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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도다. 화평하게 하는 자여! (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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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도다. 화평하게 하는 자여! (마 5:9)


언젠가 탄천을 산책한 적이 있었는데,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중간쯤 가는데 어딘가에서 악취가 났습니다. 생활오수에서 나는 악취 정도가 아니라 폐수 냄새가 확실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근처 탄천 개울 속에는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저는 산이든 어디를 가든지 간에 물만 보면 그 속에 물고기가 살고 있는지 늘 확인하는데 이상해서 살펴보았더니 냄새가 너무 심했습니다.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탄천을 따라 쭉 올라갔습니다. 가다 보면 중간 중간마다 하수관이 나오는데, 거기서 여러 가지 오수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 개의 하수관에서는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았는데, 한참 올라가다 보니 효자촌을 지나 장안동 근처의 한 하수관에서 나는 냄새가 아주 심했습니다. 속이 좀 상했습니다. 거기서 폐수가 흘러나오니까 냄새도 나고 그 근처에 있는 물고기가 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평화가 너무 없지 않습니까? TV를 보아도, 신문을 보아도 인터넷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대신 TV, 신문, 인터넷을 볼 때마다 악취가 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탐욕이 넘치고 서로 미워하고 전쟁하고 불화하고, 서로 다투고 죽이는 일들이 너무 심합니다. 그래서 악취가 너무도 가득합니다. 왜 이렇게 심해졌는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악취가 참 많이 나는데, 그 이유가 여러 사람들이 인간 마음속에 있는 썩어진 것들, 부패한 것들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욕심, 자기중심적인 생각들, 이기주의,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자꾸 인간을 썩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안 좋은 냄새가 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평화가 없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사실 사는 것이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평화가 없는 것일까요? 우리 마음, 사람들 마음이 썩어서 그렇습니다. 너무 많은 가정들이 평화를 잃었습니다. 가정 같지 않은 가정이 참으로 많고, 가정 문제로 상담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나라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세계도 평화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 한 낭보를 보았습니다. 피랍되었던 우리 선원들이 다 구출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받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한편 해적들이 여덟 명이나 죽었다는 것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도가 심했고, 다른 사람들을 죽였으니 마땅하지만 저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나쁜 것으로 출발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소말리아 앞바다에 잘 사는 나라들이 와서 온갖 폐기물들을 다 버리고 가니까, 소위 말하는 배상, 보상적인 의미로 돈을 좀 받아서 자기들도 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저렇게 해적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이제는 기업형 해적들이 되어서 도가 너무 지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참 딱하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자기네들도 그런 삶을 살아야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세상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왜 평화가 없습니까? 사람들 마음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냄새가 너무 납니다. 여기서 냄새가 자꾸 나서 온 세상을 그런 악취가 가득한 세상으로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가정이 행복하고, 평화롭기 위해서는, 이 사회, 이 땅이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마음이 바뀌어야합니다. 그 누구부터가 아니라 우리부터, 우리 마음부터 바뀌어야합니다. 그래야지 나도 평화를 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악취가 나는 하수관을 생각해봅니다. 악취가 나와서 하수관 자체에서도 냄새가 나고, 개울도 냄새가 나고, 물고기도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하수관을 지나서 그 위로 가보았더니 물고기가 제법 많았습니다. 참 보기 좋았습니다. 물고기가 살아야지 물고기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나 악취가 나는 곳에, 폐수가 있는 곳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합니다. 깨끗한 곳이라야만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 평화가 없는가?’ 입니다. 평화가 없다는 자체를 생각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고, 욕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해적이 생길 수 있고, 강도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를 만들어 가야합니다. 냄새나는 물에 물고기를 집어넣는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바뀌어야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가정에, 이 사회에, 이 땅에 평화가 있으려면 그 모든 것들의 근원인 사람들의 마음이 평화로운 마음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부터 여러분의 마음이 평화로운 마음이 되게 하십시오. 먼저 여러분들이 애를 쓰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래야지 여러분들도 평화롭게 되고, 여러분의 가정이 평화롭게 되고, 여러분이 정말로 사랑하는 여러분의 딸들, 아들들 또 그들의 가정이 평화의 가정이 됩니다. 정말로 중요합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평화롭지 못합니까? 그것은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나름대로 이것저것 다 갖추어져도 모자라는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채워지면 정말로 평화롭고 행복해질 것 같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것이 채워져도 평화롭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바뀌면 지금보다 더 모자라는 것이 많고, 아쉬운 것이 많고, 결핍한 것이 많아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어야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마음이 평화의 마음으로 바뀌어야합니다. 내 마음이 평화롭게 되면 나도 평화로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평화롭게 합니다. 정말로 중요합니다. 가장 되신 여러분들, 평화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어머니 되신 여러분들 평화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평화롭게 됩니다. 여러분의 집안사람들이 평화롭게 됩니다. 

