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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은 먼 입술만의 공경 (마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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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먼 입술만의 공경 (마 15:1-9)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금년 들어 처음으로 맞이하는 포근한 주일입니다. 그 동안 계속된 매서운 추위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한 성도들도 있었는데, 이제 포근한 날씨와 함께 얼어붙은 듯 했던 우리의 마음도 다 녹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의 불로 타오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갈릴리 바다 위를 걸으시고, 게네사렛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예수님의 소문은 유대 각처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께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각종 이적을 일으키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알아보고, 책잡기 위하여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파견된 조사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가르치는데, 유대교의 전통을 무시한다 하는 소문이 자자하여, 어떻게 하든지 이를 조사하여 처벌하려고 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하면서 따져 물었습니다. 여기 장로들이란 옛사람들 즉 유대인의 조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장로들의 유전이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유전은 대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불문법이었으나, 바리새인들은 이것들에 대하여 성경이상으로 더 큰 권위를 부여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에서는 구약성경, 미쉬나, 탈무드를 경전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미쉬나가 제일 실질적인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 앞에서 계시를 받을 때에 두 종류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은 돌비에 기록된 말씀인 십계명과, 입으로 전해진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 입으로 구전되어진 말씀이 미쉬나, 즉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구전으로 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도 성문 율법에는 없는 불문법인 장로들의 유전이었습니다. 그 유전에 따르면 바깥에서 부정한 것과 접촉하여 부정하여졌을 가능성을 막기 위하여, 외출에서 돌아오거나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음식 먹을 때 위생적인 측면에서 손을 씻지만, 유대인들은 위생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정결의식으로써 먹기 전에 손을 씻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율법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기본 의도를 지적하시며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장로들의 유전에 대응하는 성문 율법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을 깨뜨리는 그들의 과오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계명보다 조상들의 유전을 더 중시하는 구체적인 실례로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고 날카롭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유대교의 전통가운데 중요한 ‘고르반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르반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법 가운데 가장 무서운 법이 부모를 봉양하는 법입니다. 부모에게 거역을 한다든지, 훼방을 한다든지, 마음 아프게 한다든지, 부모를 봉양하지 아니하면 죽였습니다. 그런데 자식들 가운데는 부모가 싫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나이가 많은데 재산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부모를 봉양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럴 때 고르반 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말합니다. “부모님 우리의 모든 재산은 모두 다 고르반 했습니다. 하나님께 다 받쳤습니다.” 이렇게 선언을 해버리면 부모 공양을 안 해도 이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섬기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께 모두 다 바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물론 일부는 바친 척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 속임수입니다. 결국 그들은 부모부양의 책임을 회피하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일부는 하나님께 바치지만, 나머지는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했던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누구든지 아바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장로들의 유전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부모보다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더 우선시되어야 하며, 만약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하여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은 일면 경건하고 또한 잘못된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는 것이 마땅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셨던 것일까요? 단지 제자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괜히 그들의 꼬투리를 잡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따랐던 장로들의 유전에는 분명히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열을 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율법에 우열을 정하여, 어느 것을 위해 다른 어느 것을 버려도 좋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 중 어느 것은 지키지 않아도 좋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율법은 어느 것 하나라도 범하면 다 범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와하기 위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큰 죄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분명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도 공경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한다면, 부모를 공경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는 인생은 짐승만도 못하다 할 것입니다. 구제역이 전국으로 확산 되면서 축산 농가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 강원도의 살 처분 현장에서, 안락사로 죽어가는 어미 소가 고통을 참으며, 죽음 직전까지 새끼 송아지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이 목격돼, 살 처분 요원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고 합니다. 어미 소를 안락사 시키기 위해 근이 완제 석시콜린을 주입하는 순간, 갓 태어난 듯한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 곁으로 다가와 젖을 달라며 보채기 시작했습니다. 

어미의 고통을 알 리 없는 송아지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살 처분 요원들의 가슴이 무거워졌다고 합니다. 소마다 약의 반응이 나타나는 시간이 다르지만, 대개 10초에서 1분 사이 숨을 거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미 소는 태연히 젖을 물리기 시작했고, 30초, 1분…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어미 소는 다리를 부르르 떨기 시작했지만,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텨냈다고 합니다. 

