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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능력 (엡 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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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능력 (엡 3:5-1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복음을 몰랐을 때 바울은 핍박자였다. 가장 열렬히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라는 이 메시지는 율법주의자, 자기 의를 세워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교의 사람에게는 허황된 거짓말로 들렸다. 바울은 이런 예수쟁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현장에 서서 그 스데반이 돌에 맞아 운명할 때도 ‘너 같은 예수쟁이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회심한다. 그 후 기독교의 변증서라 할 수 있는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한다. 그 복음 때문에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 바 되었고 복음은 곧 성경에 약속된 예수님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외친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은 구원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구원이다. 복음을 모를 때에 반대자가 변하여 복음 옹호자가 되었고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누구든지 율법으로 의를 이룰 수 없지만 복음을 믿으면 그 의가 내게로 오는 의가 된다. 그래서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 복음이기에 바울은 자신의 삶을 걸고 자랑한다. 바울은 이 복음이 자랑스럽기에 오늘 에베소서 본문에서 복음의 능력을 설명한다. 구원을 주는 복음은 어떤 능력이 있는가?

1. 복음은 신분을 바꾸는 능력이다. (엡3:6)

복음은 유대인만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다. 

엡1:13下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된다. 이방인들이 구원 받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개처럼 취급받던 이방인이나 이방인을 개라고 여겼던 못된 우월감에 도취한 유대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분이 바뀌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 이방인 교회인 에베소교회에게 편지를 하면서 이같은 신분의 변화를 알려주는 것이다. 

엡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이 말씀을 읽을 때 복음의 위대함을 느낀다. 우주만한 복음의 품을 느낀다. 이방인의 신분을 바꾸어 이방인과 유대인을 모두 함께 상속자가 되게 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다. 

엡2:12을 보면 이방인은 본래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의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 다만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십자가의 피로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가 되게 하였다. 율법을 파기하고 하나님과 화목을 가져왔다. 그래서 이방인은 변화되었다. 엡2:19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방인을 유대인과 똑같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이다. 신분이 바뀐 자이다. 

이것을 알게 된 바울은 이것을 알게 된 빌레몬을, 노예요 종이었던 오네시모의 문제를 동등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 이것을 알게 된 크리스챤들은 노예 제도를 폐지하였다. 영국의 윌버포스, 미국의 링컨 모두 차별을 폐지하였다. 우리도 폐지한다. 사람이 모두 한 권속이기 때문이다. 모든 계층을 뛰어넘어 같은 신분, 차별 없는 한 형제요 한 자매로 만나며 사랑한다.

  
2. 복음은 일꾼이 되게 하는 능력이다. (엡3:7)

엡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복음을 아는 사람, 체험한 사람은 복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된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복음을 내버려둔 체 사는 게으름뱅이, 무관심쟁이가 될 수 없다. 엡3:7에서 분명 “복음을 위하여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고 하였으니 복음은 나를 복음의 일꾼으로 세운다. 

우리 교회는 새 가족이 오면 손을 들고 환영한다. ‘축복합니다.’의 노래를 다같이 부르고 나면 손을 들고 환영할 때 성도들이 다같이 구호를 외친다. “복음의 일꾼됩시다!” 그런데 정말 복음을 알면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 행복하고 좋아서 일꾼이 되어지고 만다. 그 일꾼은 다양하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서 일꾼이 된다고 했으니 세우시고 부르심을 받은 은혜는 여러 가지 직임으로 나타난다. 

엡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엡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복음을 위하여 주시는 은혜의 선물은 5가지이다. 성도들은 이 5가지 직임의 일꾼이 되는 것이다.

①사도적 직임 ②선지자적 직임 ③복음 전하는 직임 ④목사의 직임 ⑤교사의 직임

교회 안에는 5중 직임의 일꾼이 있어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오늘날 아쉬운 것은 사도적 직임, 선지자적 직임이 교회 안에서 사라졌다. 사도의 직임이란 12사도로 끝난 것이라 생각하는데 딤후1:11을 보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바울은 자신에게 세 가지 직임이 주어졌음을 개인적으로 밝히면서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사도성과 선지자성 위에 교회는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일꾼이 되었다. 아무쪼록 사도 직임과 선지자 직임이 회복되도록 기도하고 그 선물을 받는 교회가 되자. 이렇게 해야 되는 이유는 엡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를 제대로 세우려면 직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직임을 선물로 받은 일꾼이 다양하게 나타나야 한다.

  
3. 복음은 삶에 담대함을 주는 능력이다. (엡3:12~13)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 전도자가 되었고 또 갇힌 자가 되었다.(엡3:1) 그런데 갇힌 자 된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격려한다. “나의 환난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 내가 겪는 환난이 너희의 영광이다.” 바울은 담대했다. 삶의 용기가 넘쳤다. 복음을 믿는 바울은 담대함과 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두려워 할 것이 없었다. 

딤후1:8을 보면 바울이 옥에 갇혔다고 디모데가 두려워한다. 부끄러워한다. 그때 갇혀 있는 바울의 권면을 보라.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의 이 담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가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딤후1:12) 

고후1:10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확신한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그리스도께서 건지신다는 확신, 무엇이 두려움이 될까?

바울은 오직 담대할 뿐이다. 고후11:24~25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또 고후11:26~27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나 그의 염려는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늘리는 일은 오직 교회에 대한 것이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세워주신 교회만을 위해 염려할 뿐이었다. 

생사를 초월한 바울, 이 사람만큼 담대한 자가 없다. 바로 확신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낙심할까봐 걱정한다. 갇힌 자로서 오히려 교인들을 염려한다. 자신에겐 두려운 것이 없다. 삶에 대해 담대한 사람, 그래서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에 몰입하고 복음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려갔다. 그것이 곧 저절로 전도인이 된 이유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한 그릇이 된 이후부터(행9:15) 전도자가 되었다. 

엡3:8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엡3:9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전도자로 살았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였다.(롬1:14) 

우리도 복음 때문에 새 인생을 산다. 복음 때문에 흥한 인생, 바꿔진 인생을 산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걸어도 좋은, 무엇을 내려놓아도 좋은 성도가 되자. 복음은 갈수록 이 시대의 희망이다. 흔들 수 있는 깃발이고 외칠 수 있는 진리다. 인생을 걸만한 보화이고 바꿀 수 없는 삶의 매력이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옥에 갇혀도 좋고 셋방에 살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복음 슈퍼맨이 되자. 복음을 안다면 오직 예수를 위하여 목숨을 다해 천국 일하는 것이 복음이 주는 삶의 태도임을 깨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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