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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4)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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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4) (계 2:18-29)


유진 피터슨이라는 기독교 영성 작가가 있습니다.  좋은 책을 써서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는 분입니다.  그의 책에 보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 할 최대의 윤리적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이중 기준'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도덕적 결함에 관련된 상황을 놓고 이중기준 혹은 이중잣대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이중기준의 문제가 도대체 어떤 문제입니까?  이라크 전쟁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라크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소위 세계적인 반미운동을 자극했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아마도 포로학대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포로학대 사건에 그렇게도 국제사회가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입니까?

그것은 미국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스스로 인권국가임을 자임해 왔습니다.  그리고 인권을 유린해 온 다른 국가들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여 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 나라의 군인들에 대하여는 동일한 잣대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미국은 소위 '이중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비판을 피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중 기준의 문제는 국제적인 영역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영역 속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쉽게 부딪히고 있는 문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중 기준의 사전적인 정의를 말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이나 한 그룹에 대해서 우리가 엄격하게 적용하는 윤리적 기준을 다른 사람이나 다른 그룹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적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중 기준이라는 말을 쉽게 표현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그러나 이런 이중 기준의 문제는 저와 여러분의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어제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던 기준을 오늘은 전혀 적용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적용하던 방식을 저 사람에게는 동일하게 적용하지 못하고 있는 이중적인 잣대의 삶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대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대표적인 이중 기준의 케이스가 있다면 주일의 우리의 삶과 월요일의 우리의 삶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아주 거룩한 표정입니다.  은혜가 아주 충만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정에서의 삶은 전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을 경영할 때 우리들의 모습은 전혀 다른 얼굴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의 삶의 한 구석에 이런 이중적인 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런 이중 기준의 윤리적인 갈등을 안고 고민하고 있었던 1세기의 한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였습니다.  밧모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사도 요한이 주님으로부터 묵시를 받아 1세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씁니다.  그 중에 네 번째 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통해서 21세기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건강한 성도, 건강한 교회의 비전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매우 엄격하고 단호한 모습입니다.  본문 1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는 불꽃같은 눈, 그리고 빛난 주석 같은 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는 분, 그리고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그가 다루시고자 하시는 단호한 의지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심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의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의 일곱 도시 가운데서 가장 작은 도시였습니다.  현재의 도시명은 악히사르(Akhisar)라고 불리는데 지금도 인구 6만의 작은 마을 도시입니다.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약 80km, 사데까지는 약 65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두아디라라는 작은 도시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교회를 향한 메시지에 일곱 교회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이 교회를 향해서 하실 말씀이 그만큼 많으셨던 것입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서 칭찬도 제일 많이 받고, 책망도 제일 많이 받은 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9절에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우리는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 가운데서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을 대표하는 다섯 가지 단어들이 빠짐없이 동원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의 교회였고, 섬김의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믿음과 섬김의 과정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시련과 역경들을 이 교회의 성도들은 잘 견디고 인내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이 교회는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잃어버렸다고 책망하셨던 사랑까지 가지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거기에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일곱 교회에는 전혀 쓰지 않았던 독특한 칭찬으로 쓰여진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사업이었습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사업까지 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냥 주저앉아 있었던 소극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님의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주의 사업을 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선교의 사업이었는지, 아니면 이웃을 돌아보는 구제의 사업이었는지.  어쨌든 주님께서 명하시는 사업 앞에 그들은 자신을 아끼지 않고 주저함이 없이 아주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칭찬할만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처음보다는 나중에 칭찬할 것이 더 많다고 하셨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더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던 교회였습니다.  이만하면 100점은 아니더라도 90점은 충분히 받을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이 모든 칭찬 받을만한 놀라운 장점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암적인 요소가 이 교회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신랄한 책망을 피할 수 없었던 교회, 그것이 바로 두아디라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책망을 받았습니까?

이제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20절이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본문 2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여기에 보면 여자 선지자 이세벨이 등장합니다.  이세벨은 구약에서 듣는 이름입니다.  과거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 안에는 이세벨과 같은 여성 지도자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성 지도자의 잘못된 영향력으로 두아디라 교회의 상당한 교인들이 음행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바로 그 지도자격인 상징적인 인물을 이세벨로 묘사했습니다.  이세벨, 이씨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여인이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나름대로 흥미 있는 추측을 합니다.  혹시 이세벨로 상징되는 인물이 루디아가 아닐까?  루디아를 아십니까?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루디아는 사도 바울과 더불어서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는데 쓰임을 받았던 여성 지도자였습니다.

