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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6) (계 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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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6) (계 3:7-13)


오늘 우리의 시대는 풍요의 시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의 마음에는 간절함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뜨겁게 사모하는 마음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나오지만, 나름대로 신앙생활은 하지만 그렇게 아쉬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고 매달려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뜨겁게 사모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구하라는 것입니다.  더 큰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다같이 따라서 하십니다.
"구하지 않으면 얻을 것도 없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구하십시오.  그냥 구하는 척하지 말고 생명을 걸고 정말 간절히 구하십시오.  구하지 않으면 얻을 것도 없습니다.  두드리십시오.  두드리지 않으면 하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사모하는 영을 주시옵소서."

1902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의 시대를 살면서 당시 많은 지식인들을 매료시키고 빠져 들어가게 했던 소위 맑스주의에 빠져서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됩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이상과 현실의 엄청난 괴리를 경험하면서 그는 마침내 공산당을 탈당합니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독일의 히틀러 추종자가 됩니다.  그의 세계 경영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광신적이고 전제적인 획일주의의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독일을 탈출하여 뉴질랜드로 망명을 가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인류 근세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한 권의 책을 써내게 됩니다.  이 저서의 이름이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이고, 이 책의 저자가 유명한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라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아주 중요한 하나의 전제를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주장할 때, 어떤 사람이 무엇이 옳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과학적인 타당성을 지니려면 그 스스로도 자신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사고의 개방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내 생각이 틀릴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지면 상대방이 이야기를 해 줘도 절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주 독선적인 사람이 되고 마음을 닫고 인생을 살게 됩니다.

칼 포퍼는 이런 개방성이야말로 자신을 발전시키고 역사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전제가 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고 당신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는 이런 개방적인 생각, 그래서 다른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자신을 발전시키고 보다 성숙한 인격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개방적인 사람을 가리켜서 열린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열려 있다'는 말은 개방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긍정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세 역사에 등장했던 대원군이라는 인물을 기억합니다.  그는 힘찬 기백과 리더십과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문을 닫아버리는 쇄국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국익의 손실을 가져왔던 어두운 과거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1세기의 소아시아에 존재하던 한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던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이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열린 문, 다시 말하면, 열려진 기회 앞에 효과적으로 응답함으로써 건강한 열린 교회를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교회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21세기의 교회로서 1세기에 존재했던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서 우리 교회가 어떻게 열린 교회가 되어서 이 시대에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기신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교회로서의 비전을 감당하기 위해 오늘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를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빌라델비아는 사데에서 동남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아주 작은 도시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 위치한 교회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7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여기서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시고 메시지를 주시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다윗이라고 하면 인물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아가 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타트(John Sttot)는 여기 다윗의 열쇠는 메시아 되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메시아 되신 주님이 이 권세의 열쇠를 가지고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문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는 권세를 갖고 계시지만 그분이 이 교회 앞에 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그는 문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는데 이 교회 앞에는 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일까요?  기회의 문입니다.  어떤 기회일까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이웃들을 끌어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기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 번 문을 열어주시면 우리들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십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분이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이 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문제는 이 교회가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런 열린 기회 앞에 가장 잘 응답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교회에 주시는 기회 앞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대답을 여기에서 얻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 중간 부분부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서부터 칭찬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칭찬으로 끝이 납니다.  이 교회는 책망이 없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책망 받지 않고 칭찬만 들었던 교회가 두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살펴보았던 서머나 교회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고난받는 교회, 박해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고난받고 박해를 받다가 순교자를 배출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를 위해서 순교까지 하는 서머나 교회에 주님께서 무엇을 책망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책망을 받지 않고 칭찬만 받았던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도 서머나 교회가 당했던 시련처럼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교회였습니다.  당시에 빌라델비아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고,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에서 쫓아내었으며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회당의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많은 돈을 헌납하면서 도시의 유력한 관헌들과 밀착해 있으면서 교회를 박해하는 데 있어서 최선봉에 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앙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위로와 격려의 말씀만 들었던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떤 칭찬을 받았습니까?
빌라델비아 교회가 칭찬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그 원인이 이 교회가 선교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들은 열려진 기회 앞에 문을 열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들었던 교회가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금까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축복하시는 면류관은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칭찬만 들었던 이들 두 교회에게만 나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순교와 선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것은 순교와 선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주님을 감동시키려면 둘 중에 하나를 하시면 됩니다.  순교하던가, 선교하든가.  이 시간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말씀해 보시기 바랍니다.
"순교하든가, 선교하십시다!"

감히 순교라는 말을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옆 사람에게 이렇게 바꾸어서 이야기하십시다.
"순교가 어렵거든 선교하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내가 순교하지 않고 살아 있거든 선교하십시오.

