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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불을 일으키라 (딤후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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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을 일으키라 (딤후 1:3-14)


"상대적 우위(相對的 優位)로는 경쟁력이 없다."고 여러 번 제가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청나라 건륭제 시절은 중국의 전성기였습니다. 이때 영국은 중국에 사절을 보내서 교역을 하자고 했으나 건륭제는 물산의 상대적 우위를 내세워 '교역(지금의 FTA)이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가장 현명하다는 건륭제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영국사절의 아들이 지켜보았습니다. 불과 한 세대 뒤에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영국의 화력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때 항복을 받아내려고 북경에 도착한 영국대표가 지난날 영국사절의 그 어린 아들이었습니다. 

5천년 동안 중국은 하나라에서부터 은, 주, 위, 오, 촉, 진, 한, 위진남북조, 수, 당, 송, 원, 명, 청, 중으로 내려오면서 천산산맥으로 둘러싸여 만리장성을 축성하고 백년하청(百年河淸-황하강이 백년마다 한번씩 맑아진다는 뜻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니,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백발이 삼천장이나 된다는 말)이니, 하수분(河水盆-만리장성 축성시에 아무리 퍼내어도 도무지 줄지 않는다는 큰 항아리)이니 하는 과장(誇張)을 읊으면서 중국은 세계를 읽을 줄 몰랐습니다. 
중국은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패할 때까지도 중국(中國)이 세계중심이라고 하면서 없는 국호를 포장하고 스스로 자만했습니다. 

정작 중국이 정신을 차린 것은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중국의 국가 부흥에 불을 붙여 재도약을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그 좋은 예로 "유적지 두고는 다 바꿔라!", "검은 고양이든지 흰 고양이든지 쥐만 잡으면 된다."는 말은 중국의 재도약을 천명하기에 충분한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들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과거에 그가 안수 받을 때, 그때 받았던 하나님의 은사를 상기시키면서 『 다시 불 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불일듯'(아나조퓌레인, )이라는 말은 '불길을 일으키다'(to fan the flame)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시 불붙게 하다', '다시 뜨겁게 하다', '타오르게 하다', '회복시키다', '살아나게 하다', '자극하다', '분발하게 하다', '활기를 띠게 하다', '북돋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받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완전히 중단되거나 불씨가 꺼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의 것으로는 될 수 없으니 재무장하라는 것입니다. 

Ⅰ. 디모데의 불은 왜 꺼져가고 있습니까?

본문 1장 6절에 『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의 신앙과 사명감이 왜 다시 일어나야 합니까? 그 이유를 여기서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박해로 인해 약해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후 64년 7월 18일 밤에 로마 시가에는 큰 불이 일어나 6일 간 계속되었고, 다시 화재가 3일 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로마 전 시가(市街)는 다 타버렸습니다. 이것은 폭군 네로황제가 기독교도들을 박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화재를 일으킨 것입니다.

따라서 이 방화범으로 기독교도가 혐의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약자인 기독교인들은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갖은 악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도 포박되어 죽음에 직면케 되었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디모데는 당시 교회가 당하고 있는 갖은 시련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병이 생겨 잠시 동안 약해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2) 그의 소심함과 연소함으로 인해 낙심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0절에 『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이때에 비교적 젊고 경험이 적은 목회자였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 『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라고 했습니다. 이에 반해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매우 심각해져서 디모데가 지닌 부담은 더욱 무거웠습니다. 
오만한 궤변가와 분파주의자들이 연소(年少)한 디모데를 위협하거나 조롱하여 그가 자신이 받은 업무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특별한 배려로 고린도교회에 권면하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천성적으로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디모데의 소심함보다는 연소함 때문에 바울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사실 디모데는 현재와 같은 어려운 직무 외에도 이후에 아시아 전 지역을 전도하는데 큰 몫을 담당할 만큼 대담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가 소심하고 유약해서라기보다는 디모데가 연소하다는 것을 빌미로 그가 전하는 복음까지도 그릇되게 받아들여질까 봐 이를 염려한 것입니다. 

3) 그가 직면한 이단의 유혹으로 의기소침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노스틱 철학적 사상, 에피크로스의 극단의 현실향락주의, 에세네스의 극단의 비현실주의, 기타 유대교적 정신은 청년인 디모데의 머리를 혼란케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들이 혼재되어 사명감에 충실한 젊은 디모데에게 부담이 되었습니다.