평화의 마음에는 두 가지 방향, 혹은 두 가지 자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수동적인 자세입니다. 이것은 좀 쉽습니다.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것, 싸움을 잘 일으키지 아니하는 것, 다른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하지 아니하는 것, 분쟁을 싫어하고 다툼을 싫어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대강 하고 있을 것입니다. 혹시 내가 이렇게 했다가는 집안에서 분란이 일어나겠다, 이렇게 하다가는 좀 시끄럽겠다는 것을 조금 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생각해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싸움거리를 제공하지 아니하는 것, 다툼 분쟁거리를 제공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참 좋은 마음입니다. 이것만 해도 참 좋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다툼이 될 만한 싸움이 될 만한, 분쟁이 있을법한 곳에는 가지 않는 것입니다, 자꾸 어울리면 똑같이 됩니다. 나라고 별 도리가 없습니다. 자꾸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판하고 논쟁하는 곳에 가게 되면 나도 그렇게 되기 때문에 그런 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평화롭고 온유한 사람 주변에 가십시오.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도 자꾸 온유하게 되고 평화롭게 되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근처에 가기도 싫습니다. 그런 사람끼리 자꾸 모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온유하게 되고 평화롭게 됩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고 조금은 쉽습니다. 

두 번째로 능동적이 자세를 가진 사람들인데,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참 중요한 것인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화평, 평화, 샬롬은 다 이 뜻입니다. 평화가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평화가 있도록 기다리지 않습니다. 평화가 유지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더 나은 평화, 더 좋은 것을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자꾸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힘을 쓰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평화에 저해되는 것이 있으면 온갖 힘을 다해서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이런 자세가 바로 능동적인 자세입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평화를 위해서라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합니다. 입만 가지고 하는 것은 조금은 덜합니다. 그런데 내 돈을 써가면서, 내 시간을 들여가면서, 내가 이런 저런 오해를 받아가면서, 별별 소리를 다 들어가면서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필요합니다. 이 땅에 그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어려운데, 우리는 평화의 왕인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노래했고, 또 조금 있다 노래할 것이고, 성경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최고의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기본적으로 많이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쉽게 생각하지만 정말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가 시골에 가도 불편합니다.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 참 불편합니다. 에티오피아나 캄보디아에 가면 호텔이라고 하는 곳인데도 물이 졸졸 나오고, 미지근한 물이 나오다 여러 사람이 쓰면 전기가 끊어져 찬물이 나와서 비누칠도 제대로 못합니다. 호텔이라고 하는 곳에도 화장실에 휴지도 제대로 없고, 수건도 제대로 없어서 제대로 닦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곳에만 가도 불편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생각하면 이것도 참 넘치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얼마나 사시기 힘드셨겠습니까? 요즘 한국 사람들 가운데 이민을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기 좋다고 하는 나라에서도 그럴진대, 주님의 희생은 어마어마한 희생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평화를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되셨습니다. 보통 인간입니까? 제일 낮은 인간입니다. 말구유에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습니다. 너무 힘듭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저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사람이 좀 못나서인지 마음이 불편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태어나셨습니까? 죽으려고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더 행복하고, 더 잘살려고, 더 좋은 일이 있으려고 이런 일을 하고 저런 일을 하기도 하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 보좌를 버리고 죽으려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냥 죽으셨습니까? 얼마나 비참하게 죽으셨습니까? 얼마나 처참하게 죽으셨습니까? 십자가에 그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가 말로 다하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평화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십자가 때문에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누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가정들이 예수님 때문에 평화를 누립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쟁이 더 많았을 텐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많이 줄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주시기 위해서 그 희생을 하셨습니다. 헌신을 하셨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 권사님께서도 예수님 닮아서 그런 희생을 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셨는데, 정말로 예수 믿으면서 제대로 배워야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화평하게 하는 사람, 화평을,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 배우십시다. 

