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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접촉점을 얻은 후(2) : 삶의 회복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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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점을 얻은 후(2) : 삶의 회복 (막 5:25-34)  


저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만 해도 제 신앙이 꽤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등학생이었을 때 이미 목사가 되겠다고 헌신했었고 나름대로 신앙적인 열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학에 진학해서 1학년 철학 수업 시간에 읽은 책 한 권이 제 믿음을 일시적으로 허물어뜨린 적이 있습니다. 니체라는 사람이 쓴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는 뭔가 묘하게 제 마음을 끄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알지 못했지만 제 속에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많은 욕망과 아픔과 열등감과 두려움이 남아 있었고, 바로 이러한 부분에 니체의 글이 강하게 어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로 하여금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저항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지도 필요하고 열정도 필요합니다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신앙이 우리 삶의 전반에 있어서 반석처럼 자리를 잡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정리해야 될 부분들이 많이 있고 그것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정직함을 필요로 하고 성령의 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진행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물에다 소금을 타면 소금이 녹으면서 물 전체에 스며듭니다. 그래서 소금물이 됩니다. 그러나 소금물이 되었다고 해서 그 물의 성분 자체가 변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나트륨이라는 성분과 염화물을 합치면 화학작용이 일어나서 염화나트륨이라는 새로운 성분이 됩니다. 그게 바로 소금이 아닙니까. 

신앙이 우리 삶 속에 들어오는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도 나와 맞춰서 변화하고 나도 내 신앙에 맞춰서 변화해서 둘 다 변화하는 영적인 화학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신앙은 내 신앙이 되고 나는 신앙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다 똑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저마다 걸어온 길이 다르고 인생의 경험이 다르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 인생의 배경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각자 자기의 환경에서 만난 하나님을 믿고 자기의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열 처녀가 신랑이 도착하기를 기다릴 때 하나의 공동의 등불을 켜지 않고 각자 자기의 등불을 가져야 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믿음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누가 나 대신 믿어줄 수가 없고 누가 나 대신 시험을 이겨줄 수가 없고 누가 나 대신 내 등불에 기름을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각자 자기의 등불을 유지해야 되고 자기의 등불에 기름을 채워야 되고 그 등불을 밝혀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러므로 내 믿음이라고 소유격을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름이 떨어진 사람은 자기의 믿음을 준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제가 제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는지 나머지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1학년을 마치고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갔을 때 저희 어머니께서 저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염려를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조기유학에 대해 신앙적으로 우려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자녀가 자기의 믿음을 소유할 때까지는 부모가 그 신앙생활을 돌봐줘야 할 필요가 있는데, 부모의 품을 떠나서 멀리 유학을 보내게 되면, 그것도 자기의 믿음을 아직 간수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떠나보내게 되면 부모의 신앙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 아이가 무엇을 배우는지, 누가 그에게 영향력을 미치는지, 그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채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자녀의 조기유학을 결정할 때 신앙적인 면을 고려하기 전에 교육을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은 어떻게 되겠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품을 떠나보낸 이후에는 이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대학을 가고, 직장을 가고, 결혼을 하면 돌아올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린아이를 조기유학 보내는 면에 있어서 신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서 얻을 것과 잃을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부모의 품을 떠나면 신앙을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아직 자기의 믿음이 없는 경우에는 세상에 얼마나 즐거운 일이 많고 세상에 얼마나 유혹이 많은데 그 시험의 장소로 떠나보내면서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보낸 것처럼 이제 누가 그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며 누가 그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이며, 주일날 교회를 빼먹을 때 누가 그것을 알고 채근할 것입니까? 만나서는 안 되는 친구를 만나고 사귀어서는 안 되는 이성을 사귀게 될 때 누가 그것을 파악하고 채근할 것입니까? 

부모는 그러므로 자녀를 키우고 양육하고 보호해야 될 부모의 고유의 의무를 일찍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필요할 때까지 쥐고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이 아이에게 세상의 가치관을 가르쳐 주기 이전에 내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믿음을 가르치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시험을 이기는 법을 가르치고, 성에 대해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내보내야 합니다. 

여러분, 교육이라는 것은 그러므로 부분적인 것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자녀를 교육시켜서 책임 있는 성숙한 인격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이 나라와 사회에 필요한 인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인데 그게 아니고 이 아이가 어떻게 하면 출세해서 돈을 많이 벌고 나처럼 살까? 물론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했습니다. 

