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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만 바라보라 (마 14:22-33)

첨부 1


예수님만 바라보라 (마 14:22-33)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만일 사람이 새처럼 창공을 마음껏 훨훨 날아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신바람이 날까요? 저는 가끔 꿈속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는데,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모릅니다. 또 사람이 물위를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신기할까요? 1988년 3월 7일 방수원 할아버지라는 분이 특수 제작한 물신을 신고 한강을 건넌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맨 몸으로 공중을 날아다니고 물위를 걷는 일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 세계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람이 물 위를 걷는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지만, 잠시 동안이기는 하나 인간인 베드로도 물 위를 걸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과의 비밀한 시간을 갈망하게 됩니다.

22-23절을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벳세다 들녘에 모여든 군중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후, 서둘러서 그들을 해산시키시고 자신의 제자들을 앞서 떠나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홀로 남아 기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처럼 홀로 남아 기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오직 단 둘이만 있는 시간을 바라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무리들을 피하여 단 둘이만 있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있어서는 단 둘이만 있는 시간이 절대로 지루하거나 따분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시간보다도 즐겁고 가치 있는 시간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과 단 둘이만 함께 하는 비밀한 시간을 그 어떤 시간보다도 즐겁고 가치 있는 시간으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들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어떤 시간보다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비밀한 시간을 즐겁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진심으로 그 시간을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과연 그 어떤 사람보다도 하나님과의 비밀한 시간을 귀히 여기며 그 시간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 시간을 따로 떼어놓고, 그 시간을 준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가 못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경우에 우리들은 하나님과 비밀한 시간을 갖기보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더욱 좋아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이 기쁨이 아니라, 짐이 되어 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보다도 사람들, 그리고 이 세상을 더욱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부담스러워하고, 그분과의 비밀한 교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처럼 하나님과 비밀한 시간 갖기를 더욱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의 참 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고난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24절을 보면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당한 고난은, 생사가 걸려 있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탄 배는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떨어져 있었으므로, 만약 그 폭풍으로 인하여 배가 뒤집히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들 앞에 닥친 고난은, 결코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고난으로 말미암아, 물 위로 걸어서라도 달려오셔서 그들을 건져내시는 신실하신 주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고난이란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만약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의 노예가 되는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온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왕 바로에게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들이 그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체험하였으며, 그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고난을 두려워하여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고난을 인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실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기대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위기가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하나님의 역사 또한 큰 법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명심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고난 앞에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그 고난에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3. 주님은 고난의 현장을 뚫고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25절에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섭게 넘실거리는 거대한 파도를 뚫고, 그 파도로 말미암아 고난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고난 속에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친히 그 고난의 현장으로 찾아 달려오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죄악 된 세상 가운데 찾아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분명하게 증거 해줍니다. 

주님께서는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온갖 고통을 받다가, 마침내 멸망하게 될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면서 까지 친히 고난 이 가득한 세상으로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고난의 현장으로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 어떠한 고난을 만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극심한 고난을 만날지라도, 심지어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지게 된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셔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 어떤 고난을 만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고난의 현장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를 건져주실 주님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고난과 맞서 싸워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믿음은 모험적 결단입니다.

26-29절을 보면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서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갔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성난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위로 뛰어내렸다는 것은, 이성적인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정신 나간 짓이 틀림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사람이 물 위를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연 세계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물 위로 뛰어든 베드로를 어떻게 제정신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처럼 정신 나간 짓을 한 베드로는 실제로 바다 위를 걸음으로써,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을 믿고, 그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모험적인 결단이 바로 믿음 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면서, 자신을 따라오는 사환에게 그 산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아들과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비록 아들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릴지라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다시금 그를 살려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아브라함은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내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믿음을 따라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일을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고, 그 믿음을 따라 행동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진정한 믿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도 그런 모험적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비록 자신들이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도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느브갓네살 왕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모험적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믿음으로 인정되었으며, 그 믿음대로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서 머리털 하나 그을리지 않고 구원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참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며,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그 믿음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모험적 결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그의 말씀을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믿고, 그 외의 것은 부정해 버리는 믿음은, 결코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5.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떠날 때 믿음의 실패자가 됩니다.