첫 번째는 우리 것을 포기해야합니다. 내 것을 버려야합니다. 말은 쉬운데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랑, 내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중심적으로 사는 것을 포기할 때 이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해 타산하는 것을 버려야합니다. 계산하는 것을 버려야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을 때, 이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나에게 득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다 계산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합니다. 이것이 나에게 어떤 손해를 끼치는가? 이렇게 되면 내가 물질적으로 얼마나 손해를 보고, 내가 얼마나 더 돈을 들여야 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계산하지 아니하는 것, 나와 연관시키지 아니하는 것,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없애는 것입니다. 

바로 며칠 전 미국과 중국이 정상회담을 했는데, 이것으로 예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중국에게 인권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노벨 평화상을 받은 류사오보를 석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참 좋은 일이고 참 바른 일입니다. 그리고 평화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조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를 생각해야합니다. 혹시라도 미국의 오바마가 인권, 혹은 류사오보 석방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 자체 즉 죄 없는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은 것, 티벳 등을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미국의 국가 이익을 위해서 혹은 오바마가 재선이나 다른 것 때문에 자기 위상을 높이려고 그런 소리를 했을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오바마, 미국을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혹시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나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 화평이나 인권을 논하는 일은 없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화평화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나와 관계된 이해관계, 이해타산, 계산 이런 데서 벗어나야지 참되게 또 평화롭게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여덟 가지 복 중에서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정말로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행복의 첫째 비결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복 있도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먼저 이것을 인식하고 난 후, 하나님이 내 가난한 마음속에 들어올 때, 내 마음을 전부 비워 가난하게 할 때, 내 마음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렇게 되므로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나 자신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나도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내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것을 포기할 때 주님께서 채우실 수 있습니다. 내 속을 가득 채우면 우리 주님께서는 채우실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욕심이 가득하지 모릅니다. 내 것을 채우고 또 주님을 채우려고 하니 주님이 들어오실 틈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오시라고 하면 “내가 들어갈 자리를 비워두고 나보고 오라고 해라.”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워야합니다. 비워야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권세가 내 속에 채울 수 있습니다. 누구든 화평하게 하고 싶습니다. 다 그런 욕심이 있습니다. 나를 화평하게 하고, 내 사랑하는 자녀들을, 다른 사람을 화평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욕심을 다 채우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욕심쟁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화평화게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첫 번째가 나를 포기하고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라는 이름을 아예 없애버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먼저 평화롭게 됩니다. 잘났다, 배웠다, 가졌다, 내가 어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애들이 하는 짓입니다. 진짜 어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버리십시오. 

두 번째, 참으십시오. 참아야합니다. 참아야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합니다. 여기에 참는다는 것은 힘이 없고 연약하고 내가 어찌할 바가 없기 때문에 참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임에도 참는 것, 내가 가졌음에도 참는 것, 내가 말할 수 있음에도 참는 것, 할 말이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는 것, 이것이 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베드로가 화가 나서 칼을 휘둘러 병사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들어보십시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26:5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강한 질책입니다. 그까짓 칼이 무엇이라고 칼까지 들고 설치느냐?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다. 수십만 되는 군대를 불러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주님께서 참으셨습니다. 이것이 참는 것입니다. 이럴 때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힘 있는 분들이 참으십시오. 높은 분들이 참으십시오. 말 잘하시는 분들이 참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왜 참으셨는가에 대해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마26:5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참아야지 하나님 뜻,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가지신 소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것은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땅을 향하신 소원은 여러분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은 되지 않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세 상사람들을 다 예수께로 인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 속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뜻을 위해서, 이 평화를 위해서, 이 행복을 위해서 우리 주님은 참으셨습니다. 

여러분, 참아야합니다. 분통이 터져도 참아야하고, 속이 상해도 참아야하고, 억울한데, 한 번 일어설 수 있고, 한 번 휘두를 수 있고, 엎어버릴 수 있음에도 참아야합니다. 평화를 위해서 참아야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누차 우리들에게 부탁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말을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에서 혀들 두고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약3:5) 라고 말씀하십니다. 입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입 때문에 이 땅에 평화가 제대로 없습니다. 가정에 평화가 없습니다. 사람들에 평화가 없습니다. 

