥치는 자는 낮아집니다. 세상에서는 스스로 크고자 하는 사람이 모든 불의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때 높은 지위를 보장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적 방법이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 하는 것은 자기불행의 시작임을 알아야합니다. 지금 세상은 온통 이것 때문에 망해 가고 있지 않습니까?

[톨스토이]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진리를 우리는 언제나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개미를 잡으려고 개미집 속에 불타는 초를 세워 놓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촛불을 밝히고 한참을 기다리면 개미가 촛불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타오르는 심지 불에 자기 몸을 태웁니다. 개미가 뜨거운 줄 모르고 멍청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희생으로 다른 개미들을 살리려고 하는 놀라운 행위입니다. 

개미가 불 가운데 들어가 몸이 불타면 그 가죽에서 <키츤스>라는 불연성의 진액이 나와 촛불이 꺼진다고 합니다. 한 번에 꺼지지 않으면 또 다른 놈이 올라가고 꺼질 때까지 계속합니다. 그러한 희생적 행위가 개미 나라를 곤충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이 되게 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할 마땅한 신앙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라>는 것입니다. <섬기라>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과 섬기는 것, 주는 것과 받는 것 중 어느 것이 큰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기쁨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신앙의 유치한 수준일 때는 받는 것이 좋았고, 섬김을 받는 것이 좋았지만 성숙해지면 받기 보다는 주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것이요, 섬기는 데 그 기쁨이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물질을 주고, 의미를 주고, 사랑을 주고, 목숨까지도 줍니다. 적어도 이런 원리를 깨닫는 자라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먼저, 주되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주기 싫은 것을 억지로 주는 것은 안 됩니다. 이것만큼 마음이 불편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꼭 빼앗기는 마음으로, 강도 만나는 심정으로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주는 기쁨>이란 자발적이고 좋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가만히 보면 항상 남에게 주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나 남에게 빼앗기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주긴 주되 자발적이냐 피동적이냐의 문제입니다. 자발적인 것은 준 것이요, 피동적인 것은 빼앗긴 것입니다. 기쁨으로 주는 것은 내가 성심으로 베푼 것이 되지만, 마지못해 주는 것은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의 차이는 극명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줄때의 마음이 변함 없어야 합니다.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변했건, 세상이 어떻게 되었건 상관없습니다. 언제나 줄 때의 마음이라야 합니다. 줄때 기쁨으로 주었고, 베풀 때 내 마음이 흡족했으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이제 와서 후회하고, 욕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기뻐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줄 수 있고, 어떻게라도 섬기겠다는 마음이 확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이게 안 되는 것입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마음속에 이기적인 생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옛날에 주었던 것을 이제 와서 섭섭하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주기로 마음먹었으면 고맙다는 말을 들을 생각을 하면 안 되거든요. 주기로 했던 것이니 주어 버리고, 희생하기로 하였던 것이니 희생하는 것이 깨끗합니다. 섬기려하다가 섬김을 받으려하고, 주려하다가 빼앗으려하는 것은 유치한 것이요, 평생 변변치 않은 것 하나를 줘 보지도 못하고 살아간다면 이것은 초라한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이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원리>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늘 베풀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섬기는 데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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