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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받았습니다 (고후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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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받았습니다  (고후 6:1-2)

 
어떤 학생이 큰 아버지 회갑 날 “회갑잔치 축하드립니다” 하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회갑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아 ”육갑잔치 축하드립니다” 하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구역식구가 아들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심방을 갔는데 “식물인간”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아드님이 야채인간이 되어서 어떻게 하지요”하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언어나 단어의 사용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나 수준이나 삶의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대화에서 그 사람의 직업이나 관심사항이 무엇인지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은혜”라는 단어라고 합니다. “은혜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은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생각으로는 알겠는데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곡해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가 참 은혜로웠습니다”고 말합니다. “설교가 어땠는데?” 하고 물으면 “너무 웃겨서, 아주 짧아서 은혜로웠다”고 합니다. 모두 은혜라는 말을 잘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오늘은 구원의 날이로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여 신앙이 잘 정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이간하며 복음을 왜곡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의 신앙이 흔들리고 염려가 되었습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속상한 일이 이간자들이 와서 현혹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들이 신앙이 흔들립니다.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바울이 그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십자가의 도가 주어졌는데 지금 현혹자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경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여기서 은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은혜”라는 말을 헬라어로 “카리스(charis)라는 말입니다. 이 카리스와 가까운 단어가 “카라”(chara)인데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 라는 말도 “감사”라는 뜻입니다. 모두 “카리스”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받았다”라는 말 속에는 이 기쁨과 감사가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상 

“은혜”라는 말은 “공짜, 무상, 조건 없는 증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 없는 증여이고 공짜라는 말입니다. 오늘 세상 모든 것에는 다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뇌물도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물로 다스립니다. 쉽게 말하면 공짜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이 은혜에 가장 가까운 단어는 부모의 은혜이고 스승의 은혜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여기에도 약간의 조건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배은망덕이라는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호의 즉 선물이란 뜻입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그 시대 비천계급이었고 빈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녀가 선택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은혜를 입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찜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로 마리아는 졸지에 “은혜 받은 자”(누가복음2장30절)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보면 마리아 뿐 아니고 나 자신도 그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도 선택받아 구원받고 성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 나를 선택하셨는가 하면 나도 모릅니다. 내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주님은 나를 알고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신앙입니다. 

나눔 

사도행전4장33~35절을 보면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으로 ... 나누어 줌이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결과는 변화입니다. 그 변화는 나눔으로 유무상통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독점이 아니고 나눔이고 증여이고 배품 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나누고 베풀고 너를 향한 철학을 발휘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나, 우리 집, 내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그 공동체는 죽어갑니다. 

그런데 은혜 받은 사람은 나눕니다. 그 나눔 중에서 가장 좋은 나눔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나누는 유무상통의 상징입니다.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독점하는 것입니다. 지식인의 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 그것이 독점이고 지식인이 짓는 죄입니다. 이미 먼저 믿은 사람이 전하지 않으면 그것도 직무유기이고 독점이고 그리스도인이 짓는 죄입니다. 

복음은 가장 좋은 것이고 그래서 굿 뉴스라고 말합니다. 그 굿 뉴스를 전하지 않으면 직무를 유기하는 것입니다. 저 소말리아 해협에서 우리 해군이 해적선을 물리쳤습니다. 국민 모두가 빨리 알아야 할 고급정보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언론사중 하나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러고도 살아남겠습니까. 그것은 직무유기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누고 전하는 생활입니다. 그것이 유무상통의 삶이고 그것이 은혜 받은 삶입니다. 

감사 

은혜라는 말은 사도바울이 많이 사용한 말입니다. 로마서에서 20회, 고린도전후서에서 223회, 다른 서신서에서 48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택함 받은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부름 받은 것도, 믿음을 갖게 된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 것도, 고난 중에서 건짐 받은 것도, 풍부와 넉넉함과 성공만 은혜는 아니고 때로 결핍도 은혜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몸에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더니 “내 은혜가 족하니 그대로 살라(고린도후서12장9절)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풍부와 건강만 은혜가 아니고 결핍도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영광이나 성공이나 승리만 은혜가 아니고 때로 고난도 은혜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도 은혜이고 부족함도 은혜입니다. 오늘은 너무 풍성을 추구하고 성공과 현실만 지향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온갖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부작용이 비만으로 나타납니다. 정신의 비만으로, 생각의 비만으로, 마음의 비만으로, 육신의 비만으로 나타납니다. 

오늘은 이 비만이 큰 문제입니다. 공원에 가 보면 걷기도 힘든 분들이 기우뚱거리며 걷느라고 애를 씁니다. 그런다고 비만이 사라집니까. 비만은 굶어야 빠집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굶지를 못합니다. 놓아야 하고 포기해야 하는데 놓치를 못합니다. 불가마에 가 보면 사람들이 반 죽어가면서도 나오지 않고 땀을 흘리고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나와서는 또 식혜를 한 그릇씩 마십니다. 못 말립니다. 오늘은 너무 많아서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입니다. 

어떤 부자는 너무 가진 것이 많아서 도적들이 집에 들어올까 봐 모든 패물을 은행 금고에 넣어 두고 일주일에 한번 씩 면회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반드시 많은 것만 은혜가 아닙니다. 때로 적음도 가난도 은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삶이고 환경이라면 모두가 은혜 일 뿐입니다. 역설이지만 그래서 약한 것이 강할 때가 있습니다. 혀와 이빨이 싸우면 반드시 혀가 이깁니다. 그것이 약함의 강함입니다. 여성들이 약한 것 같지만 결국에 가 보면 모든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이끌려 가게 됩니다. 여성들이 왜 약합니까. 유사시가 되어 보십시오. 여성들이 얼마나 강하고 질기고 모질깁니까. 