여러분, 할 수 있으면 그저 입을 다무십시오. 그리고 더 부탁드립니다. 어른 되신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말씀하지 마십시오. 진짜 어른들이 누차 노인들에게 부탁합니다. ‘노인이 되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꼭 물어보면 대답하는 것입니다.’ 라고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많이 배우신 분들이 말을 참으십시오. 못 배우신 여러분들은 미안하지만 말을 좀하셔야지요. 배우지도 못했는데, 말까지 못하게 입을 막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소리나 하도록 용납하십시오. 말 되지 않는 소리를 해도 받아들이십시오. 어른들이 받아주셔야 하고, 배운 사람들이 받아주셔야 하고, 높은 사람들이 받아주셔야 하고, 가진 사람들이 받아 주셔야합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개기도 더디하라(약1:19)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럴 때 평화가 옵니다. 

며칠 있으면 명절이 다가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때에 맞추어서 너무도 중요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집안에서 평화의 사람이 되십시오. 친구들 간에, 어디가든지 화평의 사람이 되십시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 것을 포기하면 됩니다. 나를 버리면 됩니다. ‘내가 어른인데’ ‘내가 너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데……’ 라고 말하는데, 여러분, 무엇을 하셨습니까? 부모 되신 여러분들, 손자, 손녀들, 자식들에게 이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다 포기하십시오. 아들 키우면서, 딸 키우면서 얼마나 좋았습니까? 손자, 손녀 돌보아주면서 얼마나 좋았습니까? 참아야지 이 땅에 평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도 참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우리 주님께 또 배웁니다. 새로운 인생관을 가질 때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일반적인 사람들은 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삽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인해도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혹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산다고 해도 기껏해야 우리 주변의 몇 몇 사람들입니다 또 아주 많이 한다고 해봐야 민족인데,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를 뛰어넘어가야 하고, 가족을 뛰어 넘어가야하고 우리 민족을 뛰어 넘어가야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예수님 목적은 결단코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나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바로 몇 시간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시므로, 이 잔을 저한테서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 자신도 자주 그러는데, 우리는 보통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 뜻대로 할 때가 참 많습니다. 너무 너무 괴롭고 죄송하고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처음에는 오히려 완전한 인간이라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무엇이 이루어졌습니까? 바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기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생관이었습니다. 이럴 때 세상이 바뀌어집니다. 이럴 때 우리가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가정에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고, 이 사회에서, 이 땅에서 평화가 이룰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부터 시작해야합니다. 우리가 바뀌어져야합니다. 

우리가 언제 나라의 지도자들,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 지도자들에게 이런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뀌어져야합니다 인생관이 바뀌어져야합니다. 기독교가 바뀌어져야하고, 기독교 교인들이 바뀌어져야하고, 기독교 교회가 바뀌어져야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교회조차도 ‘내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결국 우리 교회에 더 많은 교인들이 오고, 우리 교회가 더 부자가 되고, 우리 교회의 이름이 나게 해달라고 합니다. 얼마나 인간의 뜻입니까? 기독교 교인들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때문에 세상이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인생관이 바뀌어야합니다 교회관이 바뀌어져야하고, 가정관이 바뀌어져야합니다. 내 자식만 잘되고 우리 집만 잘되면 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행복할 수 없고,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고 함께 평화로울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이것을 실천하기란 참 힘듭니다. 나를 포기한다는 것, 얼마나 힘듭니까? 나를 버리는 다는 것, 참 힘듭니다. 참는다는 것 얼마나 힘듭니까? 새로운 인생관을 갖는다는 것,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관을 바꾸고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이므로 정말로 힘듭니다. 애를 쓰도 어렵습니다. 결심을 해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정말로 우리 속에 오시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제 자신이 체험한 부분인데,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집니다.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속에 주님께서 계시면 바뀌어 집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거기에 여러분이 더 자주 주님을 만나 뵙고, 주님을 더 귀하게 모시면 훨씬 빨라지게 될 것입니다. 나를 포기하는 것이 조금 더 쉬워지게 되고, 나를 버리는 것이 지난번보다 더 쉬워지게 되고, 더 잘 참게 되고, 나의 인생관이 바뀐 것을 스스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여, 복 있도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그 자신, 그자체가 복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화평하게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포함되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이것이 화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싸움을 말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치료해주면 참으로 행복합니다. 정말로 행복합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등록금이 없어서 등록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등록금을 조금 대주면 정말로 행복합니다. 돈은 이래서 벌어야하고, 모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그 자체로 행복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는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 말씀의 의미를 한 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부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6장 25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아주 현실적인 부분입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6:26-29).. 이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까?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복을 덤으로 더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부디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들이 행복합니다. 인생이 참 좋습니다. 거기다 하나님께서 또 복을 주신다고 하니 받아야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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