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 있는 사람 (시 1:1-3)

첨부 1


복 있는 사람 (시 1:1-3)

  
사람들은 모두 복 받기를 좋아합니다. 복을 받으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애는 쓰는데 복은 오지 않습니다. 복은 그렇게 맹목적으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그냥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은 찾아옵니다. 이 세상에는 복이 있는 사람이 있고 복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참 복이 있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정에도, 일터에도, 삶에도, 관계에도 활기가 있고 소망 있게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선 삶의 모습이나 내용이 쉽습니다. 평안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세상 고민을 혼자 다 걸머쥐고 고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이 공평치가 않다”고 탄식을 합니다.   

어느 단편문학집에 제목은 잊었지만 아주 완벽하게 성공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그 사람은 세상에서 좋은 것은 다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큰 회사의 사장이고 가정이 풍부하고 행복합니다. 아주 준수하게 생겼고 완벽하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한 근로자가 자신을 비교해 생각해 보니 자신은 너무 초라합니다. “나는 하나도 가진 것이 없다”하고 비관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근로자가 그 집의 아이를 담보로 인질극을 벌렸습니다. 경찰이 오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마침내 그의 어머니까지 와서 자수하라고 권유합니다. 그러다 이 근로자가 외쳤습니다. “나는 하나도 없는데 왜 너는 다가지고 있느냐, 왜 이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냐” 하고 절규합니다. 단편 소설이지만 그 소설을 읽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 사람도 많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무엇이 복입니까? 큰집에 사는 것이 복입니까,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이 복입니까, 정말 그것이 성공의 조건이라면 그러면 큰집에 사는 사람은 다 행복합니까, 그 큰집에는 걱정도 없고 근심도 없으며 아픔도 없는 것입니까, 회사 사장은 다 행복합니까, 건강한 사람은 다 행복합니까?” 오늘 우리들이 뭔가 잘못 해석을 하고 있고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보니까 때로 자신이 더 망가지고 괜히 자격지심이 드는 것이고 삶이 더 초라해지는 것입니다. 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은 개념이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시편을 보십시오. 이 시편에 보면 진정한 복이 무엇이고 진정한 행복과 감사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 150편의 서문과 같은 말씀입니다. 음악으로 말하자면 서곡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선인과 악인 두 인간상을 통해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의 개념은 다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더 소중한 것들이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이 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첫 머리에서 “복 있는 사람”을 주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복을 말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라는 말인데 “하나님이 긍휼로 인간에게 주시는 복”을 바라크 복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아쉘”이라는 복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때 주어지는 보상으로 내려지는 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시편1편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의 복은 “아쉘의 복”을 말합니다. 아쉘의 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주어지는 복을 말합니다. 

사람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 이상의 문제는 터치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은 가진 것이 많고 넘치고 장수해도 그것이 복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성공해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성공은 진정한 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들은 한없이 행복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성공이 때로 미래에 불행을 초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공은 복이 아니고 저주입니다.  

내가 장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수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장수는 내 삶에 때로 재앙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진정한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복을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것 

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악한 꾀가 너무나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한 사람의 꾀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갑니다. 요즘 전화 보이스 피싱이라는 속임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 속임수에 다 넘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납치하고 있으니 빨리 돈을 입금시키라.” 그 전화는 100% 속임수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그런 일을 내가 당하면 모두 머리가 멍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꾀를 그대로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력입니다.  그래서 속는 것입니다. 그런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시험에 들지 않는 길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자신이 악한 꾀를 부리다가 스스로 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넘어지거나 실수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남의 꾀에 넘어가든가 아니면 자신이 스스로 꾀를 쓰다가 넘어지는 경우들입니다. 은밀하게 뇌물을 주고받는 것도 꾀를 쓰는 것입니다. 남을 꾀에 넘어지게 하고 자기도 자기 꾀에 넘어지게 하는 꾀입니다.  

