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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3) (계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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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3) (계 2:12-17)


1830년대의 일입니다.  독일 트리에(Trier)라는 도시에 살고 있던 한 유대인 소년이 법률가였던 그의 아버지에게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아버지, 우리는 유대인인데 왜 토요일 유대인 회당에 안 가고 루터교회에 나가나요?"  그런데 이 아버지의 대답은 전혀 신앙적인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지 않고 이 땅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단다."

본래 이 질문을 던졌던 소년의 할아버지는 유대인 랍비였습니다.  그의 큰아버지도 역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대인 랍비였습니다.  그러나 현실 감각이 빠르고 이재에 밝았던 이 소년의 아버지는 독일에 살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과 사회적인 불이익을 피해 가기 위해서 그는 교회를 선택했고, 그런 이유로 그는 개신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 없었고, 구원의 체험이 없었던 그는 자기 아들에게 아무런 신앙적인 영향을 끼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소년이 나이 6살에 유아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그것이 이 소년을 믿음의 아들로 자라나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자라던 이 소년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교회와 결별하고 교회를 완전히 떠나갑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인 1847년 그는 엥겔스라는 사람과 함께 영국 런던에서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칼 막스(Karl Marx)였습니다.

우리가 결과적인 가정이라고는 하지만 만약 이 소년이 교회 안에서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갈 수가 있었다면 세상의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어쩌면 우리 나라의 역사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교회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 안에서 자라나고 교회를 출입하며 살아가면서도 믿음을 배우지 못하고 믿음을 지키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게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부모가 신앙생활을 한다지만 그 부모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아무런 신앙적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목격하게 됩니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를 그대로 모방하면서 자라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그 신앙생활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자라납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진실된 신앙고백과 구원의 체험이 있는 신실한 신앙생활은 자녀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고백과 구원의 체험이 없는 거짓된 종교생활은 자녀들에게 저주의 통로가 되고 말 것입니다.  부모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종교생활은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믿음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 되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  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과 헌신과 사역에 아름다운 믿음의 본이 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부모의 신앙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1세기에 존재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서 보내신 편지들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 중에 세 번째 교회인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이 시대 우리들의 교회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버가모 교회를 통하여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의 비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여기에 보면,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좌우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버가모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이 두 가지였던 것으로 주님께서 판단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부단하게 살피고 성찰하는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당당할 수 있고 부끄럽지 않은 교회가 되라고 권면하시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때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이 두 가지의 이미지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경우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고 축복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런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12절에 나타난 좌우에 날선 검이 16절에 다시 나타납니다.  본문 1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심판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순종하여 회개할 것인가, 아니면 심판을 받을 것인가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이 교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칭찬도 하시고 책망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버가모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을 살펴보겠습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은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사탄에 대한 언급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버가모라는 도시와 관련하여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 사탄이 사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1세기에 이 버가모 교회가 처한 역사적이고 영적인 정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지금의 터키에 있는 베르가마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도시에 가면 도시의 어디에서든지 당시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350m 높이의 산 정상에 소위 아크로폴리스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산꼭대기에 소위 제우스의 신전을 비롯하여 디오니소스 신전, 아테나 신전 터가 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테나 신전 터는 동시에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한 아우구스투스 신전 터로 사용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버가모라는 도시는 주전 197년부터 138년까지는 버가모 왕국 시대를 자랑했습니다.  당시에 유명한 통치자인  유메네스 2세와 그의 동생 아타루스 2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이 도시는 가장 번영했고 소위 버가모 왕국의 황금시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시대를 태평성대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당시에 부상하고 있었던 가장 강력한 권력인 로마와 더불어 협력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신전을 세우고 로마의 신들인 이교의 신들을 그들이 동시에 숭배했으며 심지어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를 신으로 숭배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BC 4세기 초부터 이 도시에는 의학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를 숭배하는 신전과 병원이 세워져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의 치유를 위해 이 도시를 찾고 있었습니다.  AD 129년에 이 도시에서는 유명한 의사인 갈렌(Gallen)이라는 사람이 태어납니다.  그의 명성과 공헌으로 이 곳에서는 현대적인 병원 도시가 형성됩니다.  그 당시에 심리치료, 음악치료, 목욕치료, 식이요법을 병행하는 치료들이 이 도시에서 이루어졌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의학적인 시술과 함께 이 도시에서는 치료의 신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 숭배가 성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요즈음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서 요가를 많이 합니다.  요가의 1단계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요가를 깊이 들어가면 요가의 목적은 인도의 브라만 신이라고 하는 이방신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요가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요가는 요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방신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파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시의 정황이 사도 요한이 보기에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 다시 말하면 사탄의 본부가 있는 도시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버가모는 가장 이교적이고 가장 세속화된 도시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의 한 모퉁이에서 작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은 이런 도시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굳건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13절에서 칭찬하고 계십니다.
"너희들은 내 이름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이런 도시의 세속화된 우상숭배의 풍조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나를 믿는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자를 배출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안디바라는 사람이 순교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디바가 어떤 사람인지 역사적으로는 잘 아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안디바가 안씨 가문의 명예를 높인 것은 확실합니다.  당시에 이 도시에서는 "제우스가 주님이시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었습니다.  혹은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가 주님이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속화된 고백들 속에서 "아니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담대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 때문에 붙들려가 순교를 당한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 가운데 상당한 사람들이 그를 따라서 이런 흔들리는 세속화와 사탄숭배의 풍조, 우상숭배의 도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버가모 도시를 방문하면 거대한 우상 신전의 시장 터인 아크로폴리스의 산 아래에 믿음을 지켰던 이 버가모 교회의 작은 공동체를 기념하기 위해서 나중에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붉은 벽돌교회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본래 태양신이었던 세라피스 신전 터를 개조해서 교회로 썼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런 거창한 우상화와 세속화의 한 복판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았던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칭찬 받을 만 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을 굳게 잡고 나를 믿는 믿음을 져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이렇게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 더러는, 아니 그들 중에 상당수는 오히려 책망이 필요했던 성도들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번에 다시 책망하십니다.
그렇다면 버가모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은 무엇입니까?

