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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배역은 회복될 수 있는가? (호 5:13 - 호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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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배역은 회복될 수 있는가? (호 5:13 - 호 6:6)
  

우선 단어부터 우리가 정의를 정확히 내려야 되겠는데 배역과 패역은 조금 다릅니다. 어떤 때는 배역도 패역이라고 번역되지만 배역(backsliding)은 신앙이 뒤로 미끄러져 침륜에 빠진다는 뜻이고 패역(rebellion)은 하나님을 향해 반항한다는 뜻입니다. 
  
1세기 성도들의 관심 가운데 하나는 침례를 받고 난 후 죄를 지은 것은 몇 번이나 용서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3세기에 나온 노바티안이라는 사람들은 침례 받은 후의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침례 받은 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니까 사람들이 꾀를 냈습니다. 죽기 직전에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기 직전에 침례를 받으면 힘이 없어서 죄를 지을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기 직전의 사람은 침례를 줄 수가 없으니까 임종 세례가 유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세기에 로마에 살던 허마는 목양서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 목양서에는 다루고 있는 주제가 많은데 그 중에 하나는 침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는 딱 한 번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침례 받은 후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거나 딱 한 번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에서는 성도가 된 이후 짓는 죄의 문제를 대단히 엄격히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교회역사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죄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남용해서 죄를 너무 쉽게 용서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이 말씀을 남용해 죄짓고 자백하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기도 합니다. 침례 받고 난 이후에 짓는 죄는 용서가 안 된다고 하는 것과 너무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모두 극단입니다. 진리는 양 극단에 있지 않고 둘 사이 중간에 있습니다. 
  
호세아서는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부터 3장까지는 호세아와 고멜의 혼인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고 4장부터 14장까지는 9편의 설교입니다. 

첫 번째 설교는 지난 주에 말씀드렸고 5장 5절부터 6장 3절까지가 두 번째 설교인데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냐는 것이 주제입니다. 호세아는 부도덕한 고멜을 노예 시장에서 돈 주고 사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내로 대접하고 사랑을 보여줬습니다. 이것은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드라마처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고민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어떤 사람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경험 혹은 성경을 보면 예수 믿는 성도들도 신앙의 초창기에는 첫사랑이 있습니다. 이 첫사랑이 심해지면 황홀경도 오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또 증거하고 있는 것은 때로는 성도들도 신앙이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2장 22절에서 신앙의 배역을 적나라한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벧후 2:22)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를 모두 회개하고 이제부터 바르게 살겠다고 해놓고서는 또 그 죄에 빠진다는 것은 개가 토한 것을 다시 집어먹는 것, 돼지가 깨끗이 씻고 다시 흙구덩이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서는 배역한 성도가 신앙과 축복을 회복하기 위해서 단호한 회개(radical repentance)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I. 신앙의 회복을 방해하는 세 가지 마음 

호세아는 우리 신앙의 회복을 방해하는 세 종류의 마음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야금야금 다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호 5:12) 

에브라임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별명입니다. 왜냐하면,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지파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된 세 종류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축복이 야금야금 좀이 먹어가듯 점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장롱에 있는 옷이 겉은 멀쩡해도 빼보면 좀이 먹어 못 입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좀약 장수가 동네에 돌아다니면 좀약을 사서 옷장에 넣었습니다. 

또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도 주식이 한꺼번에 확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떨어지니까 망설이다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못된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야금야금 좀처럼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좀처럼 빼앗아 가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 가지 마음을 단호하게 척결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반항하는 마음(spirit of rebellion)입니다. “패역자가 살육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호 5:2) 패역자는 반항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패역자와 같이 반항하는 사람들은 살육죄에 빠집니다. 사람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짐승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질 않습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까 참 어처구니없는 기사가 났습니다. 대전에서 한 경찰관이 자기 어머니를 볼링공으로 죽인 것입니다. 원래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허리만 부러뜨려 보험금을 받으려고 했는데 너무 세게 떨어져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또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밤에 모여 개를 잡아서 죽이는 짓을 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크면 사람 죽이는 것을 우습게 여깁니다. 이처럼 반항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둘째, 음란한 마음(spirit of prostitution)입니다.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호 5:4) 음란한 마음이라는 것은 물론 육적으로 방탕하다는 것을 포함하지만,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음란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차이를 아십니까?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쫓은 사람이고 솔로몬은 반심으로 쫓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실수도 많이 하고 죄를 많이 지었으며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간접살인까지 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은 전심으로 나를 쫓았다고 하였을까요? 그에 비하면 솔로몬은 최소한 살인은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온전치 못하다고 하였을까요? 

다윗과 솔로몬을 비교해보면 다윗은 평생 한 번도 우상숭배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하나님께 엄청난 축복을 받았음에도 처첩 1000명을 거리고 이 여자들이 가져오는 우상들을 다 받아들이고 우상 신전을 세워주는 등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아들 때에 가서는 나라를 둘로 나누는 징벌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마음을 두고 사모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명절만 되면 우리 성도들에게는 전통문화라는 이름으로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우상숭배에 빠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좀이 먹는 것처럼 야금야금 축복도 사라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교만한 마음(spirit of pride)입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호 5:5) 

사람이 교만해지면 결국 넘어집니다. 호세아가 예언할 당시 여로보암 2세 때에는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도 잘 살았고 군사력도 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제력과 군사력을 믿고 그 힘에 도취되어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6)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왜 내가 지금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까?’, ‘왜 나의 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고 느껴지는가?’ 이런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펴봐야 됩니다. 그래서 반항하는 마음이 있다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또 음란한 마음이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고 교만한 마음이 있으면 겸손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세 가지 마음을 갖게 되면 저주와 사탄, 하나님의 징계도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Ⅱ. 신앙을 회복하기에 무용한 방법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과 축복을 회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가운데 세 가지는 아주 잘못되었다고 얘기합니다. 
  
