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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쓰임 받는 기쁨 (창 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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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 받는 기쁨 (창 24:1-9)


386 세대들이 학창 시절에 한번쯤은 읽었으리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하는 책입니다. 1964년도에 처음으로 출간된 책이니까 꽤 오래됐네요. 이 책은 ‘쉘 실버스타인’이라는 분이 썼는데 대체로 이런 내용입니다. 

한 소년의 집 근처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소년은 어린 시절에 이 나무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그네를 만들어서 놀기도 했습니다. 나무가 소년에게 놀이터를 제공한 겁니다. 이 소년은 자라서 그 나무에서 열매를 구하게 됐습니다. 나무는 좋은 열매를 주었습니다. 소년이 청년이 되자 땔감이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가지를 베어가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흘러서 이 소년은 장년이 됩니다. 그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는 나무에게 가서 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무는 서슴지 않고 나의 몸통을 베어다가 배를 만들라고 말하지요. 

장성한 소년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소년은 백발이 되어 노인의 몸으로 집에 돌아옵니다. 나무는 밑동만 남아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밑동에 걸터앉아 쉬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사람은 언제 행복할까요? 여러분은 언제 기쁘세요? 쓰임 받을 때일 겁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소년에게 쓰임 받듯이 ‘나’ 라는 사람이 남에게 인정받고 쓰임 받을 때에 그 때가 행복한 거예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사람들은 “에이, 남 밑에 들어가서 일하는 게 무슨 기쁨이고 무슨 행복이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보세요. 여러분을 써 주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도 사실은 생각처럼 많지 않습니다. 취직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웅진그룹이나 근화제약에 가서 “내가 그 유명한 공주에 사는 누구인데, 이 회사를 위해서 일하려고 왔으니 나를 써 달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할 것 같아요. “아 그러시냐고, 충청도 교육도시 공주시민이야고, 어서 오시라고, 내가 기다렸다고, 반갑다고” 그럴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에 교과서에 이런 글이 실렸어요.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꼭 필요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 다른 하나는 없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면 좋겠어요? 물어보는 사람이 바보지요. 필요한 사람이 될 때에 행복한 거예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이 되면 절대로 행복하지 않아요. 기쁨이 없어요. 있으나 마나 한 사람 그 뭐가 기쁘겠어요. 저와 여러분은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쓸데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삶의 기쁨과 행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고 쓰임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에셀은 정말 기쁨의 삶을 살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어요. 저는 엘리에셀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하여 엘리에셀을 부릅니다.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어라. 그것이 당시에 맹세하는 법이었습니다. 내 아들이 혼기가 차서 결혼을 시켜야 하는데, 이방인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에 가서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해 와라. 그러니까 “엘리에셀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주인님이 직접 하셔야지요.” “아니야, 내가 너를 믿는다. 네가 가도록 해라.” 이 부분은 성경에 없어요. 제가 만들어 낸 말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가고 싶었을 거예요. 자기 며느리를 구하는 일인데 종을 대신 보낼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런데 늙어서 갈 수가 없었어요. 그 때에 아브라함이 생각했지요. 누구를 보내면 좋을까, 누구를 보내면 내가 간 것과 마찬가지일까? 생각하다가 엘리에셀이 생각났어요. 그렇지 엘리에셀을 보내면 내가 간 것과 마찬가지일 거야. 엘리에셀을 불러서 “네가 내 마음을 가지고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와라”고 하는 겁니다.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이러한 말을 듣고 맹세하고 먼 길을 떠납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세요. 저는 이런 그림을 그렸어요. 엘리에셀이 그 부탁을 받고는 얼마나 좋았을까? 너무너무 좋아서 덜실덩실 춤을 추면서 나오지 않았겠어요? 휘파람을 불면서 나왔을 것 같아요. 환호성을 지르면서 나왔을 것 같아요. 얼마나 좋은지 기쁨을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중요한 일을 맡았거든요. 주인에게 귀하게 쓰임 받거든요. 엘리에셀이 종인데, 종이 마당을 쓰는 일을 맡은 것도 아니고 집을 관리하는 것을 맡은 것도 아니고, 주인의 며느리를 구하는 일을 맡은 거예요. 그렇게 귀한 일을 나에게 맡겼으니 얼마나 좋겠어요? 여러분 부럽지 않으세요? 부러우시지요. 저는 눈물 나도록 부럽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일주일 내내 이런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저를 엘리에셀처럼 쓰시면 안 되나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구하는 일과 같은 귀한 일을 맡길 때에 제가 그 일을 하면 안 될까요? 그런 복을 제게 주세요. 그런 복 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복을 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울까요. 얼마나 근사하고 행복할까요. 여러분도 이런 복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언제 삶이 기쁘고 행복한지 아시지요. 무엇을 소유해야 기쁜 게 아니에요. 내 자신이 가치 있을 때에 기쁜 거예요. 인간은 세상보다 크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다 얻어도 만족함이 없는 거예요. 세상의 것을 다 가져도 간에 차지를 않아요. 그 정도로 인간이 큰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인생의 기쁨과 행복은 세상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것하고는 상관없이 내가 남에게 인정받고 쓰임 받을 때에, 그 때가 행복한 겁니다. 좀 어려운 표현으로 말하면 기쁨이나 행복은 소유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해 보시지만 살면서 좋은 차 타고 다니고 넓은 집에서 산다고 기쁘고 행복하세요? 쾌적한 환경에서 산다고 기쁘고 행복하세요? 돈을 좀 벌었다고 기쁘고 행복하시냐는 말씀이에요. 해 보신 분은 아시지만 아니지요. 기쁨과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아요. 소유에서 얻는 기쁨은 처음에만 기쁜 거예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공허한 거예요. 무슨 일이든 처음에는 좀 못해도 나중이 좋아야지요. 처음은 좋은데 나중은 그렇지 못한 용두사미가 되면 좋겠어요? 그거 좋지 않은 거거든요. 