바울이 동쪽으로 아시아를 향해서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길이 여의치 않고 막힙니다.  상황이 여의치 못합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고민하면서 기도하는데 바울이 환상을 봅니다.  그가 가고 있었던 아시아와는 정 반대의 방향인 유럽쪽 그리스 마게도니아의 사람이 나타나서 와서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하는 환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시아로 가다가 방향을 전환합니다.  여기에서 동양으로 갔어야 할 복음이 서양으로 가게 되는 극적인 전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유럽으로 갑니다.  유럽의 첫 번째 나라였던 그리스의 마게도니아의 첫 도시인 빌립보라는 도시에 와서 안식일에 바울이 빌립보의 강가에서 만난 여인이 바로 루디아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여기에서 우리는 루디아가 두아디라 출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 도시 출신입니다.  그녀는 자색 옷감 장사였습니다.  그녀는 장사를 위해서 소아시아 지방에서 그리스까지 왔던 것입니다.  일종의 의류사업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녀가 바울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사도 바울과 더불어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런 추정을 합니다.  루디아가 이렇게 잘 출발을 했는데 나중에 좀 변질되어서 그가 자기의 고향 두아디라에 돌아왔을 때 잘못된 영향을 끼쳤을 것은 아닐까 라는 추측을 합니다.  그러나 이 추측은 근거가 별로 없는 억측이라고 생각합니다.  루디아가 들으면 환장할 일입니다.  열 받는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쨌든 두아디라 교회는 유달리 여성들의 영향력이 상당했던 교회라고 보여집니다.  그 중에 악한 영향력을 끼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으로 적지 않은 두아디라의 성도들이 우상숭배에 빠졌고, 음행의 방종적인 생활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열심히 주를 섬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죄를 섬기는 이중적인 교인들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두아디라 도시가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자주색 옷감을 염색하는 기술이 발달된 아주 부유한 상업도시였다고 합니다.  루디아도 이런 옷감 장사를 하면서 그리스의 도시 빌립보를 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도시는 돈이 많이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으로 계를 하는 길드 조직인 일종의 계 조합이 많이 조직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어디를 가나 이 계 조직이 문제입니다.  모든 계 조직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계는 그 마지막이 유흥과 오락입니다.  적당하게 계돈을 내고, 그 모인 돈으로 여행을 가고, 그리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계모임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계모임을 좋아한다면 결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결코 자라나는 자녀들에게도 좋은 모습이 될 수가 없습니다.

두아디라에서 성행하던 계조합들은 당시 이 도시에 존재했던 트림나스(Trimnas)라는 신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계돈을 타서 이 돈을 신전에 바칩니다.  그러면 신전은 다시 그 돈으로 그 조합에 속한 사람들에게 마음껏 술을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배부르도록 먹게 합니다.  그 다음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신전에는 여사제들이 고용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제들이 아니라 창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선택한 여인들과 더불어 음행을 하던 일들이 일종의 관행으로 자리를 잡은 도시가 바로 두아디라 도시였습니다.  돈으로 사랑을 사고, 돈으로 성을 매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돈으로 성을 사는 매춘업이 발달한 것과 다를 것이 없는 풍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런 일들에 아무런 죄 의식 없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것이 뭐가 나쁘냐, 그것 가지고 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까지 그 죄악 속으로 끌어들이는 풍조가 이 교회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일날은 경건히 주를 예배합니다.  그렇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의 마당에서는 쉽게 죄와 타협하는 그런 이중의 기준, 그리고 이중의 가치를 가지고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았던 교회, 그것이 바로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두아디라 교회의 순결을 잃은 성도들에게 단호하게 회개를 촉구하시고 계십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회개입니다.  그것이 21절 이하 23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2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그 회개를 거절하고 있었다고 하십니다.
"회개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력한 경고가 그 다음절인 22절에서 이어집니다.  본문 2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 자신만 환난을 받을 것이 아니라 너의 자녀들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 경고는 자녀들에게까지 계속됩니다.  범죄한 그 부모의 그 자녀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진노와 채찍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를 하십니다.

본문 2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회개하지 않으면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자녀들이 죽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잘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만을 위해서 아니라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그 화가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회개하고 그들이 순결한 자리에 다시 설 수 있다면 두 가지 위대한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는, 만국을 다스리는 자들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 삶의 지경을 넘어서서 위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써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새벽별을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어두움을 몰아내는 새벽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임재로 우리의 삶을 채워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만약 순결의 자리를 회복할 수가 있다면 내 이웃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며 또 그분의 거룩한 빛으로 인도함을 받는 복된 생애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 펼쳐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서 배워야 할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성도의 비전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21세기의 우리 교회가 1세기의 교회를 통해서 배워야 할 건강한 교회의 비전은 무엇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순결한 교회와 성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순결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순결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시대의 순결한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로서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순결한 공동체, 순결한 성도가 될 수가 있을까요?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부터 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순결한 공동체, 순결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것이 첫 번째 발걸음입니다.  그 동안 나와 우리를 붙들고 있었던 이런 이중적인 기준들, 그리고 이중적인 가치들을 포기하셔야 합니다.  주일과 월요일이 다른 우리의 모습을 회개하셔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생활이 다른 모습을 회개하셔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얼굴과 직장에서의 얼굴이 다른 모습을 회개하셔야 합니다.

