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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뜻이면 (약 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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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뜻이면 (약 4:13-17)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가을에 풍성한 추수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좋은 씨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또 좋은 밭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땅을 고르고 거름을 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씨를 뿌리고 김을 매주고 비료도 주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오늘 해야 될 일입니다. 그래도 풍성한 추수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만약에 잘못되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 항상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언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가 이웃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성도 간에도 서로를 피하게 만듭니까?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다가갔다가 거절 당할까봐 그래서 상처를 입을까봐 가까이 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아니 이미 어떤 일로 인해 마음에 상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지금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을 돌짝 밭이나 가시덤불 투성이로 내버려 두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먼저 문을 열지 않고는 나를 향해서 열려지는 문도 없습니다. 좋은 밭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안의 돌들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냥 덮어 두면 되나요? 아니요? 그랬다간 뿌리 깊은 돌 때문에 밭을 갈던 쟁기만 망쳐버릴 뿐입니다. 가시는 어떻게 할 겁니까? 지금 당장 찔리고 아파도 그 가시를 뽑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돌짝과 같은 마음의 상처들, 우리 마음을 갈가리 후벼 파 놓는 불만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그 상처는 더 깊이 곪아 들어갈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아픔들을 우리는 주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주위 환경들을 주님께서 바꾸어주시고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나를 향해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지금 주님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지금 이 자리가 바로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날 자리입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의 한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을 또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립니다. 이제 아파하지만 말고 힘들어 하지만 말고 그 주님 앞에 우리 마음 문부터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플 때 병원을 찾듯 내 문제를 주님 앞에 내 놓는 것입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하신 것은 지금 주님이 나의 아픔들을 어루만져주시고 나의 힘들어하는 것들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아픔을 나 혼자 가지고 끙끙거리는 것은 나의 잘못입니다. 마치 아픈 몸을 지니고 그냥 혼자 이겨보려고 끙끙 거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 7:7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원래의 뜻을 정확하게 드러내어 번역한 찰스 윌리엄스의 번역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Keep on asking. keep on seeking. keep on knocking.” 다시 말하면 “계속 해서 구하십시오.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아픔을 계속해서 주님 앞에 아뢰십시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그래서 도망치고만 싶었던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아뢰십시오. 

마치 병이 나을 때까지 병원을 찾고 또 찾는 것처럼 주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그렇게 아뢰고 또 아뢰십시오. 때론 이 날들이 상당히 오래 이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마음의 모든 상처들을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치료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십시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또 하나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마치 의사가 처방한 대로 따르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그 들려주시는 말씀대로 따라야할 책임이 내게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도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감동하실 때 그 감동하심을 따라 실천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음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귀담아 들을뿐더러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를 떠나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문제는 그 말씀들이 내 입에 아주 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이 아주 꿀과 같이 달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우리를 치료하시고자 하실 때 들려주시는 말씀들은 우리 입에나 우리 귀에 아주 쓰디 쓰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뱉어버리고 싶습니다. 귀를 닫고 싶습니다. 이게 뭐야 싶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예하고 아멘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음성으로 깨달음이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아멘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레 같은 소리로 내게 말씀하십니다. 마치 번개 맞은 것과 같은 아픔이 나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장하시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마치 안개와 같습니다. 안개가 아무리 짙게 끼어 있어도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생명이 마치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척하고 나의 아픔만을 이야기하며 세상의 것들로 채우려고 해도 그건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해야 될 말은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하는 다짐이 언제나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조금만 은혜 받았다 하면 금세 허탄한 자랑을 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 내가 깨달은 모든 것들이 다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단지 내가 잘 난 줄 알고 내가 모든 것을 다 깨달은 것처럼 그렇게 느껴집니다. 한데 그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보면 이건 전혀 은혜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 잣대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그래서 오늘 주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기에 우리는 마땅히 선을 행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주님이 지금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이면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고 하는 그 본래 받았던 은혜대로 우리가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뜻을 알게 하신 것은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아서 그 뜻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와 교회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권면합니다. 바울 사도가 자기와 또 자기와 함께 하는 주의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연약함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역자들의 연약함은 더 크게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온 교회에 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사역자들이야 말로 교회의 버팀목이기 때문입니다. 그 험한 광야길을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따라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악한 마귀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지도자들의 마음에 부정적인 마음을 집어넣어줍니다. 

