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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위대한 일 이 땅에 (눅 24:49, 행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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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위대한 일 이 땅에 (눅 24:49, 행 1:4-5)


I. 사세특밤

지난주간 교계 모 잡지 기자와 인터뷰를 한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 목회를 하는 동안, 그리고 오늘의 한소망교회가 있기까지 가장 어려웠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서슴없이 “지금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교인들이 새성전에 입당한 바로 지금 방만할 수 있고 충성, 헌신하지 않을 수 있고, 전도하지 않고 나태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지금 이 순간에 가장 큰 영적 위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마침 제 응접실에 걸려있는 성화 두 점을 질문한 기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한 점은 교회와 온 우주를 지휘하시는 컨닥터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주인, 교회의 지휘자는 목사도 교인도 아닌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림은 성전에서 시험 당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힘든 광야생활에서도 시험당할 수 있지만 잘 지은 성전에서도 시험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 지금이야말로 우리교우들이 더욱 성령을 의지해야 할 때입니다. 
• 더욱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 더욱 겸손해야 할 때입니다. 
• 더욱 사랑해야 할 때입니다. 
• 더 많이 경건생활에 힘써야 할 때입니다. 

한국교회는 120년 짤막한 선교역사속에서 가장 큰 부흥을 이룬 멋진 교회입니다. 한국 땅에 뿌리깊은 전통 종교들이 있었지만 기독교는 세계가 놀랄만큼 잘 성장해 왔습니다. 한국기독교가 정상에 서 있는 지금 정작 한국교회는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일일이 언급하고 나열하기 조차 싫을만큼 그 위기는 지도자로부터 평신도, 큰교회로부터 작은교회, 성도들의 교회생활로부터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외적인 위기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기승을 부리는 이단 집단들, 진보정당에서는 동성애를 인정하자는 동성애 차별 금지법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최근에는 “수쿠크법”이라고 하여 이슬람자금을 도입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준비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 자금은 이슬람 포교, 테러 자금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가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기대 그 이상의 아름다운 삶”이란 주제로 “사순절 세이레 특별한 밤” 이름하여 「사세특밤」 선포주일을 갖습니다. 
4월 3일부터 3주간 동안 매일 밤 성경말씀을 듣는 사경회와 함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가정과 자녀를 위해,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는 대부흥집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초청된 사경회 강사들을 집회순서 순으로 불러보면 

김의식 목사님, 김양재 목사님, 황경애 사모님, 이찬수 목사님, 김형민 목사님
김형준 목사님, 홍성욱 목사님, 박종순 목사님, 김은호 목사님, 김병삼 목사님
이병욱 장로님, 이성희 목사님, 정태기 목사님, 황성은 목사님, 김인중 목사님 
이삭 선교사님, 황수관 장로님  등입니다. 

이 기간동안 장년교우로부터 어린이까지 3주간동안 매일밤 집회에 100% 참석 개근하여 은혜와 기도응답, 기적체험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밤 가족과 이웃, 친척과 VIP들을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세상과 교회가 비록 맘에 안들어도 누구를 비판하지도 말고 큰일 났다고 낙심하지도 마십시다. 우리가 먼저 변화하면 됩니다. 이번 「사세특밤」 사경회를 통해 그 옛날 평양에서 일어났던 대부흥과 큰 회개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교회와 이 도시, 그리고 한국교회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 큰 기도의 부흥과 기적의 역사를
- 큰 성령의 폭발과 능력 체험의 기회를
- 복음의 큰 물결을 기대하십시다. 

