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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들 (마 5: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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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들 (마 5:13-20)
   

미국 뉴욕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주 흐뭇한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마스가 되면 한 사람이 거리에 나와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10불씩을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10불을 나누어주는 천사가 있었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도 무려 3천불이나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하게 된 어떤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기자들이 찾아와서 그가 누구인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묻는 바람에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에게 뼈아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가 20대 젊은 시절에 직장이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돈도 얼마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마지막 남은 돈을 들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면서 ‘오늘 저녁부터는 어디서 먹고 어디서 잘까?’   고민하고 있는데,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식당 안으로 지나가면서 허리를 굽혀 바닥에서 뭔가 줍더니 “여보게 젊은이, 자네가 돈을 떨어뜨렸어.”하면서 10불을 주고 나갔답니다.  

사실 그는 돈을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젊은이가 혼자 점심을 먹는 모습을 저편에서 지켜보던 할아버지는 수심이 가득한 이 젊은이에게 큰 문제가 있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그 옆에 와서 10불을 떨어뜨리고는 주워주는 척 하면서 돈을 주고 간 겁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착한 행동은 후에 더 큰 감동으로 갔습니다. 이 젊은이가 후에 사업에 성공하였습니다.  청년 때에 받은 감동이 있어서 크리스마스만 되면 모르는 사람들에게 10불씩을 나누어주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5-7장의 말씀을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황금과 같은 교훈의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 교훈의 요약이다”라고 극찬한 분들이 많습니다.  “산상수훈은 인간 윤리의 최고봉이다”라고 했습니다. 

산상보훈은 천국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교훈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구원받는 이신칭의와 같은 교리적인 문제는 전혀 말하지 않지만,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 전제하면서 실천적인 윤리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주제는 ‘천국시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천국시민입니까?  우리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기독교인들이 천국시민입니다.   말로만 천국시민이라고 하지 말고, 천국 시민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천국시민의 직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9절 말씀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크다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는 것으로 그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성경에서도 많이 읽었습니다.   

“목사님, 너무 잘 아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하신다면 졸리지요.  들어보지 못하고, 잘 모르는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셔야 들어볼만 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으신 분들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성도들이 아시는 대로 잘 산다고 하면 목사가 잘 아는 것을 가지고 설교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교회를 보면 또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가장 절실하게 들어야 하는 말씀이 소금이 되라는 말씀과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소금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13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긍정적인 경험으로 산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실패하고 부정적인 경험으로 알게 되면 뒤늦은 사람이요, 실패자요, 낙오자가 될 뿐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소금이 되어 짠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며 우리의 소임을 다하였다고 하면, 소금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소금의 역할을 잘하지 못하여 짠맛을 잃어버리고 이제 사람들에게 밟히게 되면서 비로소 소금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면 부정적으로 알게 된 사람입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소금의 역할을 잘해서, 사회를 썩지 않게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왜, 부정적으로 소금의 짠 맛을 잃어버린 후에 사람들에게 밟히면서 그제야 후회하면서 소금의 소중함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기독교회가 항상 뒷북을 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도 크지만, 그 책임도 큰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소금이란 고대로부터 정말 유용한 필수품이요, 소금이 없이는 식품을 오래 보존할 수가 없었고, 맛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는 것이,  소금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고대에는 소금을 월급으로 주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월급쟁이를 셀러리-맨(salary man)이라고 하는데, 영어에서 온 말이 아니라, 영어를 일본식으로 말하다보니 생겨난 말이라고 합니다.  굳이 영어로 말하면서 'a salaried man'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셀러리’라는 말은 라틴어의 소금(salt)에서 유래된 말이었습니다.  화폐경제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 로마제국에서는 군인들에게 봉급 대신에 소금을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소금을 월급으로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이만큼 소금은 곧 돈이었고, 생활필수품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 가면 ‘잘츠부르크  ’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활동한 곳으로 음악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영어로 소금을 salt 라고 하는데, 독일어는 salz 라고 합니다.  

잘츠부르크라는 곳은 독일어로 소금광산이라는 말로 이곳은 내륙이지만, 옛날에는 바다였기에 소금이 많이 나는데, 암염입니다.   소금광산으로 널리 알려지고 부유한 도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소금이 안 쓰이는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천일염이 유명합니다.  신안의 증도에 가면 갯벌을 다지고 갯벌에서 생산한 소금이 있는데, 알아줍니다.   죽염을 생산하는 사람들을 보면 9번 구운 소금이 사람을 살린다고 주장합니다.  

고대 라틴교회, 로마교회에서는 세례를 줄 때에 입에 소금을 넣어주었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교회가 공인한 세례의식은 아니었습니다.  한 때에 교회는 세례받는 사람들의 입에 소금을 넣어주면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제부터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실물 교육 하였습니다.  그래도 이런 의식이 여러 교회에서 행해진 것을 보면, 이제 세례를 받았으면 구원받은 사람으로 이 세상을 썩지 않게 하며, 맛을 내는 소금으로 살라는 교훈을 담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약속의 말씀을 하실 때에 이 언약은 소금언약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원한 소금언약이라는 말은 변치 않는 약속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대표적이 말씀으로 역대하13:5인데, 한번 보겠습니다. 

대하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맡겨주셨는데, 소금언약으로 맺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언약이라는 말은 불변성, 방부제, 영원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은 영원 불변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소금이 가지는 상징으로 불변하며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소금은 정결하게 해준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연한 소금물로 목욕을 시켰습니다.    정월초하루가 되면 일 년 동안 부정을 몰아낸다고 대문 밖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예전에는 폐병이나 나병 같은 몹쓸 병자가 다녀가면 마당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운동장에 액운을 물리친다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지금도 일본 스모선수들은 매트에 나와서 소금을 뿌립니다.  

