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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서 크게 외치자 (욘 1:1-2, 요 1: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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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 하나님이 닭과 개와 돼지를 일 년 동안 인간 세상에 가서 일하도록 하셨답니다. 닭이 인간 세상에 와 보니 사람들이 얼마나 게으른지 아침마다 ‘꼬꼬댁’하고 울어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닭이 사람들을 깨우는 역할을 잘 했다고 하여 닭에게 벼슬을 내려 벼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개가 와서 보니 인간 세상에 너무 도둑이 많아 도둑을 지키느라 열심히 짖었습니다. 

원래 개의 다리기 세 개였는데 하나님이 상을 내리셔서 네 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가 오줌을 쌀 때마다 하나님이 주신 다리가 젖을까봐 한 쪽 다리를 들고 싼다고 합니다. 돼지는 와서 먹고 자고만 반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돼지에서 벌을 내리셔서 칼로 코를 쳐서 코가 납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스개소리지만 사람들을 깨우치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옛날 전쟁 때는 나팔수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지금은 나팔을 불지는 않지만 첨병으로 최전선에서 적의 동태를 알려주는 수색대의 사명이 아주 중요합니다. 옛날 그리스의 신화에는 미세노스라는 나팔을 부는 신이 있었습니다. 미세노스는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의 나팔수였습니다. 그는 나팔을 불어 병사들을 깨우치고 사기를 돋아주는 역할을 하여 전쟁에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외침이란 큰 소리를 지르는 일입니다. 의견이나 요구 따위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일입니다. 외침은 고독과 외로움을 동반합니다. 희망을 가진 외침은 많은 좌절을 감수해야 합니다. 모두들 잠들어 있을 때 깨어 있어야 합니다. 모두들 외면하고 있을 때 홀로 생각해야 합니다. 외치는 자는 어느 시대나 필요하고 어느 시대나 외로운 일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흔히 예언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무엘을 비롯하여 말라기까지 많은 선지자가 백성을 깨우쳤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세례요한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예수님께서 오심을 전하는 일의 마지막 선지자는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직업이 다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모양도 다양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직접 불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신탁’이라고 합니다. 선지자는 히브리어로 ‘나비’라고 합니다. 

‘나부’라는 말이 ‘중얼거리다’는 뜻인데 선지자는 항상 말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말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의 요나도 선지자로서 외쳐야 했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요나가 가고 싶었습니까? 그는 가기 싫어 다른 곳으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선지자는 싫어도 외쳐야 합니다. 외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뜻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말고 외치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선지자들은 생명을 무릅쓰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반드시 외쳤습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단지 앞으로 나타날 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예언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대를 비판하는 소리의 역할을 했습니다. 바른 소리는 항상 위험을 동반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면 괜찮은데 듣기 싫은 말을 하면 항상 불이익을 당합니다. 때로는 그 말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스데반도 바른 말을 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이사야 40:3에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이루기 위하여 요한복음 1:23에는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고 합니다. 이사야나 세례요한뿐만 아니라 모든 선지자가 시대의 나팔수입니다. 시대를 깨우는 자입니다. 어둠을 깨치는 자입니다. 이들의 소리는 어두움을 깨우고 빛을 전달합니다. 
  
한국 땅에 왔던 초기 선교사들은 완전히 어두운 세상을 밝은 빛으로 깨웠습니다. 이들은  소리였습니다. 이들이 깨우친 것은 삶이었습니다. 죽음의 세상을 깨웠습니다. 어두움의 세상을 빛의 세상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세상을 향하여 외쳐야 합니다. 빛과 소금처럼 소리 없이 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못마땅하게 여겨 그들을 잠잠하게 하라고 예수님께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왜 외칩니까? 외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호산나’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라도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나팔수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할 때에”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나기 전에 우리가 나팔을 열심히 불어야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외쳐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외쳐야 합니다. 
  
영성가 샬를르 드 푸코는 “나는 생활로 복음을 외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으로 구원의 소리를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로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외쳐야 합니다. 현대 독일의 영성가 안셀름 그륀도 “다른 사람 안에서 삶을 깨우는 사람은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현대의 나팔수로 나가서 크게 외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악한 성읍으로 가서 크게 외쳐야 합니다. 
  