II. 실패한 제자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참 이해가 안되는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 교회의 교인이요 동역자라 할 수 있는 12제자들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과연 인간은 변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뿔뿔히 다 흩어졌고 수제자 베드로 마져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목숨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많이 들었고 많이 보았고 많이 깨닫기도 하고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무력하기만 했던 것일까?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죄지으면서 좋을리야 없습니다. 죄도 싫고 죄짓고 사는 자신도 싫습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끊어지지 않는 것일까? 예수님 닮은 향기로운 성품으로 살고 싶은데 왜 내 속엔 더러운 냄새만 나고 분노와 가시 엉겅키만 자라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까? 사랑해야 할 줄 몰라서 사랑이 안되는 것입니까?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미워하고 사는 것입니까?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충성이 안되는 겁니까? 뻔히 끊어야 할 줄 알고 있는데 왜 안 끊어집니까? 능력이 안 따라 줍니다. 문제는 실천의 능력, 삶의 능력입니다. 

냉장고도 에어컨도 설치해 놓았습니다. 온갖 가전 제품을 들여다 놓았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성령의 능력에 연결되지 않으면 안다는 것조차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오래 믿었다는 것조차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보십시오.
성령님이 제자 공동체 가운데 임하자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 비겁했던 제자들에게 신령한 용기가 넘쳤습니다. 
• 하나님 외에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그들을 가두지 못했습니다. 
• 유대주의의 전통도, 민족주의도 그들을 가두지 못했습니다. 
• 성령의 임재와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 나라 복음은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 -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자를 고치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는 능력이 바로 자신의 사역이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한14:12)는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했고 현실로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III.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조화

그러면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실패한 것이고 성령님의 사역만 성공한 것이냐 라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말씀 사역은 필요 없고 성령 사역만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복음서는 의미가 없고 사도행전만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24:49 말씀과 사도행전 1:4-5 말씀은 같은 내용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의사 누가입니다. 

누가 신학에 있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뗄려야 뗄 수가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책은 서로 전편과 후편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편인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 그분의 가르치심과 죽으심,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후편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임하심과 교회의 탄생 그리고 그 교회와 사역자들을 통해 성령님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펼쳐 가시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런점에서 사도행전은 곧 성령행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흔히 말씀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오직 말씀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 가운데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체험이나 기적만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험 천만한 일입니다.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지 않듯이 성령님은 말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올바른 신앙은 예수님 사역과 성령님 사역의 조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균형, 말씀과 성령의 일치... 균형과 조화의 신앙입니다.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누가복음24:49)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사도행전1:4-5)

IV. 황홀한 새 부흥을 기다리며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던 주의 제자들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100년전 평양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폭발된 성령운동은 무디의 부흥운동으로 시작된 세계적인 성령 운동의 하나였습니다. 그 후 1903년~4년 웨일즈 지방에서 커다란 성령운동이 일어납니다. 여러 교회에서 성령의 은사, 치유와 회복, 기도와 찬양의 폭발 그리고 많은 불신자들이 교회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인도 카시아 지방의 교회들은 웨일즈의 성령운동이 인도에서도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기도합니다. 어른들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 아이들이 환상중에 지옥불을 보고 예수님께 피했다고 간증했습니다. 기도 중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전도하므로 술주정뱅이 마을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로 D.L. 무디의 부흥운동, 웨일즈 지방과 인도 카시아 지방의 성령운동의 영향으로 한국 땅에서 성령의 바람이 일기 시작합니다. 1903년 원산에서 기도운동, 성경 공부운동이 펼쳐집니다. 여기서 R.A. Hardie 선교사님은 수년간 선교활동을 별였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을 통회 자복합니다. 선교사로 교만하게 살았던 일 그리고 한국민족을 무시한 죄를 회개했습니다. 하디 선교사의 고백과 설교는 큰 부흥의 불씨가 됩니다. 너도 나도 “나 때문입니다. 내 탓 이로소이다. 제가 먼저 회개합니다”를 부르짖었습니다. 

1906년 평양과 서울에서 성령세례 갈구 기도가 열립니다. 여기서 강사로 나선 선교사님이 세계도처에서 지금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고 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누가 성령충만을 받고자 하느냐? 원하는 자는 거수하고 기립하라”고 외칠 때 당시 신학생이요 장로였던 길선주가 일어섭니다. 

