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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하게 하는 자 (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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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자 (마 5:9)


1200년대 초엽 유럽은 십자군 전쟁이 막 일어나려고 할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나라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모슬렘에 대한 미움의 설교와 얘기를 전파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모슬렘을 죽이자.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모슬렘을 몰살해야 한다’는 미움이 꽉 들어차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미움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파병되는 십자군의 행렬을 바라보며 어느 젊은 수도사가 탄식하며 유명한 예언을 했습니다. “이 십자군 전쟁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미움과 적개심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전쟁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패배할 것이다.”, 

미움과 증오에 혈안이 되어 사람들을 죽이러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나름대로 십자군을 조직했습니다. 그것은 평화의 십자군이었습니다. 칼과 창 대신에 성경을 들고 적군을 품에 안으며 그들에게 사죄했습니다. 이 젊은 수도사는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훗날 유명하게 된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그가 누구입니까? 그 유명한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프란치스코)였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다툼이 있다가도 그 사람만 들어가면 웃음의 장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좋은 분위기에도 그 사람이 들어가기만 하면 긴장이 되고 갈등이 생기게 만드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깊이 묵상하고 싶은 주제는 예수님의 팔복 중, 제7복입니다.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서 ‘화평’은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며,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입니다. 우리말로는 평안, 평강, 화목, 평화라는 말로도 쓰입니다. 옛날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서 인사할 때, ‘샬롬’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에게 임하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솝의 우화 가운데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토끼 한 마리가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늑대가 나타나서 길을 가로 막았습니다. 토끼는 깜짝 놀라 나무위로 재빨리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이 늑대가 토끼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좋아 내가 문제를 낼테니 알아 맞추면 안 잡아먹지”, 그리고 낸 문제는, “내가 너를 어떻게 할 것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토끼가 생각하고 대답하기를 “잡아먹을 것 같습니다”했습니다. 

늑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잡아먹자니 자기가 한 말이 있고, 결국 잡아먹자고 한 짓인데 그냥 보내 버릴 수도 없고... 어찌되었건 토끼가 이겼습니다. 토끼는 안심하고 나무에서 내려와 제 갈 길로 갑니다. 그때 갑자기 늑대가 달려와서 토끼를 잡았습니다. 토끼가 “말이 틀리지 않습니까?”하고 항의하자, 늑대가 하는 말이 “널 잡아먹고 안 잡아먹고는 내 맘이지~ ”하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의 철학적 이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계약의 논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힘의 논리입니다. 이 두 논리는 언제나 첨예한 대립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힘의 논리에서 문제의 해결이 온다고 생각하는 사고가 문제입니다. 

강자의 말이 언제나 옳습니다. 힘의 논리가 계약의 논리도, 진실의 논리도 묵살하고 평정을 이루려는 데서 세상이 혼란해지는 것입니다. 매사에 힘의 논리를 앞세워서 억압하고 조용하게 만드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계 곳곳에서 독재자에 항거하는 민주화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어떻습니까? 시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용합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러면 평화로운 것인가요? 

성경은 이것을 평화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화평, 평화’란 그게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은 ‘완전함, 전체적인, 건강함’의 의미를 지닌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행복한 삶과 건전한 사회를 위한 모든 요건들을 포함한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조용함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영어로 ‘peace-maker', 즉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평화 애호가‘나 ’평화를 즐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릴 적 싸움 한 번 안하고 지내온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싸움 주위에는 언제나 세 부류의 무리가 있습니다. 첫째 무리는 싸움을 붙이는 무리입니다. 이쪽 저쪽을 옮겨가면서 싸우게 만듭니다. 도저히 싸우지 않고는 안 되게 분위기를 몰아갑니다. 둘째는 구경하는 무리입니다. 싸움 구경은 볼만한 구경거리입니다. 그래서 싸움만 나면 구경을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싸움을 말리는 무리입니다. 그런데 싸움을 말리다보면 말리는 사람이 코피가 터질 수도 있어요. 자기가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이 바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 peace-maker'입니다. 반면에 문제를 만드는 사람은 ’trouble-maker'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계신데, 그것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 - 화해자’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긍휼의 태도를 취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대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재역할을 함으로써 평화가 임하도록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까? 

1.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먼저 화해가 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화평의 근원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화평의 근원이시며 평강의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롬15: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또한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9:6)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엡2:14~16)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수히 많은 말씀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은 평강의 근원이시고, 예수님도 평화의 왕이시니, 우리도 이 땅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잘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깊은 평화를 직접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화해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온유한 사람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한 사람이 남을 화해시킬 수 있음. 

