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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를 생각하는 인간, 관계를 생각하시는 하나님(2) (눅 15:25-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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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생각하는 인간, 관계를 생각하시는 하나님(2) (눅 15:25-32)


네덜란드에 바다로부터 육지를 보호하는 제방에 구멍이 뚫려서 물이 새는 것을 어느 소년이 발견하고 밤새 그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서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과연 물이 샐 정도로 구멍이 났다면 사람 손가락으로 막는다고 그 둑을 지킬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마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고 수호하는 것은 그 네덜란드 소년이 손가락으로 제방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둑을 압박하는 압력이 너무 거셉니다. 그리고 둑을 막으려는 힘은 나약하게 보입니다. 이 둑이 무너질 수 있다고 봅니다. 아마 이미 무너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대내외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외부에서도 그렇고 내부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먼저 외부로부터 오는 압력이 무엇이냐. 믿음만 있으면 뭘 하느냐. 행위를 보이라는 압력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순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고 안티기독교 감정에 편승한 비판이기도 하고 신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반발이기도 합니다. 말로만 믿지 말고 행동을 보이라는 요구이고 특별히 재정적인 기부를 통해서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다른 헌신이나 봉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재정적인 기부만을 인정하고 그것만을 알아주고 그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돈 문제입니다. 그래서 요즘 언론을 타는 사람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재산을 기부한 사람들입니다. 환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무개가 어디에 얼마를 기부했다더라, 그럴 때 사람들이 그를 칭송합니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계는 이러한 외부의 압력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제는 순수한 마음으로 남들 모르게 하는 선행은 소용이 없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선행을 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돼버렸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의를 행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의도적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의를 행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서, 외부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에는 위선적인 면이 불가피해 졌습니다. 하나의 쇼가 됐습니다. PR작업이 되버렸습니다. 일부러 나팔을 불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압력만 있는 게 아니고 내면의 압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건 무엇이냐면 교회 내부의 비판을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 내면의 의구심입니다. 우리 자신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래가지고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이것은 죄의식 반, 의심 반, 세상의 영향 반이 섞여서 발생한 것입니다. 이 압력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면 우피 골드버그가 엄청난 액수의 수표를 수녀님에게 기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인은 사실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패트릭 스웨이지의 성화에 못 이겨서 우피 골드버그가 수표를 기부하는데 그 다음에 패트릭 스웨이지가 하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당신은 이제 천국에 간다. You go to heaven.’ 돈을 기부한 다음에 당신은 이제 천국에 간다, 미국의 기독교 문화에서 만든 영화에도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으니 말 다했지요. 이것이 여론적인 복음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대세입니다.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선행도 아무 선행이 아니고 돈을 기부하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다는 얘기입니다. 

도대체 얼마를 기부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얼마를 기부하면 죄사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 미니멈이 얼마입니까. 반입니까, 전부입니까, 10입니까. 액수가 중요한 것입니까,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까. 누가 그것을 판단한다는 얘기입니까. 제가 딴지를 거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상에 대해서 성경말씀에 의거해서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도 의롭고 거룩한 분이 없어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닮고자 합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많은 선을 행하셨지만 돈을 기부하셨다는 구절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많은 선을 행하셨지만 물질을 기부하셨다는 성경구절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의외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예수님이 무소유로 살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예수님이 가난했기 때문이 그런 게 아니었겠느냐, 예수님은 물질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돈을 기부할 수 없지 않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다 맞는 지적이에요. 예수님은 무소유의 삶을 사시고 물질에 연연해하지 않으시고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기부할 돈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원칙이 있는데 그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여기에 예수님이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착한 일, 예수님이 행하신 착한 일은 어떤 일을 말하느냐.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신 일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역이요 영적인 사역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영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분부의 말씀을 보면 그것을 지상명령이라고 하는데 다른 분부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고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 이것은 복음적이고 영적인 사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온 천하에 다니며 구제하라 이런 말씀하지 않으셨고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자선단체를 만들라 이런 말씀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적어도 초점이 거기에 있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착한 일이나 교회에 분부하신 마지막 명령은 세상이 칭송하는 행위는 아닙니다. 세상이 그런 것을 좋아한다거나 환영한다거나 인정한다거나 그런 일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싫어합니다. 반발합니다. 세상이 유일하게 알아주고 인정하는 일은 돈을 주는 일입니다. 돈을 기부하는 일. 영적인 일은 이해하지 못하고 물질적인 것만을 봅니다. 그게 세상의 성향이에요. 