바로 그 다음해 드디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와 기도회에 성령의 불이 떨어집니다. 집회때 마다 남자 성도가 1,500명 이상 모이고 여자들은 앉을 자리가 없어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습니다. 여기서 역사적인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저절로 입에서 터져나와 통성 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집회 때 마다 유교신자들, 불교도들, 무당 숭배자들이 돌아옵니다. 선교사님들은 서양 우월주의를 회개합니다. 방위량 선교사님이 설교를 마치자 한 장로님이 일어나 회개를 합니다. “나는 사탄과 맞서 싸워야 하는데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운 죄를 지었습니다. 교회의 장로이면서 형제 장로님을 미워했습니다. 주의 종 방위량 목사님을 미워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요.” 집회마다 회개의 울음바다를 이룹니다. 성도들은 저마다 훔친 돈을 돌려주고 술주정뱅이가 회개하고 미워했던 죄를 회개하고 서로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기생방 출입을 통회하는 일이 시간마다 일어났습니다. 

• 한국교회가 이전의 부흥을 새롭게 보고 싶다면 - 
• 교회들마다 영적 부흥을 원한다면 -
•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길 원한다면 - 
• 비틀거리고 허우적 거리던 성도들이 바른 삶을 살고 싶다면 -
• 사탄의 영향에 갇혀 행복을 모르고 불행한 삶을 살던 사람이 자유하는 신앙인으로 살고 싶다면 - 
  우리는 모두 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정직하고도 진지한 도전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사도행전2:37-38)

이길함 선교사님의 글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고꾸라져 울었다. 그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제가 죽을 죄인입니다.”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나의 요리사는 사람들 가운데 고꾸라져 방 건너 쪽에 있는 나에게 소리쳤다. “목사님, 내게도 희망이 있는지, 과연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눈물이 범벅이 되어 크게 부르짖었다. 때때로 회개의 고백 후에 모든 회중이 통성기도를 했다. 수백 명의 회중이 통성 기도를 하는 장관이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시 회개의 고백을 한 후에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고 우리 모두는 함께 울고 또 울었다. 그 모임은 기도와 고백과 눈물로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렇습니다. 부흥운동은 곧 회개운동입니다. 성령의 대폭발이 있기 전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하나님과 우리 공동체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영적 부흥 보기를 원한다면 먼저 회개운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살인, 첩을 둔 일,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결한 일들, 도적과 거짓, 서로 상처를 준 일을 고백했습니다. 훔친 물건을 돌려줌 등등 마을 마을을 서로 찾아다니며 회개하고 고백하느라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부정직하게 장사하여 모은 돈을 나눠주고 다녔습니다. 어떤 사람은 중국인을 대상으로 부정직하게 얻은 돈의 총액을 돌려주자 중국인이 엄청난 돈 보따리를 들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신도는 청일전쟁 때에 아기를 업고 도망하다가 무거워 빨리 갈 수 없어서 아기를 나무에 부딪혀 죽이고 혼자서 달아났던 참혹한 일을 자백했습니다. 

집회시간마다 머리를 바닥에 찢으며 몸부림하는 사람, 가슴이 뜨거워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을 뒹구는 사람, 공포와 두려움에 목놓아 울다 울다 지쳐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 그 누구도 구경꾼이 아니었고 비판자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울부짖는 회개자들이었습니다. 