요나 1:2에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악한 성읍에 악을 깨우쳐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책임입니다. 악한 세상이 악하다고 외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악한 사람에게 악하다고 하는 것은 모험이며, 위험한 일이며, 용기가 필요합니다. 악한 세상일수록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삼일운동 때 앞장 선 지도자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이었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에 유난히 기독교인이 많이 앞장 선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라를 깨우치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앞장 설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 때문입니다. 파수꾼의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였는데 이것이 옳지 않다고 바른 말을 하다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였고 헤롯은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딸은 헤로디아의 말을 듣고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달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악한 자에게, 악한 성읍에 바른 말을 크게 외치는 소리의 역할이란 머리를 내 놓을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노아는 악한 시대에 살던 의인이었습니다. 노아가 살던 성읍이 얼마나 악이 심했는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홍수로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고 노아는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쨍쨍한 날에 방주를 짓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신다는 노아의 메시지가 성읍 사람들의 조롱거리였습니다. 노아도 그들과 같이 살았더라면 조롱거리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결별할 때에 차지한 땅이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우선 보기에는 비옥하고 좋은 땅이었지만 사람들의 삶이 악했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악을 보시고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고 롯을 통하여 경고하게 하십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경고하였는데 롯의 사위들까지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어느 시대이든하나님의 사람이 악한 성읍에 경고하고 외치는 것은 비웃음이 되고, 농담으로 여겨지게 되고, 오해받기 쉽고, 외톨이가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던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런데 파수꾼이 잠이 들면 어떻게 됩니까? 파수꾼이 소리를 내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파수꾼이 나팔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파수꾼이 제 역할을 못하면 나라는 망합니다. 마치 우리나라 군인이 잠들어 하늘이 뚫리고, 바다가 뚫리고, 땅이 뚫려 적을 막지 못하면 나라는 망합니다. 
  
에스겔 33:8에는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악한 성에 대하여 외치는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 이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의 잘못입니다. 크게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외치지 않아 그들이 돌이키지 못했다면 훗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뭐 하고 있었어!’ 하고 진노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올해 최악의 겨울을 지나고 있습니다. 강추위가 계속 되고 있고, 물가는 멈출줄 모르고 치솟고, 전기소비량이 최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지난 해 11월 29일 안동에서 시작된 구제역이 그칠 줄 모르고 전국으로 확산되어 축산농가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이러다가 한국의 모든 가축들이 다 죽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구제역이 무엇인가 해서 보았더니 소, 돼지, 양, 염소, 사슴 등 발굽이 갈라진 동물 즉 우제류에게 감염되는 질병입니다. 말은 우제류가 아니어서 구제역에 걸리지 않습니다. 감염경로가 감염동물의 수포액(물집), 침, 유즙, 호흡공기 및 분변 등과의 접촉으로 직접전염 됩니다. 또는 사람, 차량, 의복, 물, 사료, 기구 및 다른 동물에 의한 간접감염도 되기도 합니다. 구제역이 무서운 것은 공기를 통하여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공기는 육지에서 50km, 바다를 통해서는 250km 이상 전파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제역으로 판정되면 최소 3km 이내의 모든 소나 돼지를 죽여야 감염을 차단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벌써 300만 마리 이상의 소를 살처분했습니다. 
  
왜 이런 끔직한 국가적 재난이 일어납니까? 국가가 재난을 선포할 만큼 비참한 일이 왜 일어납니까? 축산 농가가 죄가 더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와 오만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오염시킨 상실한 마음과 극단적인 이기심 때문에 이런 환난이 우리 앞에 닥친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로 가축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 가축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총회는 이런 사태를 맞이하여 우리 사회의 과소비와, 인간의 욕망과 탐욕적 삶과,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음과, 소비와 향락을 회개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런 국가적 재난을 영적 각성의 기회로 삼자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회개하고 백성들에게 회개를 경고해야 합니다. 인간의 죄로 가축들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가축이 왜 죽습니까?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세요. 사람들이 잘못하면 땅이 저주를 받고 동물이 죽습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대신 동물을 잡아 죽였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죄 때문에 소들이 산채로 땅에 묻히고 있고, 돼지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소와 돼지가 삽니다. 
  
