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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접촉점을 얻은 후 (민 13: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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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점을 얻은 후 (민 13:17-33)
  

현대인들의 의식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계가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정보의 양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지식의 증가가 우리로 하여금 성경말씀을 무시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에 표류하는 사람에게는 사방이 물 천지이지만 정작 마실 물은 없는 것처럼 세상이 정보 투성이지만 정작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정보는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은 여전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싶어하고 배우고 싶어합니다. 

다만 우리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세상을 볼 수 있는 식견이 발달하고 있기 때문에 덮어놓고 믿는다던가 맹목적으로 믿는 식의 신앙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식의 전도 방법이 비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거부감을 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차근차근 잘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기를 원합니다. 

찬송가 236장 가사 대로입니다. “아침에 이슬방울 쉬 사라짐같이 내 기억 부족하여 늘 잊기 쉬우니 잘 알아듣기 쉽게 늘 말해주시오. 날 구속하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그 뿐만이 아니고, 현대인들은 영적인 것에도 목말라 합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어질 줄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이 설명해줄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이 우리 삶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돌배개를 자고 잘 때 꿈에 하늘과 땅 사이에 사닥다리를 본 것도, 도마가 예수님의 손에 못자국을 만져본 것과 같은 경험을 하기를 원합니다. 다만 현대인들은 인위적인 것이나 쇼맨쉽이 없는 진정한 영적체험을 원합니다. 어떤 기도원에서는 방언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나오라고 해서는 ‘할렐루야’를 빨리 반복하라고 요구하고는 말을 더듬게 되면 드디어 방언이 터졌다고 말하는데, 물론 그런 식으로 방언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강요하지도 않고 포장하지도 않은 진정한 영적 체험,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원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요란한 선전이나 화려한 포장보다는 진정한 열매로서 신앙이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다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보다는 별 능력은 없어 보이더라도 도덕적으로 깨끗한 그리스도인을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명한 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결함이 세간에 노출될 때 실망하며 근심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본인이 직접 타보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퀴가 두 개밖에 없는데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서서 갈 수 있느냐? 이것은 직접 타봐야 압니다. 그래서 자전거가 계속 움직이는 한은 바퀴가 두 개밖에 없지만 넘어지지 않고 서서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을 타봐야 납득할 수 있는 것처럼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은 신앙으로 사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에게 우리 인생을 맡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는 직접 믿어보기 전에는 납득할 수 없는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No"라고 말씀하셨다>는 글이 있습니다. 내용이 참 좋고 오늘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성경구절과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소개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내 교만을 없애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No”라고 말씀하시며 교만은 당신이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포기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에게 인내를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인내는 고난의 산물이며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네가 스스로 얻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에게 행복을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No”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은 은총을 주시지만 행복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에게 내 영혼을 성숙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No”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은 네 가지를 쳐줄 수 있지만 성장은 네가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에게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만큼 내가 남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네가 그 생각을 했구나.’라며 기뻐하셨다.“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는 몇 주 동안에 믿음의 접촉점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접촉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주신다고 배웠습니다. 때로는 인생의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때로는 애물단지와 같은 우리의 자녀를 통해서, 때로는 먼저 믿은 우리의 배우자를 통해서, 성경말씀과 교회와 성령을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접촉점은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입니다. 접촉점을 얻은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볼 것 같으면, 씨 뿌리는 자가 들에 나가서 씨를 뿌렸다고 했습니다. 사방에 골고루 씨를 뿌렸습니다. 사방에 씨앗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는 씨가 말라버린 곳도 있고, 씨가 새에게 먹혀 버린 곳도 있고, 어떤 곳에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둔 데도 있다고 했습니다. 

씨는 똑같습니다. 뿌리는 사람도 골고루 뿌렸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까? 땅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토양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씨를 뿌렸지만 어떤 땅은 메말라 버리고 어떤 땅은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골고루 주시지만 그 은혜를 사용해서 행복을 만들고 열매를 만들고 큰 역사를 이루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린 글에도 하나님이 ‘No'라고 대답하시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이 아니고 내가 해야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월급을 받는 사람 중에도 그 월급을 가지고 돈을 저축하고 남에게 빌려주고 베푸는 사람이 있고, 그 월급을 가지고 불평하고 빚을 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같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더라도 불평하고 원망하고 다투는 집이 있고, 감사하고 화목하게 사는 집이 있습니다.  김진홍 목사님의 책을 읽어보니까, 철거민들을 이끌고 간척지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땅을 가정마다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보니까 그 땅을 불리는 사람이 있고 땅을 다 팔아먹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평하게 분배한다고 해서 공평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마 이의를 제기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 성경에도 달란트 비유를 보면 하나님이 누구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누구에게는 세 달란트, 누구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공평하냐?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적인 음악가의 재능을 주실 때도 있고 음치를 만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달란트를 주시고, 얼마를 주셨든 간에 그 자체가 우리의 행복이나 성공이나 성숙이나 열매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우리가 가지고 노력하고 충성해야 된다는 점에 있어서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나, 그 달란트를 사용해서 불려야 될 책임은 공평합니다. 

하나님은 이 원리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와 똑같이 말씀으로 사셔야하고, 시험을 믿음으로 물리치셔야 하고, 기다려야 하고, 온유해야 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이 원리로부터 면제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이것을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모든 의를 이루어야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좀 길기는 하지만 오늘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것을 잘 설명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다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열 두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미리 보내서 그 땅을 탐지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시험입니다. 그냥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먼저 한 가지 과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열 두 명이 그 땅을 탐지하고 나서 포도를 장대에 매고 와서 보고를 하는데, 27절 말씀을 보면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 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주문하지도 않은 2절을 불렀습니다. 

28절에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여러분이 아마 이미 들어보신 구절일 것입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명만이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소위“minority report" 소수의 보고. 열 두명 중에 열 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두 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열 두 명 뿐만 아니고 열 두 지파와 모든 히브리 백성이 다 동일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 두 명중에서 열 명은 그 약속을 본인들의 믿음과 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약속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하는 사건입니다. 이들이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누가 책임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했습니까, 하나님이 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이들을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이들을 차별했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왜 슬피 울며 이를 갑니까? 그 때 가서 비로소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살 때 얼마나 내 생각이 잘못 되었느냐?’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즉시 그대로 그 약속을 얻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각자 믿음으로 그것을 소유하고 확신하는 과정을 중간에 거치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당락이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되고 우리의 기도를 바꿔야 됩니다. 이미 받은 것으로 족합니다. 이미 주신 데에 해답이 있습니다. 이미 주신 것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거기에서 성공과 행복과 응답이 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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