이 회개의 용기가 일제 강점기 순교의 용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회개의 강물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일제 36년, 해방 후 공산당 앞에서 너도 나도 순교의 피바다에 첨벙 첨벙 뛰어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100년전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성령의 대폭발이 「사세특밤」을 통해 우리교회와 한국교회에 새롭게 일어나기를 기도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V. 기도 운동

21일동안 우리는 회개와 함께 한국땅에 성령의 임재와 기름부으심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제한했던 죄를 회개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님의 마지막 대추수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이 땅에서 타오르던 성령의 불을 새롭게 주소서. 한국교회가 성령님을 환영합니다. 인정합니다. 사모합니다. 불타는 목마름으로 사모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통일 중심도시 고양과 파주 땅에 대부흥을 기대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일산이란 말이 정발산을 일컫는다고도 하고 고봉산을 일컫는다고도 합니다. 일찍이 일산은 하나님 앞에 영적 간음을 했던 곳입니다. 무당들이 신내림을 하던 곳이요 굿판을 벌이던 곳이었습니다. 이단과 이방 종교의 사찰들이 에워싸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도시의 많은 교회들이 악한 영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개척교회들이 문을 닫고 잘 성장하던 교회들이 분리와 거역의 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을 괴롭히는 악령은 떠날찌어다. 이 도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악한 세력은 떠나갈찌어다. 이단의 영들은 사라지라. 공중의 악한 권세는 번개처럼 떨어질찌어다.”

“오 주여, 고양 땅 파주 땅에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게 하소서. 교회들마다 부흥을 보게 하소서. 잃은 영혼을 건지게 하소서. 기도의 불길이 커지게 하소서.”

나아가 비전의 기름 부으심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오, 주여, 사세특밤을 통해 잃어버린 영혼을 얻게 하소서. 한 영혼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떤 댓가라도 지불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교회가 주님의 심장 속에 있는 바로 그 교회가 되게 하시고 마지막 때 세상을 정복하는 비전이 교회들마다 넘쳐나게 하소서.”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복음화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불쌍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오늘도 핵의 위험 앞에 가련하게 노출되어 있는 한반도 - 이 땅 이 민족의 평화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일전에 한반도의 야경을 찍은 위성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전력이 남아도는 남한은 온 땅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반면, 전력 난이 심각한 북한은 평양과 원산 등 단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온통 흑암이 뒤덮여 있었습니다. 휴전선을 경계로 한반도의 이남과 이북은 너무도 확연히 달랐습니다. 야경만 그런 게 아닙니다. 휴전선 이남은 산과 들 마을과 도시가 푸른 나무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 땅은 해방 이후 우리의 산야처럼 벌거숭이가 되어 있습니다. 나무도, 전기도, 양식도, 자유도, 복음도, 하나님도 없는 저 땅을 살려내기 위해 이제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오, 하나님, 한반도가 21세기 예루살렘, 평화의 도성이 되게 하소서. 북녘 땅에도 속히 복음이 마음껏 전해지게 하소서.”

VI. 전도폭발

1907년 성령의 폭발을 경험했던 한국교회는 곧이어 전도의 열정, 구령의 열정으로 불붙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누구든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모두다 증인이 되어 살아갔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수 없는 전도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한국 땅에 와 있던 모든 선교사들은 너도나도 미친 전도자들이었습니다. 미친 듯이 복음을 전하는 그들을 보고 한국 성도들 또한 미친 전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처음부터 선교란 영혼구원에 미치지 않고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지요. 세계 선교는 미친 전도자들이 만들어낸 거룩한 사건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랍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신의 죄 없음을 증명하고 석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찬스가 될 수 있습니다. 재판이 잘못 진행되면 자신의 생명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입니까? 바울은 지금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거나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들 앞에 내가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순간 가장 긴급한 일이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예수를 전하는 일이다. 내가 석방되느냐 더 갇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누구신가? 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가? 내가 어찌하여 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복음이 무엇인가? 또박 또박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가 이해될리 없지요. 그래서 총독이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너의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같이 미치게 되기를 원하나이다”(행26:29).

오늘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똑바로 미친 목회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의 사랑에 포로가 되어 가슴에 불을 간직한 성도들을 필요로 합니다. 뜨거운 열정에 불타는 목회자, 눈물과 감격의 성도가 필요합니다. 