이 세상은 악한 꾀가 너무 많습니다. 범죄자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혼자 죄를 지은 사람은 아주 극소수더라고 합니다. 대부분은 누군가와 함께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혼자서는 죄를 짓기는 어렵습니다. 혼자 짓는 죄는 대부분 작은 죄들이거나 우발적인 죄들입니다. 

그래서 범죄에는 반드시 공범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공범에는 반드시 여자가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마치 고구마를 캘 때 고구마 줄기를 잡아 올리면 고구마가 주렁주렁 매달려 올라오듯이 죄인 하나를 잡으면 공범들이 잡혀 들어옵니다. 그것이 악한 꾀를 좇은 결과입니다. 

악환 꾀를 좇다가 넘어지게 되면 평생 쌓아올린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렇게 무너질 때 공든 탑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무서운 결과입니다. 그래서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느 순간 악한 꾀를 단호하게 물리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한 꾀는 히브리어로 “에차”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의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생각이라면 악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으니까 생각도 의도도 계획도 악한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과 정반대의 생각이거나 장반대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지는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꾀에 넘어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악한 꾀를 부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 악한 꾀가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다 천사는 아닙니다. 그 악한 꾀가 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도 들어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나도 이 악한 꾀를 자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에 복이, 만족이, 평안이, 평화가 없거나 적거나 부족한 것입니다. 복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은 “악한 꾀를 좆지 않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 

2절을 보면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말합니다. 성경이 이 죄를 가장 큰 죄라고 규정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가장 큰 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희랍의 델포이 신전 대리석 벽에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이라는 말을 새겨 놓았습니다. “네 자신을 알라”는 말입니다. 희랍에서는 교만을 가장 큰 죄라고 말하고, 불교에서는 탐욕을, 유교에서는 불효를, 세상에서는 살인을 가장 무서운 죄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을 가장 큰 죄로 여깁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죄인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세 가지 측면에서 자신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자신을 보는 관점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볼 때 가장 진실하게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처럼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속이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남들이 나를 보는 관점입니다. 남들이 나를 판단하는 것은 객관적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속일 수가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앉지않음 

여기 “오만한 사람”은 히브리어로 “레침”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조롱하는 사람, 비웃는 사람”이라 뜻입니다. 예를 들면 시편 73:8-11절을 보면 “하나님이 어찌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고 비웃는 모습이 나옵니다. 또 이사야 28:14-15절을 보면 이사야가 외치기를 “너희 오만한 자여, 너희는 밀려오는 재앙이 우리에게는 오지 않는다고 하는도다”하고 개탄하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 “오만한 자”는 한마디로 그런 거만, 교만, 거드름을 말합니다.  

그 뿐 아니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태도”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사람이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심판을 부정하는 사람은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역사를 보면 이런 사람들이 무자비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는 대표적인 무신론자였고 신에 대해서 증오심까지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통치기간 중에 유태인들과 교회를 무자비하게 핍박하고 특히 유태인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오늘 구제역으로 소와 돼지를 구덩이를 파고 밀어 넣어 죽이듯이 그렇게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을 시켰습니다. 

가스실에 넣고 가스를 주입하여 죽이고 창고에 몰아넣고 불 질러 죽이기도 하였는데 그렇게 죽은 유대인이 천만 명 인구 중에 600만 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의 시체를 기름 짜서 추운 날 전선에 보내 불 피우게 했습니다. 이것이 오만한 사람 즉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니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권세를 주면 안 됩니다. 스탈린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탈린은 70여 년 동안 하나님 없는 나라를 건설한다는 명분아래 2,300만 명을 죽였습니다. 그 시대가 오만한 시대였습니다. 