여러분, 주인에게 쓰임 받기 위하여 욕심을 가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주인이신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기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하여 아내 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을 맡길 때에, 당신의 생명보다 귀히 여기는 아들을 위하여 아내 구하는 일을 누구에게 시킬까 생각하시다가, 그래 교회 누구를 보내면 될 거야. 어느 집사를 보내면 될 거야. 하나님이 공주시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하여 어느 교회를 보낼까 생각하시다가, 그래 쐐기골에 있는 교회를 보내자. 그러신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나님이 정말로 귀하고 중요한 일을 시키실 때에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쓰임 받는다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 아니겠어요. 기가 막히게 좋은 일이지요. 그런 일 한번 해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며 간절한 기도제목이 되시기 바랍니다.

목회를 하면서 어떠한 계획을 세우고는 누가 하면 좋을까, 누구를 시키면 좋을까를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 때에 두 부류의 교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한 부류는 아멘 하는 사람이에요.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무슨 일을 부탁해도 순종합니다. 본인의 능력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순종해요. 이런 분들과 함께 사역하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입니다. 

다른 부류는 이것저것 생각하고 계산하다가 노멘하는 사람들입니다. 뜸을 들이다가 하지 않겠대요. 왜 "기도해 보고요"하는 사람들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대개 좋은 대답을 듣기가 힘듭니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때로는 자신에게 능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것을 먼저 생각하느라고 시간이 나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한다고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여러분이 목사라면 누구를 시킬까요? 아멘하는 사람이지요. 하나님이시라면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그러한 현상을 보면서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아멘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시켜도 아멘한다는 사실입니다. 생각이고 기도고 그게 없어요. 기도하고 시키는 것이니까 그냥 아멘합니다. 그에 비해서 노멘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노멘해요. 밥할 때에만 뜸을 들으면 되는데, 뜸들이지 않는 일에도 뜸을 드려요. 그러니 밥이 타지요. 인생이 쓸데없이 타요. 무슨 소리인지 아시지요? 무슨 말씀인가 하면 아멘과 노멘은 실력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세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시키는 분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이 할만하니까 시키는 겁니다. 전혀 할 수 없는 사람을 시키는 법이 없어요. 본인은 실력이 없어서 믿음이 약해서 못한다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시키는 분이 보기에는 할 수 있으니까 믿음이 있으니까 시키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하나님은 때때로 실력이 부족하면 능력을 더하셔서 사용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인의 뜻에 순종하고 나아가면 된다는 사실입니다. 실력이 먼저가 아니라 자세가 먼저예요.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를 보낼까? 누구를 시킬까 생각하실 때마다 여러분이 생각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복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이 누구를 보내면 좋을까 생각할 때에 누구보다도 먼저 떠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충성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 엘리에셀에 대하여 많은 기록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지만,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엘리에셀에게 맡긴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충성되게 일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엘리에셀이었기에 아브라함은 그렇게 귀중한 아들 이삭의 아내 구하는 일을 맡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에 욕심을 가지세요, 가만히 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을 위해서 쓰임받는 것은 욕심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받는 것은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우리 교회 말고요. 하게 되면 하고, 말게 되면 말고 하는 식이에요. 교회는 그냥 다니면 되는 줄로 알아요. 저는 이게 참 답답해요. 학교나 직장은 그냥 다니지를 않아요.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몰라요. 때로는 밤도 새고요. 때로는 과로해서 코피 흘리면서까지 다니지요.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코피 흘리도록 다니라는 말은 아닙니다만, 사람들이 뭐를 몰라서 그래요. 교회는 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소원하면서 열심히 다녀야 합니다. 거기까지 나가야 돼요. 

