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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친 사람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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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 (롬 1:1-7)
   

세상에는 이런 저런 미친 사람이 많습니다. 도박에 미친 사람들, 돈에 미친 사람들은 부지기수(不知其數)입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어머니, 아버지, 자식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밖에도 우리는 이런 저런 일에 미친 사람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 무엇에 미쳐보았습니까? 한번 뿐인 인생을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로 보내고 있습니까? 그렇게 늙어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인생을 살다가 마치려 합니까?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치되 무엇에 미치느냐 입니다. 

며칠 전 사랑의교회 수양관내에 있는 옥한흠 목사의 산소와 목사님이 사용하시던 방에 잠시 들렀습니다. 유품들을 뒤적이며, ‘반듯하게 사셨군요. 후회함이 없이 달리셨군요. 나도 그 뒤를 따라가길 원합니다.’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현금(現今) 교회를 바라보면서, 그가 남긴 발자취와 유산들이 신선하게까지 느껴집니다. 그 중 하나가 ‘CAL세미나(제자훈련지도자세미나)’의 첫 강의인데, 옥한흠 목사의 광인론으로 시작합니다.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소천한 후 영상으로 이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광인(狂人), 진정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엇에 미친 사람이었습니까? 

로마서를 펼쳤습니다. 설교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로마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싶은 열망을 가집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가 주는 중압감 때문에 연속적으로 다루지 못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로마서를 들고 강단에 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로마서가 오늘 병든 한국교회, 병든 목회자, 병든 심령들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표어에 가장 부합한 책이 로마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바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 자’라고 불렀습니다(행 26:24). 그는 그런 호칭에 화내거나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호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렇게 말하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들도 나처럼 미친 자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되받아치기까지 했습니다(행 26:29). 그는 도대체 ‘무엇’에 미쳤습니까? ‘무엇’에 미쳐 그동안 유익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아니 배설물처럼 미련 없이 던져버렸습니까?(빌 3:8) 

우리는 “로마서 1:1-7”에서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쓴 다른 성경과 로마서를 비교하면 문맥상 무척 매끄럽지 못한, 아니 특이한 부분을 발견합니다. 바울이 쓴 편지형태는 늘 형식이 일정했습니다. 발신자, 수신자, 그리고 축복입니다. 언제나 이와 같은 패턴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는 발신자가 1절에 소개되고, 그 다음에 이어서 나와야 할 수신자는 7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축복 역시 7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대단히 파격적입니다. 그동안의 일정한 형식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바울이 무슨 단어를 쓰다가 냉정을 잃었습니까? 그는 분명 어떤 단어 앞에서 뚜껑이 열려버렸음에 틀림없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복음’,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단어 앞에서 갑자기 절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편지의 형식, 연이어 당연히 나와야할 수신자를 쓰는 것을 놓쳐버린 채 복음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감정을 추스르고 보니, 수신자와 해야 할 축복이 빠져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부랴부랴 뒤쪽에 배치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한 번 쓴 문장을 교정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였잖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복음, 하나님의 복음에 미쳐있었습니다. 온통 거기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복음, 복음,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그렇게 가려고 해도 길이 막히고, 눈이 어두워 글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더디오란 사람으로 하여금 또박또박 편지를 쓰도록 했고, 여집사 뵈뵈의 손에 들려 로마에까지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미쳤습니까? 1절에 등장하는 세 단어 ‘종, 바울, 사도’란 단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그는 복음을 위하여 ‘종’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로마의 종, 혹은 노예들은 공장의 기계나 다를 바 없는 생산수단이었습니다. 더더군다나 바울이 여기에 종(doulos)이란 단어를 썼는데 이 단어는 그 종 가운데서도 가장 신분이 낮은 자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둘째, 그는 복음을 위하여 ‘바울’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파울로스’(paulos, 작은 자)란 뜻입니다. 파울로스의 어근인 ‘파우어’에는 포기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는 베냐민지파 사람, 왕가의 후손이며, 큰 자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스스로 지극히 작은 자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엡 3:8). 그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유익한 것, 꽉 쥐려고 했던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그런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복음에 미쳐있었습니다. 

셋째, 그는 복음을 위하여 ‘사도’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뜻, 의지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주인의 뜻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생명을 내어 놓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생명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복음에 미쳐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억지로, 부득이함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종, 자원하는 바울, 스스로 자원하는 사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도전이 6절에 있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 1:6). 바울만 복음과 상관있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것’, 즉 종, 사도, 바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6:19-20, 롬 14:7-8). 바울이 편지를 쓴 이유는 복음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사람들과 형식과 껍데기, 그럴듯한 외양만 남은 사람들을 향해 복음에 미친 사람이 되기를 도전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보이는 것, 해 아래의 것에 미친 사람, 그것이 전부인양 전력투구하는 사람과 복음, 보이지 않는 것, 해 위의 것을 사모하며 그것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무엇에 미쳐 있습니까?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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