분별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뉴스를 접하는 것도 신문만 봐서도 안 되고 방송만 들어서도 안 되고 인터넷만을 접해서도 안 되고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봐야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자녀의 교육문제나, 집의 재테크 문제나, 가정의 나아갈 바를 결정하는 모든 것을 하나의 소스만을 듣고 판단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선택해야 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야말로 정말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정보는 많지만 지혜는 누가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라는 것은 정보를 습득하는 기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인격에서 비롯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격이 갖춰질 때 지혜가 생깁니다. 

지혜는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누가 흉내낼 수 있습니까? 아기를 칼로 자르는 것은 흉내낼 수 있겠지만 그것이 그 순간에 아기에 대한 것이 아니고 어머니의 마음을 엿보려고 하는 것이었음을 누가 흉내낼 수 있었겠습니까? 지혜는 고학력이라고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울을 빼고는 대다수가 세상적인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니고데모나 율법사 같은 학자들은 그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스카우트하지 않고 별로 배운 게 없는 어부들 같은 사람들을 스카우트해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는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내가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이 겸손해지기가 힘들고, 온유해지기 힘들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가 힘들고, 자기가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기가 힘들게 됩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버리기가 힘듭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버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따라오면서 많은 변화를 요구하실 때 누구를 먼저 부르겠습니까? 별로 버릴 것이 없는 사람이 훨씬 제자 되기가 쉽고 뒤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아야 자랑스러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고 자기의 과거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예수를 좇아가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애굽에 살고 있을 때, 내가 무엇을 할 때, 내가 옛날에 어떻게 할 때..’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우리의 속도를 늦춰지게 만들고 주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앞으로 향해서 용기 있게 달려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결국은 용기로 귀착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있고,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용기가 있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데 이 용기는 뒤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얻을 수 없습니다. 로마시대가 멸망하기 시작한 조짐 중에 하나가 로마의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갈 때 얼굴에 상처를 입을까봐 함부로 달려나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얼굴이 잘 생겼는데 얼굴에 상처가 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상처 입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군인이 아닙니다. 군인들이 자기 얼굴에 상처 입을 것을 염려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기강이 상당히 무너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나라를 지킬 수도 없고 그 나라의 영광을 유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쇠락의 조짐이 그런 것을 통해서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자기의 체면 상할까 우려하고 자기의 어떤 기득권에 손상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사람들 앞에 믿음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미 교회가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이며 믿음이 쇠락하고 있다는 조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에게 받는 해라던가, 핍박을 개의치 않고 ‘나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그것은 이제 교회가 흥왕하고 있다는 조짐입니다. 믿음이 부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는 마지막에 가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미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그 조짐이 보이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조짐이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날씨는 분별하면서 왜 세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경제학자들이나 투자 전문가들이 경제를 예측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올해는 경제가 어떻고, 경제 성장률이 얼마가 될 것 같고,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유가가 올라가면 어떻게 되고 내려가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데, 돈에 대한 것은 예측하려고 하지만 정말로 이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우리의 삶의 질이 어떻게 변화하고 이 세상이 영적으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별을 해야 무엇을 할지를 알 수 있고 어디에 써야 할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투자할 곳은 하나님 나라밖에 없습니다. “너희 보화를 천국에 쌓아두라. 너희 보화가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일수록 천국에 투자하는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시간, 재능, 물질, 자기의 마음을 영원한 가치에 투자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는 사람입니다. 

제가 1학년을 마치고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갔을 때 저희 어머니께서 저의 변화에 대해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기도원에서 하는 금요기도회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마침 여름 수련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고 돌아온 고등학교 학생들이 그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기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이 고등학생들이 벌떼처럼 제 주위에 모여들어서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기도가 끝난 다음에 대표격인 어느 학생이 제 얼굴을 바라보고 밝히 웃으면서 “하나님이 당신을 참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당신이 지금 의심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의심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정말로 성령이 계시구나. 정말로 성령의 은사라는 것이 있구나. 하나님이 정말 계시구나. 성경이 진짜구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니체는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에서 제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그 때 그 기도원의 경험은 영적인 차원에서 제 믿음을 회복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그 경험 이후에 신앙에 대한 저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지적인 설득도 필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초자연적인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둘째는 사람이 아무리 잘 믿으려는 의지가 있더라도 그 내면에 본인도 잘 알지 못하는 내면의 질병이 있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의 성숙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면적인 정리와 청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저의 목회철학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병 나은 경험으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혈루병이란 병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한 번 댄 후로 나음을 얻었습니다. 십 이년 동안 그를 괴롭혔던 지긋지긋한 병으로부터 해방을 얻었습니다. 병에서 나은 다음에 예수님에게 올 때도 몰래 왔던 것처럼 떠나갈 때도 몰래 떠나가려고 했는데 예수께서 이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30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셨습니다. 32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의논이 분분합니다. 예수님이 정말 누가 당신을 만졌는지 모르셨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인데 예수께서는 정말로 누가 당신을 만졌는지 모르셨느냐? 또 어떤 이들은 ‘거봐라. 거기에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고 있지 않느냐?’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제 견해는 조금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정을 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신성을 증명하려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아셨느냐 모르셨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여인이 익명적으로 몰래 와서 치유를 받고 몰래 떠나려고 할 때 예수님이 그 사람을 붙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나았다고 그냥 가지 말고 나와 얘기하고 가라는 것입니다. ‘너는 나에게 볼일이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너에게 볼일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붙드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이 여인에게 볼일이 끝나지 않았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병은 나았지만 아직도 그의 인생에는 치유되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이 년은 오랜 세월입니다. 십이 년 동안 이 병이 지속되면서 그의 몸을 망가뜨린 것만이 아니고 그의 인생을 손상시켰습니다. 망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깊은 손상을 끼쳤습니다. 