본문 14절과 15절에 보면 버가모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라가는 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에 대하여는 이미 에베소 교회를 향한 메시지에서 다룬 바가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이 니골라당이 무(無)율법주의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는 무(無)율법주의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법인 율법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삶의 표준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 행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율법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좇아 살기 위하여 발버둥 쳐야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율법주의가 아니지만 동시에 무(無)율법주의도 아닙니다.

그런데 니골라당은 무(無)율법주의인 방종에 빠졌던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성적인 방종에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도덕적 방종에 빠져있었던 무리들이 바로 니골라당이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을 한마디로 말하면 쾌락주의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적당한 쾌락은 필요합니다.  성경은 쾌락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즐기는 것을 결코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의 법을 떠난 방종을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발람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구약성경 민수기에 보면 거짓 선지자 발람이 나옵니다.  선지자란 백성들을 잘 인도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발람은 당시의 모압왕 발락에게 돈으로 매수를 당해 자기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주하려고 하지만 자기 입으로는 자꾸만 축복이 나옵니다.  결국에는 재물에 눈이 먼 발람이 발락 때문에 발락 뒤집어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숭배의 자리로, 그리고 음행의 자리로 잘못 인도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돈 때문에 선지자의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뇌물 때문에 눈이 어두워 백성을 잘못 인도했던 사람입니다.

발람의 교훈은 오늘날의 배금주의, 물질주의와 같은 것입니다.  혹은 오늘날의 맘몬주의를 대표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돈 때문에 신앙을 배신하고, 돈 때문에 양심을 배신하고, 돈 때문에 스스로의 자존심을 팽개치고, 돈 때문에 명예도 버리고, 돈 때문에 돈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지도자들 때문에, 이런 교회들 때문에, 이런 교인들 때문에 얼마나 교회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과 제가 이런 세속적인 쾌락주의와 세속적이고 물질주의적인 맘몬주의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주님은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는 두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는 감추어진 만나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배고픔에 대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에 끊임없이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이 물질로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감추었던 하늘의 만나를 준비했다."  저는 이 하늘의 만나가 예수님의 임재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아도 만족함이 없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이 되면 만족하게 됩니다.  그분과의 사랑에 빠질 때 배고픈 것이 없어집니다.  그분에게로 삶의 초점을 옮기게 될 때 인생의 허무함과 절망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약속은 흰 돌에 새로운 이름을 새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연회석에 초대되었을 때, 그 초대권으로 '테세라'라고 불리는 흰 돌을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흰 돌을 가진 사람만이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흰 돌을 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을 때 천국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 흰 돌 위에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것은 받는 사람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신앙의 참된 기쁨은 그것을 체험한 사람만이 그 맛을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구원의 체험을 한 사람 외에는 그 진실된 맛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간증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어야 됩니다.  놀라운 일들이 생겨야 됩니다.  세상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경험한 나 밖에는 알 수 없는 놀라운 일들과 이야기들과 간증과 감격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이 기쁨과 감격을 네 인생에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나와 우리 주님과만 아는 구원의 그 깊은 감격의 맛을 경험하십시오.  아무도 알 수 없는 나와 하나님만이 아시는 놀라운 믿음의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십시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버가모 교회를 통해서 배워야 할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1세기에 존재했던 버가모 교회를 통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의 비전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의 모습은 바른 믿음을 지키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 믿음을 소중히 여기는 성도가 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라는 그 믿음을 간직하고, 그 믿음을 지키며 나가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그것이 건강한 성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만들어 가는 교회의 공동체가 바로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가장 위대한 재산은 결코 빌딩이 아닙니다.  주일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도 아닙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재산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도 믿음의 유산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자랑이 빌딩이 안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자랑이 교인들의 숫자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자랑이 우리 교회를 채우는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거룩한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에게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신앙고백과 구원의 체험을 통한 믿음이기를 축복합니다.