시간이 멈춘 듯 모두 어미 소와 송아지만 바라보고 있는데, 4-5분이 흐른 후 송아지가 젖을 떼자 어미 소는 털썩 쓰러졌고, 영문을 모르는 송아지는 어미 소 곁을 계속 맴돌았다고 합니다. 현장의 요원들은 비극적인 엄마소의 모정에 얼굴을 돌린 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모성애는 인간이나 동물들에게 지극한 것입니다. 자식들은 이렇듯 지극한 부모의 은공을 입은 자들인데, 그 부모의 은혜를 모르고 홀대한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일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하나님께서 사람들 간에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눈에 보이는 부모조차도 공경하지 못하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또한 부모님을 잘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부모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또 한 가지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종교법을 앞세웠습니다. 교회법을 앞세웠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중요한 전통이 있습니다. 좋은 전통은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전통을 가지고 말씀을 바꾸려고 하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전통이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전통 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좋은 전통은 계속해서 지키고 또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되겠지만, 그러나 잘못된 전통은 과감하게 고치고 또 내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바쳤다는 명분으로,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외식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배우라는 말입니다. 배우들은 시나리오에 따라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자기들의 김정이나 마음과는 상관없이 거짓으로 연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 곧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경외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하나님의 율법에 장로들의 유전까지 더하여 지킨다는 것만으로, 마치 자기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자들인 것처럼 위장하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을 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살펴보십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인간의 안목으로 보면, 율법의 조목에 따라 행하며 금식에 힘쓰고 기도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기에 존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그들의 믿음이 거짓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의 입술과 행위는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같이 보였으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사야 시대에 패역한 사람들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은 없이, 제사 행위에만 열심을 내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사는 기쁘게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사는 물리치셨습니다.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며, 아무리 많은 헌금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예배와 봉사와 헌금을 무가치하게 여기시고, 결코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와 봉사와 헌금을 드리기 원한다면, 먼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삼촌 라반의 작은 딸 라헬을 몹시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삼촌 라반에게 칠년간이나 봉사하였습니다. 그 봉사란 날마다 들에서 낮의 뜨거운 태양과 밤의 극심한 추위를 견디며, 양들을 돌봐야만 하는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노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일이 라헬을 진심으로 사랑하여서 행한 자발적인 수고였기 때문입니다. 라헬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행한 수고였기 때문에, 그 수고가 길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을지라도, 야곱은 그 수고를 전혀 힘들게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봉사도 하나의 의무요,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일도, 주일 학교 교사를 하는 일도, 차량 봉사를 하고, 방송실 봉사를 하는 일도, 교회당을 청소하거나 식당에서 봉사하는 일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행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의무나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 말씀은 입술의 종교와 마음의 종교가 엄연히 실존함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그는 누구인가를 맞추어 보십시오. <그는 기독교 용어들을 자유롭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전능자의 축복과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이, 자신의 새로운 정부의 정신적 기둥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역사적인 책임감으로 가득 찬 아주 신중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각종 신문, 특히 기독교계의 신문에 종교적인 글들을 실었습니다. 그는 너덜해진 성경을 보이며 그 곳에서 자신의 모든 힘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종교적인 박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위선자였던 것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얼굴도 잘생긴데다 공부까지 아주 잘해서 서울대학에도 갈 수 있는 실력과 품행을 갖춘 모범생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아들을 둔 것을 늘 자랑으로 여겼고, 그의 뒷바라지라면 기쁨으로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2학년말이 된 어느 날, 그 학생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학교에서 우등생이요, 모범생인 그가 자살을 했다는 것은 아무도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체를 부검해 보니 다량의 수면제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학생이 왜 수면제를 먹고 죽었는지가 밝혀진 것입니다. 그 학생은 성병이 온몸에 퍼져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겉으로 본 그 학생은 우등생이요,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임질 균으로 죽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겉을 보고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언제나 오해할 수 있고 오판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겉으로만 경건한 척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참으로 통렬하고 신랄한 책망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바로 외식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입술로는 주여! 주여!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뜻대로 삽니다. 입술로는 ‘사랑하는 주님!’ 하면서 기도를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입술로는 찬송을 잘 하지만, 마음으로는 찬송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입술로만 하는 찬송을 듣고 속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늘 그 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의 의식 속에, 무의식 속에, 꿈속에 늘 주님이 있습니까? 경건한 크리스천 저술가 필립 얀시는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라고 탄식하였는데, 이 말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의 목마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는 주님의 탄식을 들으면서, “오, 주님! 그 동안 나도 입술로만 그럴듯하게 공경하고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었던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소서. 이후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해주소!”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또 꼭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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