그들 앞에 우리는 다 메뚜기 같을 뿐이라. 아니 지금까지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결국 지도자가 부정적이 되니 전체가 부정적이 되고 맙니다. 그래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을 향한 발걸음은 멈춰지고 되돌려지고 맙니다. 악한 마귀는 이렇듯 지도자들의 가치가 얼마나 큰 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목표로 삼는 것이 교회의 사역자들과 지도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도록 그리고 항상 성령께서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기 위해서 기도함으로 간구해야 하고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하여 또한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더욱 우리는 이와 같은 중보자요 축복자로서의 우리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판단하고 시비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라도 사랑하고 나를 핍박함으로 힘들게 하는 자를 위해서도 축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물며 같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섬기는 성도들이야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왜 용서할 수 없다고 합니까? 아니 용서를 넘어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원수로 친구되게 하는 사랑입니다. 주님이 바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그 품에 안아 주셨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향해 친구라고 하십니다. 원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친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랑은 이렇게 목숨까지 내놓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다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왜 속상한 일이 없겠고 아픔이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여전히 주고 또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주님께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그렇게 주고 주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야 말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된 증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까? 속지 마십시오.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누가 아니라고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나는 도무지 못해 아니 안 해”라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얼마나 속상하시면 그렇겠습니까? 얼마나 아프시면 그러겠습니까? 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힘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주십니다. 

엘리야가 너무 힘들고 지쳐 광야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다 잠듭니다. 그런 엘리야를 천사가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해서 봤더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었습니다. 그래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하나님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말합니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이렇듯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지금도 어루만지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내가 힘들어 하는 것만큼 그런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도 힘드십니다. 그래서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 주님의 손길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아울러 그런 주님의 손길로 나도 다른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어루만져줄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다 대고 너 문제다 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 그 사랑 하나 있으면 된 겁니다. 그냥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만으로도 감사하십시오. 우리가 힘들어 하는 것도 사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랑하는데 내가 바라는 만큼 되지를 않습니다. 그건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습니다. 그래 더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그걸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떡과 물을 마시고 힘을 얻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이 준비하신 말씀의 은혜로만 힘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은혜 위에 은혜를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또 하나 생각할 것은 부모 공경입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라” 정성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건성건성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목숨을 걸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예배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걸 때 주님 어떻게 하십니까? 그냥 우리를 죽이고 마나요? 아니죠. 주님이 그런 나를 책임지십니다. 또한 말씀을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영의 아버지와 우리를 길러주시는 육의 아버지를 공경해야 합니다. 성경은 단지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시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약속을 더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선생으로 세우시고 부모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선생을 택하고 내가 부모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선생과 제자로 부모와 자녀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임입니다. 그렇다면 선생과 부모는 제자와 자녀를 사랑으로 훈계하며 양육해야 하고 제자와 자녀는 부모를 공경함으로 섬겨야 합니다. 거기에 판단하는 것은 제자와 자녀의 몫이 아닙니다. 부모가 문제 있다고 바꿀 수 있나요? 그런다고 부모를 버려요?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경해야 하는 겁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연약한 자를 돕는 일입니다. 주님이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 섬김의 대상은 모든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먼저 하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힘든데 누굴 돕냐고요? 그럼 내게 있는 것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거 내 것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누구는 내 교회부터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내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다 주님의 교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람 연약한 사람 우리가 도우며 섬겨야 할 사람을 바로 분별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쓸모없는 것을 쓸모있게 고쳐 쓰시는 분이시오 지금도 우리를 그렇게 고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가 서로를 쓸모있네 없네를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문제고 무엇 때문에 안 된다고요?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면요?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 성의 한 여인을 찾아가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수가 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되도 우리는 안 된다고요? 그게 누구 생각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그 문제를 내가 고치는 것 아닙니다. 나를 고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환경을 바꾸시거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입니다. 내가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웃 사랑입니까?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힘들 때 누가 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 싶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사랑하십시오. 내가 내 몸을 위해서 무얼 아끼겠습니까? 그럼 이웃을 위해서 더욱 주를 위해서 수고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십시오. 일꾼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항상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세우시고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러므로 주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함으로 섬기십시오. 붙들어주고 세워나가는 일을 하십시오. 결코 도망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을 붙드시고 주님의 은혜로 서로를 붙들어 주십시오. 우리는 주님을 머리로 해서 함께 지어져가는 존재입니다. 