초대교회가 핍박의 시기를 지나고 나서 AD 400년부터 소위 비잔틴 시대라는 시대에 들어서게 됩니다.  서서히 교회가 무한의 자유를 누리면서 마음대로 살아가는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세기에 유럽의 여기 저기에 훌륭한 성당들이 세워집니다.  심지어 은과 금으로 입혀진 성당들이 세워집니다.

어느 날 한 사제가 방금 완성된 은과 금으로 입혀진 거대한 성당을 바라보면서 감회가 깊은 표정으로 옆에 있는 다른 사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성경에 베드로 사도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한 시대도 이제는 옛날이 되는 거지."
이 때 그 말을 들은 다른 한 사제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선포할 수 있는 그 시대도 지나간 것인지도 모르지요."

맞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 그리고 우리들에게 있는 최대의 자산은 오직 예수뿐인 것을 확인하십시다.  이 세상에서 예수의 이름보다도 존귀한 것이 없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그 이름으로 하늘의 문을 엽니다.  그 이름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이 이 땅의 삶에서 방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유일한 구원이 되는 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의 이름,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보다 더 소중하고 더 존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 믿음으로만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믿으십니까?  이 믿음으로만 우리는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믿으십니까?  이 믿음으로만 우리는 하늘 나라의 문을 열 수가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만 우리가 주 앞에 나와 기도할 때마다 응답의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만 삶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만 우리는 죽음의 문을 열고 저 영원한 세계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이보다 더 존귀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세상 속에서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키는 교회, 그리고 그 믿음으로 날마다 살아가는 성도들의 공동체,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1928년에 황금의 목소리를 가진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이 너무 가난해서 대학을 다니다가 중퇴를 합니다.  그리고 보험회사의 세일즈맨이 되었습니다.  우연히 방송국 공개홀에서 노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노래를 불렀다가 황금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의 NBC 방송국에서 전속가수로 체결하자는 요청을 받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23세였습니다.  이제부터 그 앞에는 돈과 인기가 보장된 출세의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교회에서 계속 찬양할 수 있을까?  혹은 복음집회에서 내가 찬양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간증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지거나 기회가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고민하며 기도하던 그가 어느 날 자기 집 응접실에 놓여진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어머니가 평소에 좋아하여 10년을 애송해온 신앙시 한 편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시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주님!  제 목소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존재도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젊음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만 쓸 것입니다.  아무 것도 주님과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때 자기 마음속에 솟아오르고 있는 멜로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의 애송하는 신앙시에 맞추어서 그가 작곡을 시작합니다.  바로 이날 탄생한 찬송이 찬송가 94장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조지 베버리 쉐아'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이 결단 후에 그는 전도자 빌리 그래함을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더불어 평생을 동역하며 찬양과 간증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역에 헌신하게 됩니다.  그는 찬양 사역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적시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놀라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역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랑 받고 있습니다.

그 어느 날 그가 오직 예수 그분을 따라가기로 했던 그의 믿음의 결단 때문에 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그 믿음이 당장에 나에게 돈을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그 믿음이 당장에 박수와 인기를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하는 그 순간, 세상은 알 수 없는 놀라운 삶의 비밀과 그의 인생에 보람의 길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간증들을 가진 성도들이 넘쳐나고 있는 공동체, 저는 이런 공동체야말로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 병든 이웃을 치유하고 병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의 출발은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돈이나 세상의 명예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가장 존귀한 분이라는 확실한 믿음의 고백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내 삶과 존재의 이유가 되시며, 오직 그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예수 이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분명한 믿음의 확신 위에 여러분의 인생을 세울 때 세상을 바꾸는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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