생각을 좀 깊이 해 보면 반드시 많은 것만 은혜가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건강한 것만 은혜도 아닙니다. 때로 적은 것이 은혜일 때가 있습니다. 약한 것이 은혜일 때도 있습니다. 시력이 2.0인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피곤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성격이 완벽한 사람은 피곤해서 함께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너무 잘 익은 곡식은 거두기 전에 다 떨어져버립니다. 

그래서 곡식을 추수할 때는 약간 덜 익었을 때 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외모를 가진 분들은 교회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미인들이 없습니다. 조금 약한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도 강한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눈물이 있고 무릎을 꿇고 금식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하여 주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눈물을 쏟으므로 다시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매일 밤 침상을 적시는 눈물을 흘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부름을 받았습니다. 

축복 

은혜라는 말은 축복의 언어입니다. 서신서를 보면 사도바울은 말미에서 “은혜와 평강이 있을찌어다”하고 이 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편지를 쓸 때는 편지 말미에 인사를 하게 되는데 그 인사가 대부분 강녕, 평안, 건강기원이 대부분 입니다. 사도바울은 “은혜와 평강”입니다. 더 예민하게 서신서를 보면 상대가 헬라 사람들일 경우에는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헬라인은 이방인으로서 구원받은 것이 순전히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유대인인 경우에는 “평강”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평강이라는 말은 살롬이라는 말인데 살롬은 유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혼재한 경우에는 “은혜와 평강”을 함께 구사했습니다. 그래서 은혜는 축복의 단어입니다. 미국인들은 마지막 헤어지며 인사할 때에는 "God bless you"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은혜는 축복의 언어입니다. 우리 입에서도 가능하면 많이 이 말이, 단어가,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선물 

본문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귀한 하나님의 은혜의 값을 모르면 값싼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은혜에도 두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는 소위 내 기도가 중심이 되는 은혜를 구하는 일입니다. 지극히 나 개인 중심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중심이 된 은혜를 구하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전하는 자 됨을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값비싼 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 대부분은 값싼 은혜를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자 본 훼퍼는 이런 은혜를 “값싼 은혜”(cheap grace)라고 말했습니다. 값싼 은혜라는 말은 본 훼퍼가 세속의 권력에 붙어있던 당시의 독일교회의 안일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사용한 말입니다. 권력에 붙어살면서 그때마다 평안을 누리려는 당시 독일교회의 태도가 값싼 은혜를 구하는 모습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것이 짝퉁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성장한 교회, 수단이 난무하는 오늘의 목회, 요행위주의 신앙들, 축복위주의 기도, 이모두가 짝퉁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나 생명을 주관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풍부도 적음도 불행도 성공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로 알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난도 적음도 실패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불행한 역사도 그 배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미국의 어느 부부가 뉴욕에 있는 무역센터에 가기 위해서 비행장으로 가던 도중에 타이어가 펑크 나서 교체하느라 시간이 늦어져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그때 그 부부는 속이 상하였을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이 순간에 펑크가 나고 비행기를 놓치게 하는가 생각할수록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부부는 몇 시간 후에 뉴욕 무역센터가 불타고 있다는 뉴스를 듣게 됩니다.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그만 911테러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을 알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뉴욕에 사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그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당시 소방관이었는데 그 소식을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사고현장에서 인명을 구조하다가 빌딩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또 웬일입니까. 이것이 은혜인가 불행한 일입니까. 아들 부부는 자신들이 구출되는 은혜에 감사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죽음으로 다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순간 이 부부는 자신들을 살려주신 하나님은 왜 또 아버지를 불러가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대 혼란이 왔습니다. 

게다가 불행한 것은 아버지가 그때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의문으로 혼돈을 겪는 동안 3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갓난아이를 안은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임신 7개월 때 무역센터에 근무 중 이었는데 그만 911 사고가 발생하였고 급히 아래층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그때 사망한 그 소방관 아버지가 그 부인을 부축해서 아래층까지 내려오는 것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또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다시 건물로 올라가다가 건물이 무너질 때 사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또 말해 주었습니다. 그 여인이 함께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그 아버지에게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십니까?” “아직 믿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러자 “그럼 자식들도 믿고 있으니 나도 예수를 믿겠다”고 해서 계단을 내려오던 중 서로 손을 잡고 영접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을 아래까지 무사히 내려다 주고 또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올라갔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고 3개월 후에 이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 이름을 사고를 당한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었다면서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바람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때 예수도 영접하고 또 무사히 봉사하고 집으로 돌아와 오늘 그 사람들과 그 아이를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의 드라마는 쓰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더 큰 감동을 주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때로는 십자가도 지우시는 것입니다. 해적들에게 피랍된 선장이 총에 맞아 오늘 사경을 헤매기 때문에 그의 헌신이 세상에 더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이 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이 시대에 십자가를 지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으나 살고 죽으나 더 감사하고 그 죽음을 우리는 은혜로 받아들이고 은혜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카리스”라고 합니다. 이 카리스의 은혜는 감사이고 기쁨이고 무조건 주심이고 나눔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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