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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오두막 (시 5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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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오두막 (시 51:10-19)
   

언젠가 감명 깊게 읽었던 윌리엄 폴 영(W. Paul. Young)이 쓴 소설 ‘오두막(THE SHACK)’의 내용이 마치 영화의 잔영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주인공 맥의 사랑하는 딸이 실종되어 경찰까지 동원해 수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산속에 있는 한 빈 오두막을 발견합니다. 그 안 난롯가 바닥에 딸이 입었던 빨간 드레스가 피에 흥건히 젖은 채 찢겨져 있었습니다. 어린 딸이 도대체 오두막에서 무슨 일을 당했단 말입니까! 주인공은 끔찍한 현장, 오두막을 잊어버리려고 몸부림쳤지만 그 오두막, 오두막 안의 현장, 잊히지가 않았습니다. 

작가가 이 책에 등장시킨 오두막이란 과연 어떤 곳일까요? 이 책을 추천한 옥한흠 목사는 이 오두막을 ‘우리의 모든 비밀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들, 그리고 모든 상처들을 묻어둔 마음속 깊은 곳’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자(著者)는 어릴 때 성폭행을 당했고, 유기도 당했습니다. 이런 아픈 경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소를 그는 ‘오두막’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오두막이 이 작가에게만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오두막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의 오두막이 있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왔을 때’라는 표제로 시작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장소는 어디입니까? 왕궁입니다(삼하 11:2,4). 다윗의 일생 중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소, 고통스러운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목동시절의 베들레헴 들녘, 골리앗과 싸웠던 전쟁터, 쫓기고 쫓겼던 황량한 엔게디 광야였을까요? 아닙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늑한 그의 왕궁이었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워했는지, 시편 51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의 왕궁은 왕궁이 아니라,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 바로 그 오두막이었습니다. 

다윗, 탄탄대로로 잘 나갔습니다. 이런 다윗을 사탄이 정조준 했습니다. 사탄의 이빨에 묻어있던 독약은 거짓말하는 영이었습니다(요 8:44). 거짓 영이 왕궁을 지배하는 순간, 그곳은 더 이상 왕궁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도 깊은 상처를 입고, 밧세바, 우리아, 요압, 후궁, 심지어 갓 태어난 어린자식까지 피투성이가 된 채 여기저기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왕궁이 한 순간 처참한 오두막으로 변했습니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오두막이었습니다. 왜 왕궁이 오두막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을까요? 

다윗은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정직한 영이 있다는 것은 거짓 영이 있다는 뜻입니다(왕상 22:21-22). 다윗은 지난날 거짓 영의 지배를 받아 거짓으로 행했던 일들은 뉘우치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정직하지 못하면 주님 앞에서 쫓겨납니다(계 21:26-27). 정직하지 못하면 주의 성령이 그 심령에서 떠나갑니다(고후 6:15-16). 무엇보다도 정직하지 못한 자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시 51:12). 

그러면 구원의 즐거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찬양입니다(시 51:14). 둘째는 전도입니다(시 51:15). 셋째는 예배입니다(시 51:16). 넷째는 회개입니다(시 51:17). 다섯째는 축복입니다(시 51:18). 

이것이 있는 사람은 분명 다릅니다. 찬양이 넘칩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깁니다. 회개하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이 다섯 가지가 과연 나에게 있습니까? 

다윗, 언제부터 하나님을 경외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알고 난 뒤에는 정말 순수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했습니다(시 16:8,9,11; 23:1,2). 그런 그가 조금 부요해지고, 여유로워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나라가 강성해지니 어느 날부터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시들해졌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그 무엇을 통해 짜릿한 행복과 즐거움은 없을까 찾기 시작했습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부당한 방법으로 쟁취하려했습니다. 

시편 51편을 보면, ‘하나님’이란 단어와 ‘나’란 단어가 제일 많이 등장합니다. 그 다음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기쁨’입니다(6,8,12,14,16,19). 이것은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그가 기쁨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어느 틈엔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왕궁이 처참하기 그지없는 오두막으로 변해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먼저 정직에서 찾았습니다. 정직이 사라진 집, 가정, 부부관계, 직장, 사업장, 그곳은 비참하기 그지없는 오두막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내 입술에서 높이 부르는 높은 음의 찬양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온전한 예배를 드리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까?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회개의 영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 내 삶의 현장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내가 머물고 있는 삶의 현장은 다윗의 왕궁입니까? 아니면 처참한 오두막입니까?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에서 주인공 맥은 자기도 모르게 딸이 살해된 곳인 그 오두막으로 차를 몰고 달립니다. 자기를 그 오두막으로 초청한 ‘파파’가 도대체 누군지 너무도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초청한 ‘파파’는 놀랍게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주인공 맥은 삼위 하나님과 수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 순간 자신에 대한 죄책감, 딸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다시 회복의 기쁨, 구원의 즐거움 맛봅니다. 다시 이전의 생활로 돌아옵니다. 그 오두막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두막으로 변해버린 바로 그 현장에서 다윗을 만나기 원하셨습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범죄한 바로 그 현장, 고통스런 현장에서 다윗을 기다리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그 현장에 보내셨습니다. 다윗의 오두막으로 말입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 앞에 덥석 무릎을 굻고, 부르짖습니다. 이 다윗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오두막은 어디입니까? 무엇입니까? 숨기고 싶고,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오두막 말입니다. 그 현장에서 주님은 피 묻은 손으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앞에 나아가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소서’ 기도하기만 하면 다시 찬송, 전도, 예배, 회개자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축복의 주인공,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두막이 변하여 왕궁이 되는 은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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