첫째, 사람의 명령을 쫓는 방법입니다.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당하는도다” (호 5:11)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야지 사람의 명령을 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성전에 가서 예배드리라고 했는데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가서 금송아지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단과 벧엘에 가서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하나님께 우리를 다시 축복해주시고 신앙을 회복시켜 달라고 해도 응답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 앗수르를 의존하는 방법입니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호 5:13) 

북 왕국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축복이 떠나가니까 앗수르가 강해져서 쳐들어오게 됩니다. 앗수르에게 조공도 보내고 뇌물도 보내면서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에게 가서 살려달라고 빌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앗수르가 너희를 도울 수 없다. 왜냐하면, 너희를 심판하는 것은 바로 나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앗수르는 단지 심판의 도구 혹은 막대기에 불과한데 도구와 막대기를 붙들고 빌고 도움을 청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막대기를 치운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른 더 센 막대기가 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병은 앗수르가 고치기에는 너무나 깊고 영적인 병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는 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축복과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 사람을 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일대일로 상대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호 5: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배역하니까 떠나 자신의 처소인 천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처소로 돌아가서 저희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것을 기다리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면 축복, 은혜, 신앙 다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려면 다른 방법이 아닌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 상대해도 소용없고 앗수르를 의존해도 소용없습니다. 
  
셋째, 외적인 종교행위를 의존하는 방법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침례 받은 후 짓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해성사라는 의식을 만듭니다. 이것은 원래 영국 수도사들이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카톨릭으로 편입이 된 것인데 죄가 있으면 신부나 수도사 앞에 가서 죄를 지었다고 고해하면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외적인 종교행위를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같은 외적인 종교행위를 의지하는 것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을 회복하고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제사를 드렸는지 보십시오.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호 5:6-7) 

양떼와 소떼를 열심히 끌고 가지만 하나님께서 만나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달은 매달 초에 드리는 제사를 뜻합니다. 이것을 아무리 드려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제물을 끌고 가면서 좋은 말을 많이 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 6:1-3) 말을 참 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물과 말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가져오고 이런 말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보십시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호 6:4) 

이스라엘 백성이 와서 잘못했다고 하지만, 그 회개가 아침 구름이나 이슬처럼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죄를 지어 소 한 마리 끌고 가서 제사지내고 점심 때가서 또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깐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침 안개처럼 쉽게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제사도 좋고 제사 드리는 사람의 말도 좋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려면 진심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인애는 히브리말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서 흘러나와 이웃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헤세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헤세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리고 네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부부끼리 매일 싸우는 사람이나 직장 가서 싸우는 사람, 성도끼리 싸우는 사람은 헤세드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사랑이 있으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파생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헤세드라고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의 위선적인 종교행위를 책망하실 때 호세아 6장 6절을 마태복음 9장 13절과 12장 7절에 두 번이나 인용하셨습니다. 공산주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가 종교를 비판했었는데 어떤 설교자는 칼 마르크스의 책보다 더 조직화된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성경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조직화된 종교와 종교인을 싫어합니다. 호세아의 말씀은 비록 불편할지라도 우리 성도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개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도 중요하지만, 예배드리는 사람의 신령과 진정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도망가서 교회에 숨어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교회에 숨어도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외적인 종교만으로는 축복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헤세드로 채운바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하시고 축복을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참된 회복의 길 

성도가 죄를 짓고 배역하면 노바티안이 말한 것처럼 용서 못 받거나 또 목양서에 나온 것처럼 딱 한 번만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해도 용서받는 것도 아닙니다. 호세아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회복의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용서하시고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호 5:15) 

이 말씀대로 죄를 진실로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셨다가도 다시 돌아오시고 찢으셨다가도 도로 낫게 하시고 치셨다가도 싸매어 주시고 죽이셨다가도 다시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도 아니요 외형적인 형식도 아니요 우리의 말도 아니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할 때는 마음으로 상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혼인관계”에 비유되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혼인관계가 영원하듯 하나님과 택한 백성의 관계는 영원한 관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성도를 잠시 떠날 수는 있습니다. 배역하면 하나님께서는 축복 보따리를 가지고 잠시 떠나버리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최종적으로 떠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를 징계하시고 고통 가운데서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진실로 돌아가겠습니다. 내 마음에 반항적인 마음을 꺾고 순종하는 마음 주시고 교만한 마음을 꺾고 겸손한 마음 주시고 음란한 마음을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헤세드로 채워주시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면 마귀도 떠나고 죄도 떠나고 저주도 떠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만 바라보고 싸우면 자꾸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되는데 하면서 하루 종일 죄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 죄하고 싸웠는데 제가 졌습니다. 죄는 멀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을 헤세드로 채워주십시오.” 그러면 죄는 떠나고 마귀도 떠나고 저주도 떠나고 축복이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제 속에 헤세드로 채워달라고 고백하셔서 신앙도 회복되고 축복도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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