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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 궁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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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14절-18절: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멸망의 가증한 것.’ 먹고 마시고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은 아무리 좋아도 전부는 이용물 활용물 사용물이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살아나가는데 전부는 이용 사용 활용물이다. 기독교인 같으면 나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가는 일에,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일에 사용 활용 이용물인데 그것을 사람을 위해 그렇게 쓰지 않고 모아놓고 재워놓고, 지금으로 말하면 돈은 도느니만큼 나라가 잘 돌아가는 건데 자기 노후대책을 위해 은행에 집어넣고 있으면 그 돈이 안 도느니만큼 결과적으로 자기에게는 손해다.


돈은 돌게 만들어야 한다. 안 돌면 너도 나도 다 스톱이다. 없는 사람은 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없는 사람이 어려움을 겪게 되면 돈이 있는 사람은 잘 사느냐? 아니다. 폭동이 나면 먼저 죽는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 또 어느 나라 국가의 사람도 알고 보면 축소시키고 축소시키고 축소시키면 자기라는 사람이다. 자기라고 하는 사람이 손발이 잘 활동이 되도록 움직이지 않고 서로 난 안 하겠다고 하며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다 못쓰게 된다.


지구 나이가 몇 억 만년이라고 해도, 어쨌든 언제 만들어졌던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우리 몸과 똑같다. 오대양 육대주하고 우리 몸의 오장육부와 같다. 우리 몸에 물이 70%인가? 그리고 지구는 살아있는데, 그래서 땅속에서 불덩어리가 올라와서 섬을 만들고 한다. 이걸 보며 인간들이야 ‘진화론이니 어쩌니’ 해도 어쨌든 지구는 살아있다.


토네이도가 불던 해일이 일어나던 알고 보면 전부는 지구를 살리려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다. 하나님께서 지구를 살리려니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 것인데 그 바람에 인간이 죽어나는 거다. 알고 보면 그 죽을 일들은 인간들이 물질과 돈을 위해 지구를 더럽혔기 때문에 온 것이다. 중국에서 모래가 날아오는 것도 알고 보면 지구를 살리려는 방편이다. 그 바람에 인간이 야단이 나는 거다.


우리나라만 봐도 골프장을 만든다고 산을 깎고 깎고 하는데 산의 나무로 인해서 바다로부터 오는 바람이 어떻게 돌아서 인간이 살도록 돼 있는 건데 이 산을 자꾸 깎아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냐? 토지개발도 어느 정도가 있는 거다.


인간은 ‘돈 돈’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거지만 가만히 보면 더 크게 하나님의 주권섭리는 지구를 살리려고 하는 그런 면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자기가 지구를 못 쓰게 만들어 놓으면 인간은 그 면에 대한 재앙을 받는 거다.


자기의 정신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셔놓으면 심령천국이 된다. 거기에는 지혜도 나오고 지식도 나오고 도덕성이 능력성이 나오고, 그리고 자기를 다스림이 나오고, 자기 주위나 가정이나 이웃에게 그 관계성이 적절하게 나가게 된다. 하나님이 인간 자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자기의 창조의 목적을 알아야 하는데 그 목적을 모르게 되면 물질욕심만 갖고 있다가 하나님의 진노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거 보면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 집은 어떻게 샀느냐?’ 맨 그 얘기다. 그래서 아무리 형제지간이라도 예수 믿는 나와는 안 통한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그들의 말이 일리 있는 말이지만 예수님 앞에서 보면 그건 할 말은 아니다. 어쨌든 진리의 성도들이 끝에 가서는 승리한다는 보장이 들어가 있다.


구약성경에 노아를 봐라. 노아가 결국에는 온 지구를 다 차지했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하나님께서 너에게 다 주고 싶다는 거다. 하나님이 지구를 만들었으니까. 이것을 영적 면으로 보면 영적인 실력이 있는 자에게 신령계를 다 맡기고 싶다는 게 들어있다.


그런데 자기 힘으로 세상을 차지하려고 하면 제대로 되는 거냐? 서로가 뺏고 죽이고 하는 거다. 제 마음대로 안 되면 원망 불평하고 남 탓이고 맨 그렇다. 안 그렇다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다가 자기 정신이 병이 들고, 정신이 병이 드니 몸도 병이 들고, 그러다가 자기 스스로 죽는구나.


