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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로마교회, 로마교회 성도여! (롬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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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회, 로마교회 성도여! (롬 1:8-13)
  

 지난 주 우리교회에서 파송한 김규식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바탐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3,300평정도의 부지를 확보하여 교회, 유치원, 초등학교를 건립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회교권 지역이기 때문에 부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약 2년간 씨름을 해왔는데 거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그곳에서 30여 년 동안 사역했던 조기술 선교사의 장례식에 본 교단을 대표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열악한 환경에서 엄청난 사역을 일구어 놓았습니다. 가슴 뭉클했던 것은 현지 원주민들이 운집하여 그를 추모하며 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종족, 혈연, 지연을 떠나 나와 전혀 다른 민족을 가슴에 품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이 선교사님처럼 일생을 이방인을 위해 산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이방인들’을 위한 그릇으로 택함을 받았던(행 9:15) 그는 넓은 지역을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애정을 갖고 관심을 가졌던 곳은 로마입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 1:9). 

관심을 가지는 정도가 아니라, 그곳에 가기를 간절히 열망했습니다(롬 1:10-11).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입니다(롬 1:13).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로마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더라면, 그 유명한 로마서가 오늘 우리 손에 들려져 있겠습니까? 

바울은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더디오라는 대필가를 찾아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자매 뵈뵈를 통해 로마교회에 전달했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편지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감정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분명 복음에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좀 더 유심히 살펴보면 그가 단순히 복음에 미쳤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복음이되 그 복음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절).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그는 복음을 강조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로마교회는 당시로서는 부활승천 후 이제 지상에 교회들이 이곳저곳에 세워지는 과정이었기에 30년 역사의 전통 있는 교회였습니다. 로마교회는 지성인, 권력인, 재력가들이 모여들어 나름대로 품위 있는 엘리트 계층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 숫자도 대단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은근한 우월감과 자부심이 대단한 그런 교회, 성도들로 변해갔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은 하나님, 진리를 잘 알고 믿는다고 자부했습니다(롬 1:21). 저들은 그래서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롬 2:1). 한마디로 자신들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이런 로마교회를 향해 바울은 ‘하나님’이란 단어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쓰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까지 했습니다(롬 1:15). 이는 저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구겨놓기에 충분했습니다. 믿음생활에 대해 은근한 자부심이 있는 자를 향하여 ‘당신 하나님 아는가? 당신 예수를 아느냐? 예수 믿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혹시 바울이 로마교회와 그곳 성도들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바울은 저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이요, 성도라 불리고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들의 믿음이 온 사방에 퍼져 나가고 있다고 말합니다(롬 1:7-8). 그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롬 13:14). 

바울은 로마교회의 밝고, 긍정적이며, 귀감이 되는 부분뿐만 아니라 어둡고, 부정적이고, 청산해야 할 부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로마서를 쓰고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십니다(고전 2:10). 때문에 바울은 로마교회, 로마교회 성도들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는 말씀 속에 담겨있는 깊은 무엇일까요? 우선, 엘리트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일수록 자신들도 모르게 복음이 식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 성도일수록 순수한 복음, 예수의 피, 십자가의 사랑, 몸을 던지는 헌신,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자기희생이 점점 메말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초신자가 아니라 대부분 예수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라는 따가운 지적입니다. 

로마교회, 로마교회 성도에게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첫째, 저들은 열정, 열심, 움직임, 행동으로 옮김, 뜨거움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감격, 열정’이 어느 틈엔가 식어버렸습니다. 에베소교회처럼 ‘첫 사랑’을 잃어버려 냉랭합니다. 둘째, 바울은 저들이 열매를 맺지 않고 있음을 지적합니다(롬 1:13). 여기 열매란, 전도의 열매를 말합니다. 저들은 그저 자신만 예수 잘 믿고, 믿음생활 잘하며, 거룩하게 성결하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들은 복음 전하는 열정이 식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그곳을 향해 가기를 원했고, 길이 막히자 편지로 ‘하나님’, ‘복음’을 외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저들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로마교회는 편지 속에 담긴 메시지를 무겁게 받아들였습니다. 식어버린 구원의 감격, 잃어버린 구령(救靈)의 열정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카타콤(catacomb)이 로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의 네로황제 같은 자들의 그 무지막지한 박해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 예수를 전하며, 열정적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공동체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만들어진 카타콤의 크기를 보면서 어떤 학자들은 믿는 사람이 백만 명은 넘었을 것이라고까지 추정할 정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교회가 복음을 다시 듣고, 받아들이니 열정의 사람으로, 복음증거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교회, 우리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교회는 로마교회가 아닙니까? 나는 로마교회 성도가 아닙니까? 우리교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나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혈에 내 온몸을 다시 적셔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교만, 욕심, 아집을 버리고 겸손히 십자가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로 다시 한 번 일어서야 합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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