30절을 보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라고 했습니다. 물 위를 걷고 있던 베드로는 휘몰아치는 바람과 파도를 보고, 무서워하여 물속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무서워하여 물속에 빠져들게 된 원인은, 그가 바람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베드로가 믿음을 잃고 결과적으로 물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커다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을 떠날 때, 우리는 믿음의 실패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떠나면, 우리의 믿음도 우리를 떠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문제가 닥쳐와도 ,아무리 큰 환난이 우리를 흔들어도, 우리가 주님만 보고 있으면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그 모든 문제와 환난을 이겨낼 수 있지만, 우리의 시선을 돌려 다른 것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곧 믿음을 잃고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이 험준한 세상의 거센 세파 속에서도 능력 있는 삶,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6. 의심이 성도를 무기력한 삶에로 빠져들게 합니다.

31절을 보면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적작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이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중에도, 주님을 능력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던 베드로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가 계속적으로 걷지 못하고, 물속에 빠져들게 된 원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는 있었지만, 분명한 확신이 없어 의심하였기에, 거센 바람이 일자 순식간에 믿음을 상실함으로써, 더 이상 물위를 걷지 못하고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의심은 성도로 하여금 아무런 역사도 이루지 못하는 무기력한 삶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큰 역사를 이루지 못하고, 항상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은, 그에게 그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제 1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출애굽 1세대들이 이처럼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할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그 땅을 정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오직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의 능력을 의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의심은 성도의 믿음과 그로 말미암는 능력을 상실케 하여, 아무런 역사도 이룰 수 없는 무기력한 삶에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절대로 하나님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내실 하나님을 의심해서는 안 되며, 또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을지라도, 그 소망을 능히 이루게 하실 하나님을 의심 없이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는 참 능력의 주인공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다가 그만 물 에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음은 김준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나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다른 세분의 형님들이 차례로 급사한 것을 보았습니다. 6.25때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눈앞에서 공산당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어린 시절 사랑하던 잘생긴 동생 하나가 불놀이하다가 불에 타서 죽던 날 밤, 나는 죽어가는 동생이 당하는 고통과 숨 막히는 슬픔을 그 자리에서 목격했습니다. 또 다른 동생 하나는 집 근처 벌목하는 현장에서 놀다가 나무에 치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3년 전에는 고등학교 교감으로 봉직하던 착하디착한 동생이, 10살에서부터 16살까지 줄줄이 달려 있는 딸 네 명을 남겨놓고 간암으로 죽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2년 전에는 사랑하는 딸이 위암으로 157일간의 논스톱 고통을 겪다가, 두 어린 딸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죽는 참혹한 비극을 당했습니다. 작년에는 동생과 제수가 죽고 막내 동생은 간 경화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고아원을 차려야 할 정도로 모두가 부모 없는 유자녀들을 떠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하나의 얼굴로는 웃고, 다른 얼굴로는 운다. 내 영은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깊은 곳에서 샘물같이 환희가 솟는다. 그러나 다른 마음의 하늘에서는 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옆을 보면 정신착란증에 걸릴 것 같고, 위를 보면 현기증이 나고, 내 안을 들여다보면 죄와 추한 것들이 있고, 과거는 회한과 슬픔뿐이고 미래는 안개처럼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나는 주님만 바라봐야 한다. 

과거는 아무리 더럽고 아프고 서러워도 내일과 새해와 미래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페이지,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 공주 같은 처녀성이 백지같이 열려있다. 시집가는 처녀처럼 새 날을 맞이하여, 새 집에서 새 살림 꾸려 새 삶을 살자. 한 발짝, 한 호흡, 주님을 사랑하며 창세기 첫날처럼 날마다 영원한 첫사랑으로 살자. 내게 깊은 위로와 감사와 찬송과 평안이 있다.> 어떻게 그 많은 슬픔과 고통을 이기고 그토록 놀라운 생애를 살 수 있었는지 눈물이 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봄으로, 그 모든 환난을 이기고 승리한 줄 믿습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 예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 풍파 많은 세상을 살아갈 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봄으로, 승리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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