신경질 잘 내는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은 화해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자기 의와 자기 교만에 가득찬 사람도 화평하게 할 수 없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과 화해를 경험한 사람이요 거듭나고 새로운 자아상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며, 화해가 아니라 분열이요,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며, 용서가 아니라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리 노벨 평화상이 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있고, 평화에 관한 단체와 회의가 있고, 수많은 문서가 있고, 시위가 있어도, 세상은 악해지고 잔인해지며 계속해서 더 무서운 전쟁과 폭력과 파괴가 증가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우리의 방법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깊은 평화를 맛보고,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도자입니다. 본인 자신이 십자가의 능력을 이해하고, 또한 십자가의 용서를 체험하고, 그 십자가를 통한 평안을 체험하고 나서 죄와 죽음과 절망의 깊은 상처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줄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사람이 화해자입니다. 나의 평안이 아니라 예수님의 평안을 보여주며 인간의 타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화해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기에 진정한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만 해결이 있습니다. 


3.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서로의 약점이나 문제점들을 용서하도록 도와주고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남의 약점을 보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칭찬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 상대방끼리 서로의 장점을 보게 하고 또 서로 다른 점을 보지 않고 같은 점을 보게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화평하게 하는 자, peace-maker 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화평을 추구했던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아브라함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이방인 속에 살면서 그들과 화평하게 살았고, 또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투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창13장에 보면, 함께 살아왔던 아브라함과 조카 롯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양쪽의 목자들 사이에서 서로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갈라설 것을 결심하고,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말합니다. 

(창13:8~9)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결국 아브라함 자신은 손해보더라도 롯에게 좋은 땅을 선택할 것을 말합니다. 

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역시 화평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이 열심히 우물을 파면 그 땅의 주인이라고 뒤늦게 나타나서 자기 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다툼이 생깁니다. 그러면 이삭은 자기가 수고한 것에 대한 대가를 주장하지 않고 양보하고 다툼을 피하여 떠나갑니다. 그래서 다시 우물을 팝니다. 그런데 또 시비가 붙습니다. 그러면 또 양보합니다. 그렇게 여러 번 양보하고 세상에서는 손해보는 것 같은 삶을 삽니다. 그런데 그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결국 그랄 사람들,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겪은 많은 일 가운데, 서로 원수같이 지내는 사람을 화해시킨 일이 몇 번 있습니다. 물론 그 일이 하루아침에 된 일은 아닙니다. 어느 두 권사님이 정말 원수같은 사이였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몇 해 지나면서 그 내면의 속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한 권사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그 000 권사는 돈 좀 있다고 교만해서 나 같은 사람들을 깔보고, 또 여우같고, 뱀같이 간사하고 속에 악한 영이 있어요. 내가 그 권사 때문에 얼마나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는지 몰라요”...., 

또 얼마 있다가는 상대편 권사님에게 심방가서 말하다가 듣습니다. “목사님, 말도 마세요. 그 000 권사는요. 교양도 없고요. 자기만 옳다고 우기고 정말 무식해요”..., 

이럴 때 내가 고민하는 것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어느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는가’입니다. 그 이야기들을 다 들어주고 힘들어하는 부분을 이해하면서 제가 묻습니다음. “권사님, 그런데 그 권사에게는 장점은 없습니까?”, 그러면 “뭐, 목사님에게는 잘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또, 다른 것은요? 전도도 해서 그분 통해서 예수 믿은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 “하긴, 전도도 좀 했지요. 그렇지만 지금 전부 자기 편 만들어서 몰려 다니잖아요”.... 

다음에 상대편 권사님에게 가서 이야기 듣다가 그 권사님이 흉본 이야기는 쏙 빼고, “그래도 그 권사님은 권사님에게 목사에게 잘 하려고 하고, 전도도 많이 했다고 하던데요?”, “그 권사가 그랬어요?”, “그럼요. 그 권사님은 뭐 장점이 없어요?”, “그 권사도 교회 봉사는 열심히 해요. 옛날에 우리 교회가 작았을 때는 잘 못하는 반주실력이라도 예배 때마다 반주를 하고는 했지요. 그런데 정말 반주실력은 형편없었어요”, 

다음에 상대편 권사님에게 가서는 “그 권사가 권사님에게 교회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예전에 교회에서 반주도 열심히 하셨다면서요?”, “그 권사가 그래요? 하긴 그때 제가 피아노도 잘 못치는데, 반주할 사람이 없어서 했어요”.... 

결국 오랫동안 원수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화해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게 되었습니다. 

(롬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언제나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결코 비판자나 고발자나 선동자가 아닙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격려할 수 있는 마음으로 바꾸어주어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화해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어떤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는 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능력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이 제 아이들을 보면서 그래요. “어쩌면 지 아버지하고 똑같을까?”, 저도 자라면서 많이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기 아버지하고 똑같다’, 자녀들은 부모를 닮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찬송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 영혼의 깊은데서 부터 평화의 맑은 가락이 울려납니다.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세상에 참된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 평화를 누리고 주위를 화평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하늘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화평, 그 물결이 저와 여러분에게 덮혀져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을 체험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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