나나 누가 없으면 될 것 같습니까? 그러면 그 건물은 무너집니다. 나나 너나 처음부터 문제 투성이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주시고 그런 나를 들어 함께 세워가십니다. 
요한복음 4장 5절 이하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 성의 한 여인은 제 6시에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시각으로 제 6시면 낮 12시 정오입니다. 여인은 사막지대에서 가장 더운 때, 아무도 우물가에 나오지 않는 때를 선택해 이곳에 나왔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었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바로 우리 시대 삶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아파트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를 모릅니다. 이웃집에서 살해당한 쌍둥이 아기가 비닐에 싸인 채 냉동고에 넣어져 몇 달이 지났는데도 알 수 없는 시대입니다. 이웃이 문을 열지 않는 것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문을 닫아걸고 이웃을 외면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혼자 되어 버렸고 뼛속까지 스며든 춥고 떨리는 외로움을 당연한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누구도 상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문제 인생이란 상처를 끌어안고 자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의 대표적인 특성은 이웃을 믿지 못하고 그들에 대해 공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필요 이상으로 자신에게도 적용하지 못하는 정의감을 이웃에 강요하는 사람들도 예외 없이 과거의 상처를 품고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이웃이 평범하게 던지는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기에 다시 의문부호를 던집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 는 요청에 줄 수 있다 혹은 없다면 될 텐데, 이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라고 대답합니다.

여기 유대인에게 무시당해 온 사마리아인의 오랜 세월 상처가 이 여인의 말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혼혈인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사마리아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놈들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의 살코기를 먹는 것과 똑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겨 절대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만큼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부정하고 더러운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대접을 당하다 보니 사마리아인으로서의 마음의 상처가 이 여인한테서 불쑥 튀어나온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예수님조차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발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그냥 내버려 달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영어로 “Leave Me Alone(나를 내버려 두세요)”이라고 말합니다. 
“내 버려 둬” 혹시 지금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도 별수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물을 길으러 온 이 여인과의 대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화의 역전은 “물을 좀 달라”고 하던 예수님이 갑자기 이 여인에게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목마른 인생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을까요?
목마른 인생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인을 바꾸고, 파트너를 바꾸고, 직업을 바꾸고, 직장을 바꾸고, 종교를 바꾸고 심지어 교회도 바꿉니다. 그래도 만족스러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인생은 방황으로 얼룩집니다. 끝없는 목마름, 타는 목마름으로 허덕이는 인생이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우물가 여인의 이야기는 그 종말이 비극이 아닌 해피엔딩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우물가 여인이 발견한 인생의 해답은 무엇입니까?
대답은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순간, 이 우물가 여인한테 어떤 변화가 찾아왔는지를 주목해야합니다. 우선 사람들을 피해 다니던 이 여인이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고립된 인생이 아니라 홀연히 연결된 인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상처를 넘어서서 자기 이웃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인생으로 변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영원한 생수를 마신 것입니다. 
한동안 유행한 세속 유머 가운데 <어느 날 변한 여자>가 있습니다. 이 유머에 딱 들어맞는 변신이 바로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일 것입니다.

여우 같은 여자에서 여유 있는 여자로
화난 여자에서 환한 여자로
따지는 여자에서 따뜻한 여자로 
착각하는 여자에서 자각하는 여자로
색기 있는 여자에서 색깔 있는 여자로
밝히는 여자에서 밝은 여자로
남들에게 애 먹이는 여자에서 남들 때문에 애 태우는 여자로
답답한 여자에서 답을 아는 여자로
빚이 많던 여자에서 빛을 발하는 여자로

당시 사마리아인을 경멸하던 유대인은 그들이 사는 땅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드시 그 땅으로 지나가야겠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물가에 먼저 도착해 이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만남이 우연이겠습니까?
만약 나를 만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셔서 지금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 앞에 솔직해지겠습니까? 그동안 무척 외로웠다고, 인생의 상처로 많이 아팠다고, 목말랐다고 고백하겠습니까?

이제 주님이신 그분이 꼭 필요하고,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구해보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순간 말입니다. 성경은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말씀합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지금 나아와야 합니다.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지금이 변화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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