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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사 5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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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사 58:1-12)


남북전쟁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남북전쟁은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는 문제 때문에 시작된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링컨 대통령과 북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한 각료가 아침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흥분한 모습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각하, 제가 지난 밤 기도 중에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겠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면 반드시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자 링컨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입니까? 혹시 그 각료와 같은 믿음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뭐라고 책망하셨습니까? 비록 그들이 날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고 또 금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사 58:3~4)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금식했습니까? 그들은 다만 자기 만족을 위해서 금식했습니다. 때문에 금식하는 날에도 오락을 구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금식하면서도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쳤던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저지르는 잘못인 것 같습니다. 이른 아침 1부 예배를 드리자마자 부리나케 골프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당 주차장에 기사를 대기시켜 놓고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도 꽤나 많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편을 갈라 주먹다짐을 벌이는 목사들도 있지 않습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오늘 한국 교회의 상황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꾸짖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누구도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토록 엄하게 책망하셨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 정도면 괜찮은 것 같지 않습니까? 요즘 누가 날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습니까? 요즘 누가 그렇게 자주 금식합니까? 그리고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도 좀 고려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바벨론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와서 이제 겨우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 국가를 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제국의 식민지 상태였습니다. 독립을 쟁취하려는 시도도 해 보았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결과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서 그런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고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은 한층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왜 그들을 그토록 엄하게 책망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사무엘하 6장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을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많은 군사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새 수레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첫 번째 시도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새 수레를 몰던 웃사가 갑자기 뛰는 소들 때문에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다가 그만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다윗의 생각이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것은 그 방식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방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제사장들이 앞에 서고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메고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다윗이 준비한 새 수레는 아마도 가장 좋은 운송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최상의 수단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누구의 생각에서 그런 선택을 했습니까? 다윗의 생각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다윗의 실수였습니다. 

그런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로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아니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방법대로 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다윗보다 그 실수가 훨씬 작은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그들은 전혀 잘못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겉으로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척 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좀 더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주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형식에 묶여서 복음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의 책망이 그 당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책망은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무서운 책망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과연 어떤 예배를 원하십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참 자유와 해방을 안겨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자유로운 삶의 본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같은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 마음이 끌리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모두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더 이상 죄의 종 노릇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더 이상 핑계대지 말아야 합니다.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주위에서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거처할 곳이 없어서 신음하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만 나누고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많이 가진 사람들보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구제를 잘 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지 않습니까? 파수꾼의 사명은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돌보는 일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약자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요 또한 예배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것 같으면 이 세상은 훻씬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그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머리로는 이웃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정말 힘든 것 같습니다.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11) 그렇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게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하실 수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을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내 뜻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사회적 약자들과 더불어 받은 바 복과 은혜를 나눔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참으로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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