한국 땅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오늘 복음을 전하고 내일 죽을 사람들처럼 몸서리치는 추위와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도에 미쳐 있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안산읍 발왈 장터에서 전도를 하다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온 몸이 부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젊은이를 위해 3일을 금식기도하며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여 온 가족을 구원합니다. 

알렌 선교사는 부흥운동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자를 기적적으로 고치는 능력사역으로 확장되고 있었다고 보고 합니다. 

대구에서 활동하던 아담스 선교사는 본국에 보낸 편지 중에서 “나는 올해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최근 나는 하루에 한 교회를 세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탁월한 한국어 실력으로 사랑을 받던 젼킨(Junkin) 선교사는 추운 겨울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고 이 마을 저 마을 뛰다가 급성 폐렴에 걸려 죽었습니다.

클랙 선교사와 시릴로스 선교사는 어린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어린 아이들을 먼저 하나님 곁으로 보냅니다. 

게일 선교사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급성장하는 교회들을 돌보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의료선교사 월리엄 홀 박사를 먼저 천국에 보낸 29살 로제타 홀 사모님은 젖먹이 어린 아이와 함께 본국에 돌아가 다시 선교사로 파송 받아 한국에 옵니다. 그리고 평양 땅에 여성병원을 세워 밤낮 미친 듯이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 땅에 번창한 모습으로 우뚝 우뚝 서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전도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의 순교의 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들이 만약 예수 복음을 나의 평안과 위로, 내 가정의 안일과 축복만을 위해 존재하는 미신적 종교로 받아들였다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존재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만약 저들이 복음과 예수를 위해 담대히 피흘리는 일을 주저했더라면 오늘 한국교회는 이처럼 서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VII. 다시 부흥의 계절이

2011년 4월 사세특밤을 통하여 - 

• 그 날의 회개가 우리의 심장에서 쏟아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 그 날의 각성이 이 땅에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 그 날의 성령님이 오늘 새롭게 한국 땅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주권을 그분께 내어드립니다. 
• 그 날의 부흥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 민족을 밝히던 그 날의 빛이 새롭게 밝혀지길 소망합니다. 
• 그 날의 구령 열정이 되살아나기를 열망합니다. 

1907년 대부흥이 있었던 그 시대만큼 우리민족사에서 고통스러웠던 때는 없었습니다. 국권은 일본의 손에 통째로 넘어가고 황제는 폐위당했습니다. 나라를 살려보려던 애국지사들의 몸부림, 자결, 원수들 암살...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국민들은 허탈과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세계가 한국을 버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이 땅을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다. 

백낙준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장차 한국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집회시간마다 목이 터져라 심장이 터져라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를 불렀습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함께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죄를 고백했고 관계가 깨진 사람을 찾아가 먼저 용서를 구했습니다. 

첫째, 사세특밤 -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와 성도들이 침체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을 받고 조소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부흥이 오면 하나님이 친히 백성과 역사 가운데 오셔서 당신의 이름과 영광을 회복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부흥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와 민족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둘째, 사세특밤 - 온 교회 안에 통회하고 자복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친히 뵙기엔 너무나 부족하고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애통하게 됩니다. 아주사 부흥의 선구자 프랭크 바틀맨은 “부흥의 높이는 회개의 깊이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회개를 하고 나면 정죄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강하게 확신하고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전해야지 하는 구령의 열정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셋째, 사세특밤 - 이 도시에 능력이 나타나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변화되고 그 영향력은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그들이 기쁨으로 교회에 찾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부흥은 한국교회에 사도행전적 능력과 영향력이 회복되는 바로 그것입니다. 

넷째, 사세특밤 - 모든 사람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그분을 구하는 갈망이 커지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구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납니다. 

“당신의 은혜나 능력이나 선물 이전에 하나님 당신 자신을 구합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그리고 나면 여러분의 모든 문제와 가정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흥을 구하는 것 보다 더 긴급한 것이 있습니다. 
부흥을 주시는 그분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기대 그 이상의 멋진 부흥을 우리에게 주소서.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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