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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용서하시는 하나님 (눅 18: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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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용서하시는 하나님 (눅 18:13-14)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3-14) 

I.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 좁게 보면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 것이고, 넓게 보면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할지, 신앙을 이어가야 할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II. 기도하러 올라간 두 사람. 

기도하러 올라간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한 사람은 거룩한 종교의 도리를 가르치는 종교지도자였고, 한 사람은 동족들의 고열을 빨아 로마에 바치고 자기의 사욕을 불리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세리는 아마도 바리새인과 함께 거의 같은 시간에 성전에 올라간 것 같습니다. 이때에 바리새인은 세리로부터 좀 멀리 떨어지려고 하였고 혼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기도의 문을 연 것은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하는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모두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옆에서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 세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너무나 죄가 많아서 성전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던 이 죄인이 오히려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얻고 성전에서 내려갔느니라’ 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III. 죄인을 만나주신 하나님 

여기서 우리는 죄인을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믿음과 갈망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죄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진실한 종교의 대의는 꾸밈없는 마음이고, 순수한 심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꾸밈이 있고 가식된 이중 삼중의 마음을 가진 의로운 사람보다는 오히려 죄로 말미암아 파산한 그러나 꾸밈이 없고 순수한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을 주님은 만나 주십니다. 

A. 불쌍히 여기옵소서 

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었던 기도의 내용이 단 한 마디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바리새인이 청산유수와 같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을 때에 세리는 아마도 그 기도소리를 모두 들으면서 더 깊은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토색, 불의 어쩌면 간음까지 행하는 사람이었고, 또 이레에 두 번씩 기도한 적도 없고,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리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리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차마 얼굴도 들지 못하고 격식을 깨뜨리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아마도 눈물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통해서 더듬어, 더듬어 깊이 들어갔을 때에 뼛속 깊이 사무쳐져 있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일반적인 기도의 방식은 서서 두 손을 높이 하늘을 향해 들고 고개를 들어 주님을 우러르며 기도하는 것이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의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 모든 격식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손을 모을 수밖에 없었고, 얼굴을 떨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손으로 가슴을 쳤으니 이는 회개에서 북받쳐 오르는 깊은 탄식이 자신의 호흡을 힘들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가슴을 치면서 그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는 죄인이옵나이다’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인이 자신이 죄인임을 정직하게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B. 하나님을 향한 갈망 

참된 종교의 도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종결됩니다. 정말 신앙의 참된 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런 마음으로 갈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마음 깊은 곳에 돌팔매를 던지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돌팔매처럼 던져져 우리의 심령에 떨어질 때에 커다란 파문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요히 우리의 마음속에 울려 퍼지고 그리고 그것은 마치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처럼 우리에게 부자연스러운 강요가 느껴지지 않는 가운데에 울려 퍼지는 파문과 같습니다. 우리도 바꿀 수 없었던 마음을 바꾸어 놓으시고, 약했던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그릇되었던 마음을 바르게 하십니다. 분노와 미움으로 어우러졌던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감화시키십니다.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 파문이 일어나는 경험을 여러분들은 얼마나 하고 살아가십니까? 

이 죄인은 바리새인의 마음속에 없는 커다란 파문을, 마음속에 은혜의 정동을 경험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큰 정동을 느꼈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기 싫은 자신의 마음 때문에 정동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 죄인인 세리가 이렇게 거지가 동냥을 구하듯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이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뼛속깊이 사무친 죄에 물든 더러운 죄인으로 이 성전에 서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무한히 죄스러운 것이었으나 그러나 그는 그 자리를 회피할 수 없었습니다. 

생명이 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비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 기도도 드릴 수 없었고, 또 의미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를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만 이 죄인이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며 그 임재 앞에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매달릴 때에는 바리새인을 의식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뼛속 깊이 사무친 죄에 물든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그는 간절히 탄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절망했으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갈망이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절절한 미움이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 기도 속에 배어 있습니다. 타고난 죄의 본성위에 율법 없이 살아가는 불법한 삶과 그리고 자신의 부에 대한 욕망이 세리를 하게 만들었고, 이렇게 불순종과 악을 더하면서 그는 더더욱 죄인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성전에 올라와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 지금에 와서는 그는 도저히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기에는 너무나 먼 하나님이었고, 자신이 이제껏 지은 불의와 많은 죄들이 자신의 마음에 무거운 사슬이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오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제 외부로부터 오는 도움이 아니면 이 사슬을 끊을 자가 없었고, 그는 자기 스스로 이 욕망과 죄악에 포로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히 종이 상전을,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람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간절한 탄원은 그의 마음을 쥐어뜯듯이 울려 퍼졌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살아온 모든 죄악된 날들에 대한 회상은 이를 더욱더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한에 몸부림치게 만들었습니다. 조여 오는 자신의 폐에 압착을 느끼면서 그는 가슴을 때리며 자신의 폐를 진정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갈망이 있습니까? 정말 이런 사모함이 있습니까? 자신의 죄에 절망했으나 이 세리의 간절한 소원은 죄 가운데 죽는 것이 아니었고,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었습니다. 

III. 다시 용서 하시는 예수님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수많은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을 다시 용서하시는 예수님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은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당신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가 많았다는 이유 때문에 죄인들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 속에서 이렇게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간절한 갈망과 탄원을 보실 수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바리새인들보다는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찬 자기를 낮춘 세리들을 찾아다니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돌을 던지시고 바리새인의 마음에 일어나지 않았던 그 놀라운 은혜의 파문을 일으키셔서 그들로 새 사람이 되도록 만드셨고 그들은 새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IV. 결 론: 낮아짐과 갈망 

종교의 대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가식이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한 마디의 기도는 거짓과 허위 속에서 일 만 마디의 미사여구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 크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기도하는 여러분 자신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 위에 주님이 이런 갈망을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늘이 열리고 빗줄기 같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망이 내려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여러분 자신인 것을 죄스러워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구원해 주셨을 때 되고 싶어 하셨던 그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나를 용서해 달라고 여러분들이 눈물로 부르짖는다면 여러분들의 인생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리고 여러분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습니까? 

그때는 교회가 큰 것이 이 세상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성도들의 빛나는 그 빛은 마치 밤하늘의 반딧불 같아서 그것이 모여 있을수록 찬란한 불빛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 합시다. 그리고 단순한 마음을 가집시다. 꾸밈이 없는 심정으로 주님을 대하십시다. 이 죄인처럼 깊이 용서하시고, 다시 부르시는 주님께로 돌아가 여러분들이 여기에 있어서 아름다운 사람들로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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