종종 말씀을 드리지만 직분 받기를 위해서 욕심을 가지세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직분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직분이 있다고 잘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직분을 맡으면 그에 해당하는 많은 사역을 할 수가 있고, 책임있게 할 수가 있어요. 직분은 사역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마음껏 헌신할 수가 있거든요. 

예수 열심히 믿어서 우리 장로님들처럼 20-30대에 집사가 되고, 40대에 장로가 되도록 해 보세요. 젊었을 때부터 하면 많은 사역을 할 수 있잖아요. 그 왜 젊었을 때에는 세상적으로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서 권사 장로를 하려고 해요. 그러니까 교회가 늙어지는 거예요. 물론 늦게 예수 믿은 사람들은 좋은 겁니다. 늦게 믿었으니 어쩔 수가 없지요. 그건 귀한 일이고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부터 예수를 믿었는데,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나중에 잔치할 때쯤 되어서 한번 해 볼까. 하나님께 쓰임 받을까,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교인들 중에서도 세상의 직분은 귀하게 여기고 교회의 직분은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보세요. 세상에서는 20대에 박사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천재 났다고 합니다. 물론 천재지요. 아무나 박사 됩니까? 이박사 박박사 김박사 최박사 그러니까 저절로 박사가 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30에 박사가 되는 것도 힘든 일이고 40대에 박사가 된다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더군다나 20대에 박사가 된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귀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직분 받는 것도 귀하게 생각하자는 거예요. 20대에 집사 되자는 생각이 왜 나쁩니까? 좋은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왜 관심이 없습니까? 이르다는 거지요. 어리다는 거지요. 어리긴 뭐가 어려요. 저도 26살에 목회 나가서 28살에 목사가 됐는데, 지금까지 잘 하고 있잖아요. 

얼마 전에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까 한국에서 20대 박사가 되어서 어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는 분이 있더라구요. 참 귀하게 쓰임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생각해 봤어요. 왜들 일찍 하려고 할까? 일찍하면 할수록 많이 가르칠 수가 있어요.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 마음을 가져야 돼요. 이왕이면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세요. 쓰임 받는 게 기쁜 거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를 하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매주일 이 강단에서 설교자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기뻐요. 기가 막히게 기뻐요. 그 뿐입니까? 목회하면서 보니까 여기 저기에서 오라네요. 설교 해 달래요. 배움도 적고 별로 잘난 건 없는데 주임이 세워주시고 설교할 자리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기쁨이 얼마나 좋은지 아시지요? 최고의 복이요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게 귀한 일이에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보다 귀히 여기는 것을 위해서 나를 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불러 주신다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한 일에 욕심을 갖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헌신하세요. 변함없이 사역하세요. 하나님이 생각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 보세요. 하나님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나를 불러 주신다면 이 한 목숨 하나님께 바쳐도 좋지 않겠어요? 그게 복이고 그게 행복이지요. 그게 인생을 사는 맛이 아니겠어요?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복을 받아 누리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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