성경의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호세아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외칩니다. 예레미야와 스가랴와 요엘과 말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빌어 “내게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시편의 기자와 사도 베드로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고 외칩니다. 이 시대의 선지자이며 사도인 우리가 옛날 선지자의 자세로 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오라고 크게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야 합니다. 

요한복음 1:15에는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고 합니다. 성읍의 악에 대하여 크게 외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우리의 외침의 핵은 예수가 그리스도 이 땅에 오신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외쳤습니다. 구약의 선지자의 역할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이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심지어 당시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야로 알았지만 자신은 단호히 “나는 아니라”고 하며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모든 사명을 잘 수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승천과 더불어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가든지 “그가 다시 사셨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에 올인하였습니다. 이 일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순교를 했지만 어떤 것도 그리스도를 외치는 일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5:42에는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외치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8:5에는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라고 합니다. 실라와 디모데로 외치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사도행전 18:28에는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고 합니다. 아볼로도 외치는 일을 힘 있게 했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예수님이 구세주다”라고 외치는 일입니다.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우리가 외칠 때에 아무도 막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말씀을 외칠 때에 공회에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일에 말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예!” 한다면 외치는 자아 아닙니다. 외치는 자는 결코 막지 못합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태동안 로마 세집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했지만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복음 증거함에는 막을 자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대학자 공손룡은 조나라에서 “아무 재능이 없는 사람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루한 옷을 입은 젊은이가 와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했습니다. 공손룡은 젊은이에게 어떤 재능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목청이 아주 좋아서 큰 소리를 지를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공손룡은 제자들을 돌아보며 “자네들 가운데 고함을 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나?” 다시 모두들 폭소를 터트리며 없다고 하였습니다. 공손룡은 “좋아, 자네 받아들이겠네” 하고 그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조나라의 왕은 공손룡을 연나라의 세객(說客)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공손룡은 소리가 큰 제자를 데리고 연나라로 가는 길에 큰 강에 이르렀을 때 배가 강 건너편 쪽에 묶여 있었습니다. 망망한 강물만 보일 뿐 강을 건널 방법이 없어 당황하고 있을 때 그 젊은이는 침착하게 손을 나팔 모양으로 만들어 저편 강가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크게 외치는 목소리를 들은 사공은 빨리 배를 저어 공손룡과 일행을 태우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외치는 자가 필요합니다.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는 것을 외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하는 자, 외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아무리 잘 믿어도 아는 대로, 믿는 대로 살지 않고 외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는 자는 아는 대로 그렇게 사는 자입니다. 아는 자는 가르치는 자입니다. 아는 자는 아는 것을 외치는 자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예수를 외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외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외치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외치는 자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현대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현대의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 힘써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외칩시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구원, 예수님의 재림을 외치는 자들이 됩시다. 
  
찬송가 518장 2절을 보세요. “바다들아 외쳐라, 예수 구원하신다. 모든 죄인 들으라. 예수 구원하신다. 모든 섬아 일어나 메아리쳐 울려라, 복음 중의 복음은 예수 구원하신다”. 외쳐야 하고, 외치면 삽니다. 내가 살고 다른 사람이 삽니다. 

  
결론 

미국의 언론인이며 교수인 에릭 켈리의 ‘크라쿠프의 나팔수’라는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있습니다. 마리아 성당 첨탑에 매시 정각에 나팔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팔소리가 끊어지고 맙니다. ‘헤이날’이라 불리는 나팔소리는 13세기에 타타르족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나팔을 불던 중 전사한 파수병을 기리기 위해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5세기 중세 폴란드의 크라쿠프 대화재를 배경으로 쓴 소설입니다. 요세프라는 소년의 눈을 통해 연금술사, 최면술사, 무장한 기사들, 친절한 사제, 무서운 악당을 보여줍니다. 요세프의 아버지 안제이는 집안대대로 내려온 임무인 타르누프 수정을 지키며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나팔을 불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는 수많은 목숨의 위협을 받지만 결국 타르누프 수정을 안전하게 지켜냅니다. 나팔수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얻게 하려고 목숨을 버리신 주님께 우리의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목숨을 건 나팔수가 깨웁니다. 목숨을 건 나팔수가 알립니다. 목숨을 건 나팔수가 돌이킵니다. 우리의 목숨을 걸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만방에 알리는 이 시대의 나팔수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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