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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야기가 있는 신앙생활 (살전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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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신앙생활 (살전 1:5-10)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하여,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두고는 우리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영접했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 아들 곧 장차 내릴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시기를 기다리는지를, 그들은 말합니다.]

• 택하심

유럽의 관문이었던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던 바울 사도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의 중심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들어갔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지금도 그리스의 제2도시이지만 고대에도 그러했습니다. 에개해를 끼고 있는 천혜의 항구도시였고, 주전 2세기 경 로마가 만든 도로,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지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의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터키를 가로지르는 그 길이 통과하고 있었기에 데살로니가는 날로 번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곳 회당을 찾아가 석 주 동안 성경을 전거로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경건한 그리스 사람과 귀부인들이 주님을 믿게 됐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건한 그리스 사람’은 유대교의 유일신론을 받아들여, 유대인의 도덕, 가족 윤리, 공동체의 가치를 존경하고, 또 정기적으로 회당에 출석했던 사람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바울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유대인 공동체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회당 모임에 참여하면서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그 지역 토착민 사이에 완충역할을 하고, 물질적 후원자 역할도 했던 그들을 잃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손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유대인들은 깡패들을 동원하고 군중을 선동해 바울 일행을 쫓아내려 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머물던 야손의 집에 몰려갔지만 사도 일행은 이미 몸을 피한 뒤였습니다. 분에 못 이긴 그들은 집주인인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관원들에게 끌고 가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을 소란스럽게 한 그 사람들’(The people who have been the whole world upside down)이라며 고발했습니다. 기존질서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한술 더 떠서 “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한다”(행17:7b)고 말합니다. 

나중에 야손과 다른 신도들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씨앗은 데살로니가에 심겨지는 순간 동사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신도들은 어둠을 이용해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데살로니가에 머문 시간은 겨우 3주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초조했습니다. 자신의 수고가 허사로 돌아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후 데살로니가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있다는 소식이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감사의 심정이 북받쳐 올랐을 겁니다. 

어쩌면 이때의 경험이 바울을 내적으로 든든히 세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사도에게 기쁨과 보람은 물론, 복음을 전할 용기를 안겨준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이 짤막한 서신에서 세 번씩이나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2b)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2:13)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때문에 누리는 모든 기쁨을 두고, 여러분을 생각해서, 하나님께 어떠한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3:9)

목회자인 제게 이 말씀은 특히 가슴 저릿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도들 가운데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목회자, 여러분 때문에 누리는 기쁨이 크다고 말하는 목회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목회자를 만난 신도들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 본받음

인생은 만남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우리 인생을 결정합니다. 우리 내면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만남도 있지만, 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는 만남도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그 때부터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다”고 고백합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를 만난 제자들이 그러했고, 다마스커스 길에서 빛 가운데 계신 주님을 만난 바울이 그랬고, 우리들도 그랬습니다. 

바울 사도는 감사함으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단 석 주에 지나지 않았지만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고, 신자들도 혼신의 힘을 다해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 만남은 짧았지만 강렬했습니다. 그 만남은 첫키스의 추억처럼 그들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았습니다. 바울은 말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습니다. 이 대목을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렇게 옮겼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살았는지 주의 깊게 보았고, 여러분 자신도 우리처럼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사도들은 ‘삶이 곧 메시지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을 통해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느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 어떠한지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삶의 다른 차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때로는 고난의 가시밭길도 걸어야 합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이들은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하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고후6:14) 세상은 지향이 분명한 사람, 입장이 분명한 사람,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을 보고 융통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유연하게 사고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삶의 원칙을 지키는 일에는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사자, 어린양, 물고기이지 카멜레온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의 변혁자가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대신 번영의 복음으로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합니다.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로 인도합니다. 그 길은 쾌적하고 기분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이르는 길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기어코 예수의 정신을 따르려는 이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은 제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협합니다. 

하지만 위협은 한사코 피하려 하는 이들에게는 큰 힘을 발휘하지만, 담대하게 맞닥뜨리는 이들에게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지난달에 돌아가신 인권변호사 이돈명 선생님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그는 5공화국 시절 중정 지하실에 갇혀 갖은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살기에 찬 수사관이 윽박지르고 구타를 하는 상황에서 그는 뜬금없이 수사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머리에 염색했지?” 이런 사람을 어떻게 길들일 수 있겠습니까?

며칠 전 신문에서 40대 중반의 김영식 목사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부담임으로 일하던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교체되면서 쫓겨났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쫓겨난 자리에 서보니 비로소 예수의 벗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울역과 영등포역 근처에 있는 노숙인들을 찾아가 이야기도 나누고 필요한 것도 나눠주고 예수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맞기도 많이 맞았습니다. 잠잘 자리를 침범했다고 맞고 거치적거린다고 맞았습니다. 음식을 사주면 ‘돈 지랄한다’고 때리고, ‘딴 마음 있어서 이러는 거 아니냐’며 때리고, 맞으면서도 웃는다고 또 때렸습니다.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그래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 자리야말로 그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이 안일한 저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편안하게 목회할 때는 배가 불렀지만 영혼이 메말랐던 것 같아요. 지금에서야 예수님의 사랑이 뭔지 알 것 같고, 비로소 목회자가 된 것 같아요.”(국민일보, 2011년 2월 10일자, 35면) 

• 기쁨 그리고 기다림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얻을까요?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성령의 위로와 교통이 있었기에 그들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마5:10, 11)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믿음을 지켰고,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기다림입니다. 그들은 장차 내릴 진노에서 건져 주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10).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요한은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라면서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는다”(요일2:17)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세상에 대한 허망한 집착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물론 정도가 지나쳐서 하던 일을 다 그만 두고 주님만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여 염세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가치에 얽매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이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 믿음의 귀감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의 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다른 지역 교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진정을 담아 그들을 칭찬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8)

꽃향기가 저절로 퍼지듯 소문은 저절로 나는 법입니다. 아름다운 번짐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떤 면이 그렇게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것일까요? 교회의 의례나 활동 프로그램 때문은 아닐 겁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변화된 사람 말입니다. 우리는 변화의 과정 중에 있습니다. 애벌레가 고치가 되고, 고치가 나비가 되듯 탈피탈각을 거듭할 때 우리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실존의 목표는 예수적인 존재가 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가슴에 모실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됩니다. 바로 그가 철든 신앙인입니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은 반대입니다. 죽어야 변합니다. 나에 대해 죽지 않으면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변화된 그들의 모습을 바울은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가 그것입니다. 믿음의 행위란 먼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중심에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비끄러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또한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말 사전은 사랑을 ‘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의 움직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행위를 뜻합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빠질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돈만 내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 수 있습니다. 시간을 내고, 몸으로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입니다. 소망의 인내는 앞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끈질기게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변화된 사람 혹은 변화된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의 가슴에도 뜨거운 감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부산에 계신 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을 읽었습니다. 여러 해 전 교동 섬에서 목회할 때, 설날이 되어 청년들이 세배를 하러 왔더랍니다. 눈이 부어있어서 무슨 사연이 있는가 싶어 물었더니,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지 못한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우시면서 이제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살겠다고 하셔서 온 가족이 함께 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서순종 장로님이십니다. 이분은 교동의 교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분으로 신앙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도 믿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어떻게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했는지 사람들이 보고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책상머리에 명실상부名實相符,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이름과 실제가 어긋나지 않는 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거짓이 아닌 교회를 이루고 싶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들 각 사람의 변화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바꾸려니 힘만 듭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교회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의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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