숨겨진 죄가 없어야 합니다.  은폐하고 있는 어둠이 없어야 합니다.  자신과 이웃에게 투명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는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죄를 끊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회개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순결을 회복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순결한 공동체가 되려면 두 번째로, 돈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순결을 잃어버린 이유, 그리고 그들이 이중적인 삶의 구조 속으로 빠진 이유는 돈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칭찬하실 때 첫 번째로 칭찬하신 것은 사업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업을 잘 했습니다.  그래서 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돈이 화가 되었습니다.

아마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은 처음에는 이런 이야기를 했을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도 돈이 있어야 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같지 않습니까?  주님을 섬기는 데도 돈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벌면서 서서히 주님보다 돈의 힘을 더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돈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어느 날 돈으로 쾌락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돈으로 성을 사고, 사랑을 사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돈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돈으로 가치를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하나님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다른 사람의 순결한 사랑을 살 수도 없습니다.  돈으로 삶의 진정한 행복을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모으는데 삶을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돈에만 집중하면 사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돈에만 집중하면 가정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내 삶을 집중하면 전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한 남자가 오랫동안 자기 마음속에 두고 있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여인에게 드디어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그때 그 여인이 이런 조건을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앞으로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의 집 창문 앞에서 꽃을 들고 매일 밤을 새우신다면 100일 후에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여인은 꽃을 들고 자기 집 창을 지키는 남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99일이 지나갑니다.  99일째 되던 밤, 엄청난 비바람과 번개와 폭풍이 치던 그날 밤에 그 남자는 창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폭풍우가 내리치는 비바람 속에 비에 흠뻑 젖은 채 꽃을 들고 밤을 지새고 있는 이 남자를 보는 순간 이 여인은 감동을 먹었습니다.  드디어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문을 열고 창문 앞으로 그 남성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리고 비에 흠뻑 젖은 남자를 끌어안습니다.  이때 그 남자가 갑자기 계면쩍은 표정으로 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죄송해요.  저는 아르바이트생입니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우리 시대를 향한 고발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으로 진정한 사랑은 살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인생의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순결한 만남만이 순결한 사랑을 제공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순결한 성도가 될 수가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하셔야 합니다.  둘째는 돈의 유혹을 넘어서셔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만으로 만족할 줄 아셔야 합니다.

성도의 모든 타락은 주님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 그리고 다른 그 어떤 것이 나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때 우리는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다른 그 어떤 누구로부터도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인생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본문 2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두아디라 교회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훌륭한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칭찬 받을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것으로는 더 이상 지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간교한 술책 앞에 무너지는 너희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내가 다른 것으로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하겠다.  그 한 가지가 25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2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한 가지만 부탁하겠는데 너희들에게 이미 있는 것, 이미 주어진 믿음, 이미 주어진 예수만 붙잡고 있으면 좋겠다.  다른 데 한 눈을 팔지 말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가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것을 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를 믿는 믿음 안에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이 있음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다른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 안에 소망을 두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결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18세기 독일의 조각가 요한 하인릭 다네커(Johann Heinrich Von Dannecker, 1758-1841)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로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해서 많은 조각상을 남겨서 유명해졌습니다.  1790년부터 독일 슈투르가르트에서 미술교수와 미술관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인생의 절정에서 갑자기 인생의 허무를 느낍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마음속에 새로운 열망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상을 조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2년에 걸쳐 열심히 그리스도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서 그는 전문가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네의 어린 소녀를 자기 화실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조각상이 누구지?"  이 소녀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냥 "아주 멋진 남자 같네요"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화가는 자기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들기 시작합니다.  무려 6년에 걸쳐서 그는 다시 그리스도상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6년 동안 기도하면서 만든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그 소녀를 초청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조각상을 보면 누가 생각나니?"  "예수님입니다."  그 순간 이 화가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 직후에 그는 당시의 유명한 나폴레옹 황제로부터 초청을 받습니다.  파리로 와서 루불에 비너스상을 조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이 요청을 거절하면서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주님 그리스도의 상을 조각한 이 손으로 더 이상 나는 이방의 신상을 조각함으로 내 마음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그의 사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그의 소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다른 어디에서도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요."  이 말씀이 진실인 것을 그는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에만 '주여'라고 부르는 주님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내 삶 속에 주인이 되셔서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나의 소망이 되십니다.  나의 존재의 전부가 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떠나서 달리 기쁨이 없습니다.  그분을 떠나서 다른 쾌락이 없습니다.  그분을 떠나서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한 만족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순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거룩하고, 이런 순결함으로 채워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로 형성되는 거룩한 공동체를 사모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거룩한 공동체의 탄생은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제가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이중 구조적인 위선과 그런 삶에 대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그분에게 내 인생의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리고 오직 그분만을 구하며 그분으로 만족하는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시작할 때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공동체로 만들어져 갈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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