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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동체-2] 함께 전도하라 (눅 15:7,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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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전도하라 (눅 15:7,10,32)


스킷 드라마 - 『너 내 친구 맞아?!』 -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무관심의 질병이 심각합니다. 여러분, 사랑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미움이죠? 그런데 이제는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내 집 옆에서 누가 죽어 나가도 그 일이 나에게는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내 곁에서 영혼이 죽어 가는데도 아무런 관심이 없고, 내 가족, 친척, 친구의 영혼이 죽어 가는데도 관심이 없습니다. 무관심과 개인주의, 이제는 우리가 치유해야 할 질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한 주간 묵상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가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우리의 속회는 한 가족입니다. 오늘 둘째 주간의 주제를 말씀드리면 ‘함께 전도하라, 함께 전도하면 풍성해진다’ 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신구약 성경 가운데 단 한 장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누가복음 15장을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5장만 있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3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잃은 양은 자기가 무지해서, 한 눈 팔아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은 돈은 환경 때문에 잃게 되었습니다. 잃은 아들은 자기 판단과 결단에 의해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 가지 중 어떤 경우도 무지한자나 반역자, 배신자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잃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죄악된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습니다. 돌아오면 용서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에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다 놓고 잔치를 벌입니다. 바보같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놓고 잔치를 위해 멀쩡한 양 몇 마리 죽입니다. 동전 하나 찾고 나서 벗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입니다. 동전 하나 찾고 동전 몇 닢은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런 손해보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무슨 얘기입니까? 영혼을 찾는 일,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 신앙생활 하는 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전자계산기 두드려서 하는 일이 아니다, 손익계산을 따질 일이 아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의 그 무엇 가운데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잃은 아들의 비유 

탕자의 비유’에서 이 탕자가 돌아오니까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신발을 사주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 환영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가출한 청소년을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소년에게 탕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이제라도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신발을 사주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 환영해 주실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몇 주 후, 그 소년을 만났습니다. “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구나”, “예”, “그래 신발을 사 주시든?”, “아니요, 발바닥이 터지도록 맞았는데요”, “그래 금가락지를 끼워주셨겠지?”, “아뇨, 지갑까지 다 빼앗겼는걸요”, “그럼, 송아지를 잡아 주셨겠구나”, “아뇨, 송아지를 잡아 제게 주시는게 아니라 나를 잡아 송아지에게 먹이려고 하시던데요”... 

인간의 사랑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도 끝도 제한도 없습니다. 내 허물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고, 내 실수보다 하나님의 용서는 더 크고, 내 죄악보다 하나님의 구속의 보자기는 더 큽니다. 

잃은 양의 비유에서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시장에서 양 한 마리 사다 놓고 백마리 됐다 할 수 없는 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내가 아침 저녁으로 이름을 부르던 그 양, 상처 났을 때 어루만지던 그 양, 내가 직접 젖을 짜던 바로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애쓰는 것입니다. 

아들 하나가 집을 나갔습니다. 고아원에서 나이가 비슷한 아이 하나 입양해서 데려다 놓고 이제 두 아이 됐다 그러면서 웃을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내 핏줄을 타고난 내 아이, 옹아리와 걸음마를 할 때 내게 기쁨을 주던 그 아들을 찾을 때까지 끝까지 대문을 닫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어버이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사랑하시는지, 자기 생명과 우리 자신을 맞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산 양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달리는 119 구조대원과 같은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조대원이 앰블런스를 타고 앵앵 거리고 달려갈 때 다른 모든 차와 사람이 길을 비켜 줍니다. 교회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이라고 하면,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을 살리는 일이라고 하면, 영혼을 건지는 일이라고 하면,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은 길을 비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정신이요, 복음 목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심장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결론적인 비유, ‘잃은 아들(탕자)의 비유’에서 주인공을 알아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둘째 아들(탕자)을 주인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의 시작(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1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이때 (2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들이 가까이 와서 비판했습니다. “저 예수라는 사람은 꼭 놀아도 저런 것들하고 논다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몸을 돌려 저희에게 비유로 일러 말씀하십니다. (3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들어야 될 일차적인 청중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맏아들입니다. 

