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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레바퀴의 살 그림자 속에서 (창 26: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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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의 살 그림자 속에서 (창 26:6-11) 


 6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 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 8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오늘도, 이 한 주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미국의 시대상을 언급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급속한 도덕적 타락의 길을 걸어왔으며 정직성이나 신실성은 창밖으로 내던져졌다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오늘날의 미국은 환락과 쾌락, 그리고 방종과 무질서의 탁한 급류에 휩쓸리고 있다. 미성년자들의 범죄는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급증하고 있으며, 마약 범죄는 줄어들기는커녕 날로 늘어가면서 어린 희생자들을 요구하고 있다. 로마 제국 말기에 나타났던 것과 똑 같은 징후들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감지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우리는 이 나라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경제 위기를 겪고 있던 시기에 미국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풍요 속에 있던 미국이 도덕성을 상실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많은 경제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경제 탓으로 돌리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입니다. 사람에게는 지켜야 할 양심이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범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무너지면서 분출되는 욕망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경제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경제 문제를 일으킨 통제되지 않는 욕심이 문제입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하여 본질적인 질문을 해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의해 변질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수레바퀴의 살 그림자를 봅니다.

I. 반복

역사는 반복되는 것,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였던 것처럼 애굽으로 내려가기 위하여 남쪽으로 향하여 가다가 그랄이라는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창26:1-2)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6절입니다.
: 6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이삭은 그랄에 머물렀습니다. 여기에서 ‘거주하다[bv'y/야솨브]’는 ‘앉다’는 말입니다. 6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은 “‘그래서’ 이삭은 그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리하여’ 이삭은 그랄에서 살게 되었는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이삭은 그랄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삭을 보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것처럼 이삭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따라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읽고 듣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좋은 일만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불행도 반복되었습니다.
     
7절입니다.
: 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이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에 머물러 살게 되었을 때,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보고서 그에게 “그 여인이 누구요?”라고 물었습니다. 이삭은 “그는 나의 누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리브가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곳 사람들이 리브가 때문에 자기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자기 아내라고 하기를 꺼렸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일이 판에 박은 듯이 반복된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 처음 흉년이 들자 그 흉년이 너무 심해서 그는 애굽에서 얼마 동안 몸 붙여서 살려고 그리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 애굽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들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 그가 걱정하였던 일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아내를 보고 매우 아리따운 여인임을 알았고, 애굽의 임금인 바로의 신하들이 그 여인을 칭찬하였으므로 그의 아내사라는 궁전으로 불려 들어갔습니다.(창 12:10-16)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은 그가 태어나기 몇 십 년 전에 그의 어머니 사라가 겪은 일을 그대로 그의 아내 리브가에게 겪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겪었던 흉년이라는 재난이 이삭에게 반복되었던 것처럼 아브라함의 실수도 이삭에게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2. 불행한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역사의 교훈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는 듯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낚시에 걸렸던 고기가 다시 낚시에 걸립니다. 같은 자리 같은 돌부리에 또 넘어집니다. 부끄러운 일을 반복하고 실수를 거듭합니다. 피는 못 속이기 때문인가요?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야 당시로써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부끄러운 일도 반복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실수는 그가 애굽으로 내려갈 때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내려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머물고 있는 이삭에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에도 어리석은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고리를 끊기가 어렵다고도 합니다.
다만 우리의 삶에서 불행의 고리가 끊어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일이 반복되는 것은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똑 같은 일이 이삭에게 반복되었습니다. 순종한 이삭이 이런 일을 겪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II. 이유

7절 후반절입니다.
: 7b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은 자기의 아내 리브가가 보기에 아리따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 그대로 리브가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라면 아름다운 아내를 둔 사람은 다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그 곳 사람들이 리브가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아내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arey:/야레]’는 말은 겁이 나서 무서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1. 사람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여 사실을 그대로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였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순종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사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람에게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누려야 할 평안함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말씀에 따라 살기를 시작하였다고 할지라도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불순종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마13:1-9, 18-23)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 씨를 뿌릴 때, 더러는 길 가에,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중에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처음에는 순종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함께 있어서 결실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계속 다니기는 하는데 말씀이 주시는 평안함과 능력과 같은 열매들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염려하고 유혹받고 있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순종하였지만 여전히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인 가데스바네아까지 왔습니다. 그곳에서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모세는 각 지파에서 우두머리 한 사람씩을 뽑아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두루 다니며 그 땅이 어떠한지, 그 땅에 사는 백성이 강한지 약한지, 적은지 많은지를 살펴보고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열 두 지파에 한 사람씩 뽑힌 열 두 명은 그 땅을 탐지하고 사십 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고하는 사람 중에 “그 곳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은 강하고, 성읍들은 견고한 요새처럼 되어 있고, 매우 큽니다.”고 보고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좋기는 하지만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에 맞서서 갈렙이라는 사람은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 중에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는 도저히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더 강합니다.”고 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땅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들은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습니다.”(민수기 13:33)
     