혈루병은 부인병의 일종으로 모세율법에 의하면 환자 뿐만이 아니고 환자와 접촉한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이 년 동안 이 여인은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수밖에 없었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숨겨야 되는 은둔의 삶을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올 때 몰래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은 나았지만 아직도 그의 삶에 회복되어야 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성경은 지금 혈루증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구원을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병이 오래되면 병을 오래 앓아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병이 그 사람의 삶에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 때 늘 병을 염두에 두고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내 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내 병’이란 말을 쓰지 마십시오. 그 병은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소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병이 나에게 불청객으로 찾아왔지만 내 병은 아닙니다. “내 건강”이란 말은 쓰더라도 “내 병”이란 말은 쓰지 마십시오. 

마찬가지로 죄가 오래 지속되면 그 죄가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과 감정과 이성과 욕망과 그의 정서와 생각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것이 나고 어느 것이 죄인지를 구별하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내 성격이 원래 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원래 성격이 그런 게 아니고 죄가 들어와서 내 성격을 지배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 원래 내 성격이 소극적이고 원래 내 성격이 우울하고 원래 내가 남들에 대해 두려워하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래가 열등의식이 있는 게 아니고 원래 사람 만나기를 어려워 한 것이 아닙니다. 

죄와 세상의 악이 오랫동안 내 삶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변화한 것뿐입니다. 그것은 내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은 이후에 이제는 죄가 그 동안에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시간을 요구하고 변화를 요구하고 성령의 깊은 역사를 요구합니다. 내면적인 변화, 어려운 말로 하면 성화라고 합니다.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아직 우리에게 볼일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더 이상 익명적으로 당신을 믿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처음 예수님께 왔을 때는 그 병이 부끄러운 병이기 때문에 익명적으로 몰래 왔을 수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병을 앓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처럼 몰래 숨어서 믿는 것은 더 이상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믿음에 대해서 숨기려고 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한 것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은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너를 시인하리라.(마 10:32)”고 하셨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를 믿은 다음에 세례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첫째로 예수님이 명하셨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세례 받는 것은 공개적으로 ‘나는 이제 그리스도를 믿습니다.’하는 것을 공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몰래 지시지 않고 만민이 보는 앞에서 수난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만민 앞에서 ‘나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선포할 때 이전에 알지 못했던 영적인 담대함과 확신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이 여인이 그저 예수님의 신세를 지고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고 이제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류를 원하십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다 나음을 얻었지만 그 중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문둥병자는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예수님의 신세를 한 번 진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기의 문제가 있고 병이 있고 아픔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도 잘 믿는 사람이지만 건강하고 가정이 평탄하고 별 문제가 없는데도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 나오는 사람이 정말로 잘 믿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요한계시록 3장에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기다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쌍방 교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더불어 먹으시고 우리는 예수님으로 더불어 먹습니다. 이게 지속적인 교류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 뿐만 아니고 예수님도 이 여인을 필요로 합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는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도 그를 찾으십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붙드는 것뿐만 아니고 예수님도 이 여인을 붙들어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 때는 손에 힘이 빠질 때도 있고 손을 놓칠 때도 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실 때는 결코 그 손으로부터 우리를 빼앗아 갈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제껏 예수를 믿으시면서 여러분의 의지와 여러분의 열심히 예수님을 붙들려고 했다면 이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강한 팔로 여러분을 붙들도록 해야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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