우리가 소설 한 권, 영화 한 편을 보아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합니다. 칼이 한 번 쓱 지나갈 때, 엑스트라들은 몇 십 명씩 죽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총을 몇 방씩 맞아도, 언덕으로 굴러 떨어져도 누군가에 의해 구조되고 치료받아 회복함으로 끝까지 살아남아 마침내 악인들을 심판합니다. 끝까지 살아남아 매듭을 짓습니다음. 이것이 주인공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주인공일 수도 있고, 아버지가 주인공일 수 있고, 맏아들이 주인공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조금 확장을 하면서 초점을 맞추는 것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맏아들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둘째 아들의 이야기는 24절까지 나오고 뒤에는 안 나옵니다. 뒤에는 맏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로 끝납니다. 이것은 맏아들이 주인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이 본문을 읽으면 오늘 말씀은 교회의 타성을 책망하는 메시지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감격과 감사를 잃어버린 못난 신앙, 습관을 따르는 신앙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상실한 교회를 향한 책망입니다.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만 교제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들끼리만 교제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교제해도 바깥세상에는 무관심한, 나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복음을 전할 마음이 없는 강퍅한 신앙인들을 책망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바리새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맏아들이 바뀌기 전에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맏아들이 어떠하였길래 그렇다는 것인가요? 

1. 그는 먼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왜 맛있는 반찬을 드시면서도 눈물을 흘려야 하시는지, 따뜻한 이불을 덮고 주무시면서도 왜 추워하시는지, 왜 대문을 잠글 수 없는지, ... 아버지의 고통을 외면하고 살았던 못난 자식이 맏아들이었습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벌이고 너무나도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에 초를 치는, 잔치집 분위기를 망가뜨린 아들이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2. 그는 동생을 형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밭에 있다가 돌아와 보니 집안에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 너머에서 종을 부릅니다. 이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종이 말했습니다. 

(27절)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여기서 종이 제대로 말했습니다. ‘당신의 동생이(Your brother)’, ‘당신이 사랑해야 할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맏아들은 한 번도 자기 동생을 향하여 ‘내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말했습니다. 

(32절)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느냐?’, ‘네 동생(Your brother)'.... 그러나 이 아들은 끝까지 자기 동생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29~30절)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게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여기에서 ‘이 아들’이라는 말을 했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this son of yours\'(당신의 이 아들)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번도 내 동생이라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생을 형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

3. 그는 ‘하나님의 가족-잃은 동생’을 찾을 열정을 잃어버렸습니다. 

맏아들이 동생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그렇게 했다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맏아들입니다. 사실, 둘째 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망했는지, 건물을 지었다가 홍수에 날라갔는지, 사기를 당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앞의 13절에 ’허랑방탕‘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구원의 삶에 합당하지 않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렸다‘는 말은 맏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은 유일하게 둘째 아들을 나쁜 아들로 혹평한 말입니다. 이 말은 비난이었습니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그 아픈 부분만을 과장하여 얘기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 동생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기 잃은 동생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불신자들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면 그들은 돌아오고 싶어합니다. 저들은 모두 세상과 쥐엄 열매에 이제 지쳐 있습니다. 세상은 저들에게 배부르게 할 수 없었습니다. (17~20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여러분, 우리 주변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탕자들이 많습니다. 그들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한 사람씩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이 앞으로 함께 천국 가족이 될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러한 사람을 품지 않는다면 우리는 맏아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한 우리 미래의 가족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위대한 명령입니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찬송508장)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이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15장은 32절로 완성되지 않은 채 끝나고 있습니다. 33절이 기록되어야 완성됩니다. 
33절의 내용은 2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맛있는 음식을 드시면서도 왜 우셔야 했는지 몰랐습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아버지 품에 안기고 이후로 형제간에 화목하게 살아가는 내용이 가능합니다. 

둘째로는, 이번에는 맏아들이 아버지 가슴에 못질하고 집을 떠나는, 아버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집을 나가는 내용이 가능합니다. 성경에는 왜 그 33절이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기록해야 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33절을 어떻게 기록하고 싶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 사시겠습니까? 

금번 공동체 40일 기간 동안 속회, 소그룹에서 함께 전도해 봅시다. 속회로 모일 때마다 기도하면서 불신자를 초청해 보는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불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과 교회를 자랑하시고, 나와 사랑을 함께 나누는 성도들을 자랑하십시오. 그리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었다 싶으면 속회로 초청하고, 알파코스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놀랍게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함께 전도하라’, 복음 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말씀을 묵상함으로 여러분의 삶에 놀랍고 위대한 일을 체험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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