   소금은 다만 부패만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감칠맛을 내었습니다.  설렁탕이나 곰탕 같은 음식은 소금이 안 들어가면 비리고 역겨워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만 들어가면 구수하고 깊은 맛, 고유한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과가 태풍이 많이 떨어져 사과 값이 금값이 되었습니다.  사과 구경하기가 정말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한 일년동안 사과 먹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금은 먹어야 합니다.  소금이 들어가지 아니한 음식을 한번은 먹을 수 있습니다.  하루는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목이 올라서 도무지 먹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소금을 먹지 않고, 한 달을 방사능 동위원소치료를 준비하는 환자들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소금 속에 옥소가 들어 있는데, 소금을 먹지 않으니 몸에 옥소가 부족합니다.  암균이 옥소만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옥소만 들어오면 전부 빨아들이려고 굶주리고 기다릴 때에 옥소에 오염된 동위원소를 먹으면 갑상선 암균이 옥소가 들어오는 줄 알고 그 동위원소를 집어 삼키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갑상선암을 치료합니다.   소금 요법을 씁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소금이어야 합니다.    가정의 소금도 아니고, 교회의 소금도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소금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소금이어야 합니다. 저 세상에서 가서 소금이 아닙니다.

   우리는 소금이 그 맛을 내려고 하면,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내려놓고 녹아지고 스며들고 없어질 때에 모든 식품에 들어가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소금이 녹아질 수 없다고 합니다.  왜 나만 내려놓아야 하고, 나만 희생해야 하느냐고 한다면 이 세상의 부패는 가속될 뿐입니다.  전혀 녹아질 줄 모르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우리 사회는 더 빨리 부패해지고 썩어 냄새가 날 뿐입니다.  

   로마제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이 4%가 되지 않았어도 국교로 만들었으며 썩어가는 제국을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의 처녀들이 아니라면, 제대로 눈뜬 자식을 낳을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 로마의 유일한 소망은 기독교에 있다고 자인하였습니다.  로마의 고관들이 자기의 자식들은 똑바로 된 처녀와 결혼시켜야겠고, 자기의 딸들은 제대로 된 청년에게 출가시켜야 하는데, 바로 보니 기독교인 청년들만 순결하고 꿈이 있고, 바르게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부패 타락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소금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후에는 아무 쓸데가 없어 밖에 버리게 되고,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주님이 소금을 가지고 말씀하지만, 눈에 보이는 소금만 말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소금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소금이면서, 교회에서는 소금이라고 하면서 세상에서 나가서는 비기독교인이나 다름이 없거나, 오히려 더 타락한다면 되겠습니까?   나 한 사람쯤이야 한다면 우리 사회는 전혀 달라질 수 없습니다.  나 한 사람만이라도 소금으로 산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목사의 직분과 직위가 얼마나 소중한데, 성도라는 신분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 그가 소금이기를 포기하고 보니,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천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무 쓸데가 없어 밖에 버리게 되고,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거나, 거룩한 존재임을 망각하면 손가락질 당하고 불신자들의 발에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전혀 녹을 줄 모르는 소금이라면 실로 암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14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참 빛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요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요8:12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1:9에서도 우리 주님을 증언하면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빛을 발산할 수 있습니까?   참 빛이신 주님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빛이라고 하면 우선 태양빛을 연상하게 되는데, 태양의 광선은 빛과 열, 살균성이나 결실작용 등 많은 작용이 있지만, 우리 주님은 어둠을 밝히는 빛, 모든 물체를 분별하게 하고, 정체성을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어둠은 죄악이요, 빛은 생명이며 진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15-16절입니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착한 행실로 빛을 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세상의 빛으로 살아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 어디를 가도 어두운 곳이 없도록 밝은 빛을 비취면서 빛의 소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빛이 되지 못하고 곳곳에 어둠이 깃들고, 교회마저 어둠으로 뒤덮이게 되니까, 우리가 본래는 빛이었는데 그 빛을 잃어버렸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른 종교가 들어와 우리 사회의 빛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빛나지 않는 빛은 빛이 아닙니다.  불은 타오를 때만 불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게 비추어야 하고, 지속적인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인도에서 사역했던 맥스웰 선교사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힘썼던 사람입니다. 한번은 힌두교도인 인도인에게 그 지방 말을 배우고 싶어서 가르쳐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정중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제가 기독교인이 될 것 같아서 거절하는 것입니다”    맥스웰 선교사가 “제가 절대로 예수님 믿으라고 전도 안할 테니까 말만 가르쳐주십시오.”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맥스웰 선교사의 삶 자체가 예수님을 삶으로 보여주었다는 증거입니다.

3.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17절 말씀에서 우리 주님은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이 억지가 아니라, 율법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에 율법은 완성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형식을 중요시하지만, 우리 주님은 내용을 중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으로 아니하면 율법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큰 자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고 하셨습니다.   
19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고, 작은 것도 작다하지 않고, 이것은 큰 교훈이니 나는 어렵다, 못한다고 하지 않고, 말씀 안에 거하려고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런 사람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큰 자라고 불러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심히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우리 주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의입니다.  아무리 힘써 살아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이를 넘어설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구원받은 감격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말씀 중심으로 살아서 천국에서 큰 자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고 주님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 까지 이르도록 우리를 키워나가야 합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이것은 섬김의 신앙이 아니라면 성화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이 섬김의 삶을 사신 것처럼 우리도 섬김으로 이어지고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진리를 주을 수 없습니다. 허리를 굽혀야 진리를 주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은 “너희는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라.  너희가 없으면 사람 살맛이 나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사람들은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들은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살아가려고 힘쓰시는 중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라는 칭찬과 영광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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