4) 그의 유약한 건강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 『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고 했습니다. 
그는 건강으로 인해 의기소침해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먼저 자신의 신앙과 받은 사명에 불을 붙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Ⅱ. 디모데가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본문 1장 7절에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디모데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곧 디모데의 재산처럼, 디모데의 분신처럼 된 그가 받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1) 주께로부터 받은 능력입니다. 
(1) 고난을 참는 능력입니다. 
본문 1장 8절에 『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 했습니다. 

(2) 복음을 전하는 능력입니다. 
본문 1장 11-12절에 『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고 했습니다. 

(3) 복음과 계명을 지키는 능력입니다. 
본문 1장 13-14절에 『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가 받은 은혜는,

2) 주께로부터 받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은 물질적으로 유무상통할 수 있는 형제애(愛)입니다(행 2장). 도덕적으로는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행 7장). 또 남을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당시와 같은 기독교 수난 시대에 있어서 가장 요긴한 은혜였습니다. 사랑의 불이 꺼진다고 할 때 이와 같은 비극은 없습니다. 디모데가 받은 은혜는, 

3) 주께로부터 받은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본문 1장 7절에 『 …근신하는 마음이니 』라고 했습니다. 
근신은 깊이 생각하며 조심하는 자세입니다.
디도서 1장 8절에 『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라고 했습니다. 
디도서 2장 2절에 『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2절에 『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분별력 있게 대하는 태도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능력은 외부적으로 발전 확장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부적으로 선하여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근신은 내외부의 생활을 조절시키고 긴장시키는 것입니다. 이 근신이 결핍되면 모든 것이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Ⅲ. 어떻게 불을 일으킬 것입니까?

본문 1장 7절에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제단의 제물이 날 것으로 있을 때에는 솔개가 날아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불이 한번 내려 제물에 통하여진 후에는 다시 솔개나 까마귀는 오지 아니했습니다(창 15장).

누가복음 12장 49절에 『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라고 했습니다. 
불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불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불을 붙인다는 말은 복음을 전파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불은 언제든지 제단에서 꺼지지 않고 피어오릅니다. 교회에 불이 붙으려고 하면 마귀는 소방수가 되어서 불을 꺼버립니다. 그러나 그 불은 꺼지지 않고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세계를 태우고 있습니다. 

인간은 불을 만드는 자가 아닙니다. 다만 받은 불을 일으키는 자입니다. 불을 일으키는 것도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9장 2절에 『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다시 디모데의 사역에 불을 붙게 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무엇입니까? 

1) 눈물의 기도입니다. 
본문 1장 4절에 『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2) 유산 받은 거짓 없는 믿음입니다. 
본문 1장 5절에 『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고 했습니다. 

3) 유산 받은 신앙 전통의 재발견입니다. 
본문 1장 5절에 『 …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신앙유산은 우리의 보배입니다. 

4) 받은 사명의 재발견입니다. 
본문 1장 6절에 『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부딪쳐야 불이 나듯이 동적이라야 불이 붙습니다. 생각할 때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사색하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귀한 것입니다. 그 사색은 반드시 계시의존사색이라야 하고 생산적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데 대해 '아니요' 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사탄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힐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주께서 인도해 주시겠지'라고 마냥 있으면 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입니다.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는 자들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을 즐기는 자들입니다. 교회 소속감으로 한없이 위안을 받는 형식주의 자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순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순간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work)할 때 동시에 마귀가 그 역사를 멈추게 하고 약화시키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성령의 역사에는 간격이 없습니다. 배려된 시간이 주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유예(猶豫-어떤 일을 결행하지 않고 시일을 임의로 늦춤)기간이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동시적이고, 공격적이고, 공개적이고, 기습적입니다. 
불은 붙는 순간 타는 것입니다.
불이 붙었다는 것은 곧 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곧 행동화되는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가시적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불입니다. 그 말씀이 임하면 곧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불을 붙여야 합니다. 자만하면 안됩니다. 내 속에, 우리 가운데 이 정도의 약한 불을 가지고 탄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자는 다시 불을 붙여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지배를 받는 자는 다시 불을 붙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력하게 전파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전능자 되심을 믿지 못하고 그의 능력, 그의 사랑, 그의 기도, 그의 구원, 그의 영광, 그의 축복을 평가절하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불입니다. 이 불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과 화의 양면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보배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됩니다. 

로마서 9장 33절에 『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7-8절에 『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 고 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핵심은 '주다(give)'입니다. 주는 것은 복음의 실천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는 자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불을 일으켜서 나 자신을 교회에 줍시다.
다시 불을 일으켜서 주는 교회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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