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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난과 부의 시험 (약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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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부의 시험 (약 1:9-11) 
 
 
오늘은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직면하는 시험의 중요한 사례로서 빈부의 문제와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만일 우리네 인생에서 의인은 항상 형통하고 풍족한 반면에 악인은 늘 고난을 겪고 궁핍하다면 시험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만유를 회복하시기까지는 의인의 고통과 악인의 형통이 많다는 사실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이 점이 바르고 성실히 살아가려는 성도들에게 늘 시험거리가 됩니다. 특히 제정적인 궁핍함 중에 있는 성도는 콩나물 값만 올라도 당장 피부로 절감하기 때문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알지라도(3), 빈부의 시험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대체로 빈부는 상대적어서 9-11절 말씀이 한 사람에게 모두 적용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성경은 먼저 “낮은 형제”에게 말씀합니다(9). “낮은 형제”는 사회경제적으로 비천한 처지에 있는 성도를 말합니다. 그는 자랑스러운 가문이나 신분을 가지지 못했고, 명예로운 직위를 가졌거나 내 세울만한 학위를 가진 것도 아니고, 풍족한 수입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미미한 존재로서 성도가 된 사람입니다. 또한 잘 관찰해보면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의 ‘낮은’ 처지가 변하지 않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에게 성경은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예전에 노숙자로 살다가 벤처 기업 사장님이 된 분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거지로 살던 청년이 얼굴도 잘 모르던 백만장자 친척의 상속자가 된 사연도 보았습니다. 높은 액수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소식도 종종 봅니다. 그런 일들은 꼭 신문에 납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그 사람들은 갑자기 엄청나게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비천한 사람이 성도가 된 사건을 기사로 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이 사건을 기사거리도 안되는 시시한 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 꼭 기록해야 할 만큼 높아진 사건이며 자랑해야 할 일임을 일깨워줍니다.

한 사람이 성도가 된 사건에는 노숙자가 벤처 기업의 사장이 된 일과는 감히 비교 조차할 수 없을 정도의 ‘높아짐’이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은 고작 백만장자의 상속자가 된 일과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신분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타는 지옥 불에 떨어져야 마땅했을 존재를 엄청나게 높여 주셨습니다. 성도의 가슴에는 이 높여주심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항상 살아 있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 “형제”가 된 신분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경제적인 자신의 처지가 비천하다는 이유로 성도의 마음이 위축된다면 그런 태도는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지 겸손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비천함을 가릴 목적으로 ‘집사’ ‘장로’ 등의 직책을 얻으려한다면, 그의 세속적인 가치관이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교회의 직분들은 사회계급이 아니며 종교 귀족을 뜻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거나 그의 자녀가 좋은 학교에 가야만 비로소 자랑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그의 가치관은 반드시 변화될 필요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낮은 형제는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먼저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눈으로 재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그의 사회경제적 처지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당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학벌 없고 직업이 변변치 않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도는 “형제”라 불린다는 사실만으로 말할 수 없이 높아진 존재이며 충분히 자랑할 거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성도들은 “형제”로서의 신분이 동등 하지만 성도들 사이에도 빈부의 격차는 있습니다. 야고보는 교회 안에 빈부의 격차가 전혀 없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부한 형제들에게 가난한 형제들과 같은 수준으로 살라고 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부한 형제는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10a)라고 명령합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이 구절에 “형제”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이 성도인지 불신자인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습니다. 저는 이 서신이 성도들에게 주는 편지이며, 불신자에게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부요한 성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생각합니다.

이 구절의 “낮아짐” 또한 영적 낮아짐인지 사회적 낮아짐인지 불명확합니다. 10절이 9절과 대조되고 있기 때문에 영적 낮아짐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회적 낮아짐까지도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당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 받는 성도들이 많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생명을 빼앗기기도 했고, 핍박을 피해 정든 고향과 가족을 떠나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의 사람이 비천한 자와 ‘형제’라 부르게 되었다면 이미 영적 낮아짐을 경험한 것인데, 그들이 사회적 낮아짐까지도 경험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불명확한 부분을 그냥 두어도 10절의 핵심은 아주 분명합니다. 낮아짐을 자랑해야 할 이유로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10b)고 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부’를 잠깐 피었다 지는 꽃처럼 일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때때로 부한 형제에게 닥친 시험은 부요함이 영원하지 않고 한 순간에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부라는 것이 인생의 다른 중요한 것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추구할 만큼의 가치를 지니지 않았음도 깨닫게 하지요. 더 이상 일시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게 합니다. 시험 중에 이런 지혜를 얻은 성도는 영적으로 낮아집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요함이 아니라 주 안에서 “형제”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김이 마땅합니다.

예수님 믿고 성공한 것, 예수님 믿고 잘된 것은 자랑하기 쉽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높아짐을 자랑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지요. 반면에 예수님 믿는다고 직장을 잃은 것, 하나님 자녀답게 장사하느라 손해 본 것, 하나님 백성답게 살려다가 망한 것은 부끄럽게 생각하여 감추기 쉽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바로 그것을 자랑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믿고서 이전에 자랑으로 여겼던 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예수의 흔적”(갈 6:17)이라 여기고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세상과는 구별된 가치관으로 살았던 사도의 모습이지요.

성도에게 비천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풍족함도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성도는 바울 사도처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주로 뒷부분만 많이 암송되고 있는 이 말씀의 의미는, 성도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하며, 가난하든 부하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빈부 자체가 아니라 어떤 경제적 처지에 있든지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관대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가난이 시험거리가 되는 것은 쉽게 인정하면서도 부요함 역시 시험거리가 된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가난한 형제에게는 짧은 한 절을 할애하면서, 부한 형제에게는 많은 분량으로 길게 강조합니다. 그만큼 부의 시험이 더 염려스럽고 극복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11). ‘뜨거운 바람’(카우소니)은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을 말하는데, 모발 건조기의 열풍을 꽃으로 향하게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되겠습니다. 이 구절의 강조점은 ‘부’가 아니라 “부한 자”가 그처럼 급작스럽고 철저하게 소멸된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세상은 부요함을 축복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성취하고, 더 풍족하기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성경은 부요함이 성도의 삶을 가난보다 더 큰 시험으로 인도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부요함은 자신이 영적으로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는지를 망각하게 하기 쉽습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절실하게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가난하면 하나님께 매달릴 일이 많지만 부요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우리 사회는 돈으로 해결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부도 신뢰하는 두 마음을 품게 만들기 쉽지요. 결국 부요함이 성도의 복된 삶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큰 위험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부한 형제를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습니다. 부란 꽃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둔 성도가 일시적인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부한 형제에게는 부의 위험성에 대해서 거듭 경고합니다. 이전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이전보다 삶의 형편이 더 나아졌다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일이기도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작정 부요함을 축복으로만 여기고 추구하는 것은 성경을 잘 살피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을 가치 있게 여기고 자랑한다면, 교회의 구별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이름까지 동원해서 세상이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것들을 앞장서서 추구한다면 과연 그것이 자랑스러운 모습일까요? 교회가 가난과 부의 처지를 세속적인 관점과 똑같이 해석한다면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교회는 성경적인 가치관을 분명히 가르쳐야하기 때문입니다. 가난과 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경고를 마음에 새길 수 있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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