그뿐 아니고 생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철학자 쇼펜하우어입니다. 이 사람은 허무주의적 철학자였습니다. 염세주의자였고 극단의 비관주의적 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신의 섭리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철학자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아 발버둥을 치지만 필경은 맹목적일 뿐이다, 인생에게 있어서 최상의 길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기왕 태어났으면 일찍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무책임한 말입니까. 그것도 철학이라고 설파했습니다. 그 말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자살해서 죽었습니까. 그런데 자기는 살 것 다 살고 73세에 죽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죽을 때는 정상적으로 죽었겠습니까. 하숙집에서 개와 함께 살다가 죽어갈 때는 나를 위해 피리를 불어달라고 해서 쓸쓸하게 피리소리를 들으며 죽어갔습니다. 이것이 오만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그런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오만함의 생각과 생활 태도가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는 무신 사상이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불온사상은 빠르게 전염됩니다. 선과 진리는 전파가 더디지만 악이나 불온사상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오만한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신의 섭리의식도 없습니다. 있다면 아주 지독하게 병들어 버린 병든 자아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 즉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11장28절을 보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1장3절을 보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시편119장103절을 보면 “말씀의 맛이 내 입에 꿀 송이 보다 더 달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묵상하라고 강조합니다. 묵상은 조용히 생각하며 음미하며 되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소가 비스듬히 누워서 눈을 감고 이미 먹은 것을 다시 토해내서 되씹듯이 말씀을 음미해야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묵상하고 음미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때 말씀에서 꿀 송이 보다 더 단맛을 느끼게 되고 그 시간에 영적 깊은 바다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가 보니까 일 년에 성경을 50독한 사람에 상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하지만 그렇게 읽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성경을 읽는 일도 쉽지 않은데 일 년에 50독을 했다면 하루 종일 성경만 읽어야 한다는 말인데 성경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깊이 음미하고 되새겨서 그 말씀의 깊이와 맛을 아는 것입니다. 밥을 빨리 먹으면 맛을 느끼지 못하듯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에서 청교도들을 이끌고 종교전쟁을 수행하던 크롬웰 장군이 전쟁터에서 주머니에 조그만 성경책을 넣고 다니다가 틈만 나면 꺼내서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께 도움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전투를 수행하다가 적의 총탄을 맞고 순간 기절해서 쓰러졌다가 깨나보니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성경책에 총알이 박혀 있었습니다. 내가 맞을 총알을 성경이 막아준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이 “하나님은 내 육신의 생명을 구하고 내 영혼까지 구하셨다“고 하였다고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는 모습 얼마나 진지한 모습입니까. 성경은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그곳이 비록 전쟁터였지만 그곳에 평화가, 용기가, 든든한 힘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3절에서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이 형통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땅짚고 헤엄친다”는 말이 있듯이 대부분 식물들은 뜨거운 여름 가뭄이 오면 대부분 말라 죽지만 물가에 심겨진 나무들은 가뭄이 와도 여름이 와도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형통이라고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자라"고 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복이 무엇입니까? “가뭄이 올 때, 기근이 올 때 걱정하지 않는 삶”이 복입니다. 여기 가뭄과 기근은 살아가다가 만나는 환란이고 종말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보통 때에는 나 혼자의 힘으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재물이 있고 사업이 잘 되면 어느 정도는 내 힘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은 그런 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심한 가뭄이 오고 기근이 오고 환란도 옵니다. 그때에는 우리는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기초이시고 배경이시고 보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은 언제나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은 삶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악인은 그렇지 아니하며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쌀을 도정할 때 먼저는 쌀의 껍데기인 왕겨를 바람으로 날려 보내고 다음으로는 쌀의 속껍데기인 겨를 바람으로 날려 보냅니다. 왕겨나 겨는 가벼워서 바람에 날아갑니다. 왜냐하면 무게가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 때 그리고 종말 때에는 바람에 날려가는 겨와 같이 두려움에 빠질 자가 누구인가 하면 악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을 대상이나 의지할 배경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말 때가 되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50편에서는 “환란 때에 나를 찾으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복 있는 사람을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