하나님의 정신을 가지면 자기 정신이 살아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살아난다. 그러나 세상마음을 품으면 자기는 쪼그라진다. 그러니 자기 속에 썩고 불타고 변질되고 진동되고 요동되고 바람 불면 날아갈 것을 절대로 집어넣지 말아라. 그렇게 되면 자기는 망한다. 재앙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지붕은 가정 위다. 건물 위다. 그러니까 안에 들어있는 게 아니라 위다. 아무리 집이 좋아도 자기 정신만큼은 정신 사상을 갖는 차원이 지붕 위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타를 다스릴 수가 있다. 그런데 안에 있게 되면 뭘 자꾸 채워야 하고 가지러 가야하고 넣어야 한다. 인간 자기는 물질 위에 살 자기이지 돈이 아무리 좋아도 돈 밑에 깔려 죽을 자기는 아니다.


돈 위에 있는 사람이 돈을 쓸 줄 아는 거지 돈 밑에 있으면 그 사람은 머리 위에 돈이 있기 때문에 돈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그러니 돈이 ‘죽어라’ 하면 죽고, 돈이 ‘웃어라’ 하면 웃고 그런 처절한 인생이 된다. 아무리 가난해도 돈 밑에는 들어가지 말아라. 들어가면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고 죄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돈이 생기면 제 마음대로 되는 거냐? 그렇지도 않다. 모든 차원이 돈 위에, 인격적으로 돈 위에, 성품적으로 돈 위에. 돈이 있더라도 돈 위에.


장사를 잘하는 사람은 돈을 싸놓지 않고 돈을 활용을 한다. 그래야 자꾸 커지고 불어난다. 그런데 장사하는 사람이 돈이 아깝다고 하며 시들어가는 채소를 제 값을 받겠다고 쥐고 있으면 그 사람은 장사를 못한다.


장사를 해도 사람을 위해 해야지 돈을 위해서 하면 욕심만 낸다. 장사하는 사람이 사람을 위해 장사를 하면 오늘 손해를 봐도 내일 그 손님이 다시 오게 된다. 오늘 손해 안 보려고 하다가 손님이 다 떠나간다. 목회를 하는 것도 목사가 돈에 신경을 쓰면 사람을 욕심을 부리게 된다. 사람의 주머니 속에 돈이 있으니까 사람욕심을 부린다. 욕심을 부리려니 사람을 자꾸 붙잡게 된다. 돈을 욕심 부리자니 자꾸 사람을 붙잡는 술책을 쓰게 된다.


이렇게 되면 깨닫는 건 없고 종교 행사적으로 자꾸 만들어서 사람을 붙잡는다. 쉽게 말하면 말씀을 깨닫게 해서 사람이 주님과 밀착되도록 인격적으로 돼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행사적인 걸 만들어서 재미있게만 하면 그 교회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죽는 거다. 이건 질적으로 저질이다. 교인들이 ‘와, 재미있다. 저리로 가자’ 하는 교회의 교인은 하나도 못 쓴다. 그런 교인을 믿으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전부 다 물질기준으로 사람을 보고 사귀고 한다. 그렇게 사람을 잘못 보고 선택을 해서 실패를 하고 마음에 병이 들어 있으면서도 또 물질위주로 사람을 보고 있다. 그러니 그렇게 살다가 망할 수밖에 없다. 그게 처절하고 불쌍한 거다. 항상 시간에 좇기고 온 세상 걱정 근심은 자기가 다 하고 있고. 그거 어떻게 살겠느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고, 시간 속에 살면서 사람이 여유성이 없다.


‘지붕 위에.’ 물질 위에. 인간 자기는 물질 밑에 깔리면 깔려 죽는다. 물질 위에서 물질을 통치 지배하며 살아야 한다. 물질에 욕심이 나서 가지러 가지 말라. 그럴 새가 없다.


‘밭에 있는 자.’ 말씀의 밭에서 일을 한다면 앞으로만 가며 보화를 캐내고 해야지 왜 성경을 보면서 뒤를 쳐다보고 부자에 꿈을 꾸고 하느냐? 이건 뒤로 돌이키는 것이다. 뒤로 돌이키면 그 시간만큼은 앞으로 못 간다.


‘그 날에는.’ 심판의 날, 형벌의 날이다.


‘아이 밴 자들과.’ 앞에서 말한 세상 소원 목적을 자기 속에 담고 있으면 이건 아이를 밴 것이다. 왜 아이라고 하느냐 하면 아이가 들어있으면 자기 배에서 점점 커진다.


‘젖먹이는 자들.’ 젖을 먹이는 것은 가르치는 것. 가르쳐서 비진리 운동을 하는 것. 즉 예수 믿으면서 세상적으로 믿게 만드는 것.


‘화가 있다.’ 재앙이 있다.


18절: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6. 25를 겪은 사람을 알 것이다. 만일 이 전쟁이 12월에 일어났다면 어찌 될까? 폭탄에 맞아죽고 총알에 맞아죽고 가다가 얼어 죽고 한다. 그런 걸 생각해 봐라.