상대방은 거인이고 자신들은 메뚜기 같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온 백성에게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출애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동안 그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두려움에 지배당한 이스라엘은 결국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가졌던 두려움은 그의 가정을 비극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두려움은 그 민족 전체를 비극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모두 불행해 집니다. 두려움에는 파괴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고 하였습니다.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위하여 두려움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삭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9절입니다.
 :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이삭은 “내 생각에”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인도하셨고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따랐습니다. 9절에서 ‘두려워하였다[@P/펜]’는 말은 ‘않도록 주의하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의 아내를 아내라고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자신의 생각에 충실하였습니다.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생각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잠언은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언 15:22)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힌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생각을 따르면 가장 나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생각이 나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지만 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두려움을 가집니다. 더 큰 힘을 의지하지 않으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하여야 할 가장 강력한 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면 사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서도 사람을 두려워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III. 결과

이삭이 그랄에 자리를 잡고 산 지 꽤 오래 된 어느 날, 그가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그랄 왕 아비멜렉이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어떻게 하였습니까?
     
9절 전반절입니다.
 : 9a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아비멜렉은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고 이삭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의 아내인데, 어쩌려고 당신은 그를 누이라고 말하였소?”라며 나무랍니다.
     
1. 추궁을 당합니다.
     
처음에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당장의 어려움은 피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사실이 드러날 때 추궁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정말로 교회가 진실했느냐’고 추궁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세상의 지도자들을 충고할 만한 도덕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권위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서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겠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하나님을 세상이 두려워하겠습니까?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우습게 보는 교회가 되어버린 것을 통회합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또 어떻게 하였습니까?
     
10절입니다.
 :10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삭을 향하여 “어쩌려고 당신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소?”하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애급 왕 바로가 “어찌하여 너는 저 여인이 네 누이라고 해서 나를 속이고, 내가 저 여인을 아내로 데려오게 하였느냐?”(창 12:19a)고 책망하던 것과 똑같습니다. 요나가 타고 가던 배의 선원들이 요나에게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고 책망하는 것과 같습니다.(욘 1:10) 정의로운 아비멜렉이 부도덕한 이삭을 정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2. 책망을 당합니다.
     
책망 받는 것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죄악을 책망하여야 할 터인데 세상이 교회의 잘못을 재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부도덕하고 세상은 정의로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들어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들어 교회를 꾸짖고 계심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책망을 듣고 통렬하게 회개하여야 합니다.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책망만 받았습니까?
     
11절입니다.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지금 여기에서는 이삭 보다 아비멜렉이 정의롭고 너그러워 보이기조차 합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백성에게 “이 남자와 그 아내를 건드리는 사람은 사형을 받을 것이다.”고 경고를 내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직접 개입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 때문에 그의 아내 사라를 부정하게 할 수가 없었기에 개입하셨던 것처럼 이삭에게 한 약속 때문에 그의 아내 리브가를 부정하게 되도록 그냥 둘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에게는 그가 이삭에게 인정을 베푼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에게 인간적으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3. 수치를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한국 교회 때문에 울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교회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정말로 얼굴이 뜨뜻해지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따르게 되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면 망신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이 보호하시지만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으로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이고, 기도하고, 헌신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명을 받았던 디모데가 사람을 두려워하여 믿음이 식어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다시 불일 듯 하게하여야 할 형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 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의 비극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부흥을 다시 생각하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부흥은 위로부터 성령님께서 놀랍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자는 교회와 영혼들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온 세상이 비로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부흥을 사모합니다. 이 땅에 부흥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 세상을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 다시 부흥을 사모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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