구제 기부 이런 것을 제가 원치 않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잘 새겨들으셔야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굴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것은 네덜란드 제방의 물이 새는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과 같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만일 물질을 기부하는 행위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착하고 의로운 행위라면 오늘날 세상에서 제일 의로운 사람은 빌 게이츠와 워런 버펫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행을 액수나 규모 면에서 매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규모에 있어서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굳이 교회를 다닐 필요 없습니다. 굳이 믿음을 배우려고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하나님도 기뻐하시겠지요. 결국 이게 결론이라는 얘기입니까. 머니. 이게 결론이라는 얘기입니까. 

이 시대 최고의 의인은 재벌과 대기업이라는 얘기입니까. 뭔가 이상한 결론을 낳지 않습니까. 이 같은 사상은 오천년 정신문명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유물론적인 발상입니다. 그리고 행위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말씀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의 진리에요. 행함이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믿음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나니’ 

오늘 이 탕자의 비유를 읽어보면 모두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아버지와 탕자와 탕자의 형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탕자에게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그 형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탕자는 탕자대로 아버지를 떠나고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자신의 유산을 탕진해 버린 것이 문제이지만 그 형은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그동안 성실하게 일한 것이 문제가 됐어요. 그게 왜 문제냐.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닌데 형은 그것을 자기의 의로움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것 때문에 자기가 더 의롭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공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공로 없는 동생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그를 맞아주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대하여 분노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그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29절에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말대답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그 탕자가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탕진한 것은 맞지만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다는 성경 기록은 없어요. 이건 형이 말하는 것입니다. 

형이 생각하기를 동생이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본인이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지도 몰라요. 본인이 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못했어요. 그래서 동생이 허랑방탕하게 산 것을 당연히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를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탕자든 그의 형이든 한 가지 공통점은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았다는 사실이에요. 탕자는 탕자대로 내가 잘못 행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한다고 생각했고 형은 형대로 자신의 행위 때문에 자기는 더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둘 다 아버지 보시기에는 그들의 행위보다도 아들이라는 사실이 우선된다는 것을 몰랐어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탕자도 아들이고 형도 아들이에요. 이 관계가 그들의 잘잘못보다도 우선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잘못했다고 해서 아들이 아닌 게 아니고 형이 그동안 잘했다고 해서 더 아들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들이라는 사실은 다른 어떤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자 없으리라고 했는데 잘한 것이든 잘못한 것이든 물론 기쁨으로 사랑할 수도 있고 슬픔으로 사랑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사랑은 사랑입니다. 잘난 아들이든 못난 아들이든 아들입니다. 그게 먼저에요. 행위는 그 다음이에요. 행위가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관계를 더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형도 이해하지 못하고 탕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이 두 아들 모두에게서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이 탕자의 주제곡이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저 흉악한 죄에 빠져서 그 은혜를 잊었네’ 이게 탕자의 주제곡입니다. 그 형에게도 주제곡이 있습니다.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쉼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이게 형의 주제곡이 되어야 됩니다. 내가 공을 많이 세우지만 그것으로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구속 못할 죄인을 속하시는 분은 예수님 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 비유를 말했다면 무효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유효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탕자는 죄인을 뜻하고 형은 바리새인을 뜻하고 아버지는 하나님을 뜻하는데 예수님은 등장하지 않아요. 그럼 예수님이 어디 계시느냐. 예수님이 이 비유를 전하신 겁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탕자의 행위가 없기 때문에 아들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형의 행위가 많기 때문에 더 아들인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관계를 우선으로 보십니다. 이것은 이미 아들이 된 사람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마는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는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에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아들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탕자는 탕자대로 형은 형대로 잘못 생각합니다. 바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버지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이쪽에 치우치지 않으면 저쪽에 치우칩니다. 탕자를 닮거나 형을 닮습니다. 오늘도 그렇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에요.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입장만이 복음을 반영합니다. 아버지만이 옳습니다.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예수님이 홀로 죄인을 구속하시고 아버지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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