겨울에 일어나던 어느 때 일어나던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재판도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냐? 일반재판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재판장이라야 재판을 바로 하는 거다. 전쟁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되는 거다.


그런데 원칙적인 거, 변할 수 없는 것은 설교하는 게 일종의 재판이다. 그래서 설교를 할 때는 삶과 죽음, 임시와 영원, 선과 악, 밝음과 어두움이 구별이 들어가야 한다.


그 다음에 또 설교로 가나가는 게 일종의 전쟁이다. 옳지 못한 것은 죽이고 옳은 것은 살리는 전쟁이다. 이는 쇠몽둥이로 질그릇을 부수는 것과 같다. 쇠몽둥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옳음이라야 쇠몽둥이가 되는 거다. 쇠몽둥이 앞에서 이유를 걸면 그 자는 어디가 날아가도 날아가는 거다. 설교의 메시지가 ‘예수 믿어 부자 되자’ 하는 건 쇠몽둥이커녕은 부지깽이도 안 된다. 그런 소리는 안 들어도 된다. 그건 세상이 말하는 소리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이치를 바로 들어야 한다. 그 이치를 무시하면 쇠몽둥이에 질그릇이 부서지는 것과 같이 된다. 그러면 자기는 얻어맞는 거고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에 처해지는 거다. 그게 다 자기 사는 동안에 일어나는 거다.


인간이 나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있고, 전쟁이 나고 안 일어나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있고, 여름에 전쟁이 나던 겨울에 일어나던 다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있다. 그런데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은 살을 에는 듯한 하나님의 매서운 분노를 사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괘씸죄까지 더한 인정사정없는 아주 매서운 하나님의 분노를 말하는 거다. 이 말씀만 들어도 마음이 움츠러지고 두려워지는 거다.


19절: 그러니까 이 환난이 어느 정도 환난이라고 하느냐? 창세 이후로 전무후무한 환난이다. 세상 시작 이후로 그 같은 환난이 없었다. 그러니까 세상이 끝나는 환난이구나. 창세 이후로 없었다는 환난이니까 세상이 끝나는 환난이다.


이걸 지엽적 부분적으로 보면 어떤 나라가 생긴 이후로 없었던 환난을 겪는 나라도 있을 수 있고, 그러니까 전쟁을 겪으면서 그 나라가 없어져 버리는 것도 있을 수 있고,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라고 하는 인간 한 개인이 출생 이후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환난이라는 것이다. 이 환난으로 끝이다. 즉 죽음이다. 남이 죽는 것보다 자기가 죽는 것. 남 죽는 거 백 날 봐봐야 실감이 없다. 그러나 자기 죽는 것으로 들어갈 때는 마음속에서 실감이 나는 거다. 느낌적으로 다른 거다.


그러면 환난이 무엇이냐? 근심되는 재앙이 닥친 건데, 첫째는 안 믿는 사람까지 세상인간들이 다 아는 환난은 전쟁 지진 수해 흉년 질병 죽음 등등이다. 그 다음에 영적인 환난은, 신앙의 세계에서 영의 눈으로 보는 환난은 육신의 생각으로나 육신의 눈으로는 도무지 모이지 않는, 느끼지 못하는, 다만 영적인 깨달음이 있는 자만이 아는 거다.


세상에 속한 소원 목적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영적인 면을 못 느낀다. 예를 들면 노아의 여덟 식구만 빼놓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을 따라갔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은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당시에 노아의 여덟 식구만 빼놓고 모두가 가인의 길로 몰려갔다. 가인의 사상으로 몰려갔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상으로 몰려갔다. 노아의 여덟 식구만 하나님의 길로 갔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동생을 죽인 가인의 길로 몰려갔다.


그러니까 이럴 경우 가인의 길로 몰려간 사람들이 환난을 볼 줄 아는 것이냐, 노아의 여덟 식구들이 환난을 볼 줄 아는 것이냐? 노아의 식구들이다. 환난을 보는 눈이 있어야 준비를 할 수가 있다. 지금도 환난을 볼 줄 알아야 만이 앞뒤 집의 모든 교인들이 다 세상길로 몰려가도 우리 집 식구들만은 구원을 받는 식구가 될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노아 부부와 세 아들, 또 며느리가 셋이 있고 해서 여덟 식구가 말씀의 방주를 짓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가인 쪽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고 자꾸 부르고 휘파람 불고 하니 노아의 식구들이 따라갔다면 어찌 될까? 노아에게 있어서는 가인의 길로 몰려간 그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즉, 소원 목적으로 세상을 붙들고 누림성으로 살고 있는 그것이 환난이다.


노아의 세 아들이 장가를 갔는데, 며느리를 데리고 온 건 가인의 길로 가는 자들처럼 세상 누림을 위해서가 아니라 방주를 짓기 위해 데리고 온 것이다. 이 시대의 처녀 총각들도 말씀의 설계대로 방주를 지으려고 시집가고 장가가야 한다. 이게 옳은 결혼관이다. 결혼을 하려면 사람도 볼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행해야 되겠다’ 하는 것도 알고 생각을 하는 젊은이들이 가정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


소돔 고모라성은 환락이다. 롯의 처와 두 딸도 그 환락에 빠졌다. 그러니 재산 재물 물질 부요성이 롯에게는 환난이다. 그런데 롯은 고민만 하지 그 소돔 고모라성에서 식구들을 데리고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남자들이 단호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질질 끌려 다니는 건 남자상이 아니다. 남자의 상은 옳음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게 남자상이다. 이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말씀으로 이끄는 게 남자의 지도자 상이다. 말씀에 생명을 내대고 가정을 끌고 가는 게 가정의 지도자이다.


세상 전체 교회가 썩어지고 불타질 것을 하나님 자리에 놓았다면 개인이던 가정이던 이는 벌써 환난에 들어간 거다. 그러니까 전쟁이 나는 환난만 보지 말고 그런 사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부를지 바벨론을 부를지 모르는 거다. 지엽적인 개인적인 말세를 보게 하려고 개인적으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거다.


‘환난에 들어가지 않게.’ 불타질 것을, 세상 것을, 눈에 보이고 만져질 것을, 자기 누림성을, 어떤 사람을, 어떤 사업을 하나님 자리에 앉혀놨으면 그 다음에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온다. 그걸 미리 보는 눈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자기를 집어삼킬 때까지 그곳에 있지를 말아라. 실력 것 견제를 하다가 자기가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갈 때는 탈출을 하라. 안 그러면 네가 죽는다. 가정을 가진 사람은 가정이 다 죽는다.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날아 들어올지 자기는 모르는 거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병원에서는 못 고친다고 하니까 시골에 가서 살면서 고치는 걸 본다. 육신적으로도 보면 먹이 공기 오염되는 환경에서 지혜롭게 피하니까 자기 목숨이 사는 것을 본다. 그렇듯이 예수 믿는 것도 예수 믿는 정신을 가지는 것이 세상 오만 잡된 정신을 가지면 자기가 정신면에서 안 미치겠느냐? 환경이 미치고 돌아가고 있는데 거기에 소원 목적을 두면 안 미칠 수가 없다. 그러니 거룩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자기를 자꾸 정화시켜라.


세상에 있는 거는 영원히 있는 게 아니다. 자기도 지나가고 다른 사람도 다 지나가고, 영원히 있는 게 아니다. 오직 믿을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계시는 말씀, 하나님을 붙잡아라. 예수님을 붙잡으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닮는다.


20절: ‘그 날들을 감하지 않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날을 감한다.’ 그러니까 구원을 얻게 하려니 그 날을 줄인다는 거다. 예를 들어서 자기 몸이 파상풍에 걸려서 더 썩기 전에 발을 잘라야 하는데 싫다고 안 자르고 있으면 계속 먹어 들어가서 결국은 자기 생명은 죽는 거다. 더 썩기 전에 자르던지 도려내야 산다. 더 썩으면 위험하다. 그런 경우 자르는 거다. ‘그 날들을 감한다’ 하는 말을 자기 개인에게 있어서 그렇게 생각해 봐라.


그 다음에 두 번째 의미는 감염되면 다 죽는다. 감염 안 된 것은 살리고 감염이 된 것은 죽인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의미로는 그대로 두면 사람을 자꾸 해코자 할 테니 그 이상 둘 수 없고 잡아서 죽여야 하는 게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에 ‘네가 수명이 다하도록 계속 악하게 살다가 형벌을 받게 하는 것보다 너의 사는 날 수를 줄여서 구원을 얻게 해야 되겠다’ 하는 이건 앞에서 예를 들어준 것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에 어떻게 들리느냐?


성경에 영적인 면을 살리기 위해 육신을 고통 속에 집어넣는 게 있다. 하나님께서 내 영을 살리기 위해 육신을 고통에 집어넣는 거. 안 그러면 다 망한다. 육신을 고통에 집어넣어서 영을 살리고자 함이라. 이런 이치로 보면 이 말씀의 해석은 돼 들어간다. 문제는 왜 그렇게 살아야 될까? 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진노를 만들어야 되겠느냐?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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