본문 8절을 다시 살펴보면 빌라델피아 교회는 규모상으로는 작은 교회였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교회를 평가할 때 문제의 본질은 교회의 크기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교적인 명령에 얼마나 순종하느냐는 것입니다.  순종이 한 교회의 질적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주님의 선교 명령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전도의 명령이고, 또 하나는 사랑의 실천 명령입니다.  아마도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 두 가지 명령 앞에 지속적으로 순종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실 빌라델비아 교회라는 명칭도 그래서 지어졌는지 모릅니다.  빌라델비아라는 말은 희랍어에서 필로스(사랑)와 아델포스(형제)라는 두 가지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본래 빌라델비아는 버가모 왕국 시대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 유명한 통치자였던 유메네스 2세(Eumenes)는 전쟁을 자주 치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치와  군사 지식이 탁월했던 동생 아탈루스 2세(Attalos 11, B.C 159-138)에게 내정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민의 지지도가 높았고 인기가 많았던 그를 로마 정부가 이용할 목적으로 그에게 왕위에 오르도록 충동했지만 아탈루스는 형을 배반할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형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아탈루스의 형제애'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빌라델비아라는 말의 유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도시는 형제의 사랑에 대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세기에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이 교회의 성도들 또한 이 도시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게 형제로서 사랑하는 것을 자연히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사랑에 목말라하던 그 시대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도시인들에게 이 사랑을 가지고 복음 전하며,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껴안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였을까요?  얼마나 본받을 교회였을까요?  참으로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아 마땅한 교회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를 세웠던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약속을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9절 이하를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소극적인 약속들이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상당히 괴롭히던 유대인들이 이 도시에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어느 날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그들을 그렇게 괴롭히던 사람들이 어느 날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그것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10절에 의하면 이들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장차 다가올 환난과 박해의 시간에 주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실제적으로 교회 역사에서 얼마 후에 교회에 엄청난 박해가 불어닥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 엄청난 박해를 피해 갈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끝까지 버틴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 교회는 잘 버틸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좀더 적극적인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적극적인 약속은 12절에 의하면 그들을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기는 자는"이라고 했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기둥을 뽑으면 지붕이 무너집니다.  그런 점에서 기둥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없어서는 안될 존재, 꼭 필요한 존재와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기둥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을 기둥처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꼭 필요하고 존귀한 존재로 지금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렇게 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이 보시기에 기둥 같은 존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둥 같은 존재, 주님의 붙들림을 받아 꼭 필요한 존재로 쓰임 받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들이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11절에서 이러한 성도들이 상급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면류관을 받도록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서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의 비전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1세기의 교회가 1세기의 칭찬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건강한 교회를 향한 비전은 무엇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 교회도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닫힌 교회가 아니라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열린 교회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신자를 향한 전도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교회 앞에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문이 닫힐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지금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 전도 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 앞에 전도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열려진 기회를 잃지 말고 전도해야 합니다.  문이 열려 있을 때 전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향한 전도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일본은 전도가 참으로 안 되는 곳입니다.  우리 나라보다 100년 이상 선교가 앞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복음율이 현저하게 낮습니다.  그런데 일본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그들에게도 전도할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2차 전쟁으로 나라가 연합군에게 패망했을 때라고 합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이 공허했을 때 그들은 복음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맥아더 장군은 미국의 교회에 이런 편지 한 장을 썼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랑을 기다리는 불쌍한 일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교사를 보내십시오."

그런데 그 당시 미국에는 선교사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간은 흘러가고 일본 사람들이 다시 경제 부흥을 일으키고 손에 경제를 쥐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로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기회가 지나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도 기회가 있을 때 하셔야 합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그리스의 시라큐스라는 도시에 어떤 동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앞머리는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 동상인데 어깨가 아닌 발에 날개를 달고 있었다고 합니다. 동상 아래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리시퍼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기회.  그대는 왜 날개를 발에 달고 있는가?  잽싸게 더 빨리 날아다니기 위하여.  그대의 앞머리는 왜 이렇게 무성한가?  내가 올 때 사람들이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그대의 뒷머리는 왜 대머리인가?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기회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회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올 때 붙잡아야 합니다.  전도에 관한 한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내일까지 미루지 마십시오.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내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열린 기회로 복음을 전하십시오.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가 배로 여행을 하다가 갑자기 전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을 끌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 끝에 탬버린을 치며 우스꽝스런 모습의 옷차림으로 배의 갑판으로 나왔습니다.  그가 치는 탬버린과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거기에 있었던 영국의 유명한 작가요 시인이었던 루디아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이라는 사람이 윌리암 부스를 보면서 빈정거리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니, 선생!  그렇게 천박한 모습과 천박한 악기로 소리를 내며 걸어오십니까?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그때 부스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이여, 만일 내가 이런 모습이 아니라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두 발로 탬버린을 두드려서 한 생명이라고 구원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오."

그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그를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열린 그리스도인, 열린 지도자, 열린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싱가포르에 가면 셀 교회를 하는 페이스 공동체 침례교회(Faith Community Baptist Church) 로렌스 콩(Lawrence Khong)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이 전도를 좀더 잘 해 보려고 기도하다가 마술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복음 마술을 배워 집회에서 마술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많은 비판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마술은 결국 속임수인데 그것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그런데 이 목사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스탭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이 비판에 대답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때 로렌스 콩 목사님이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비판은 기꺼이 참조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그 비판에 대답할 만큼 한가한 여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죽어 가는 저 영혼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도 방법론에 대해서 생각을 달리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그의 열려있는 그 마음은 소중하지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성도는 열린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내 방법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방법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솔직히 내 방법보다 그 사람의 방법이 훨씬 더 효율적일 수 있고, 감동적일 수가 있습니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열린 성도는 결코 자기의 방식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 방법과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성도가 열린 성도입니다.  이런 열린 성도들이 모여서 세워 가는 공동체가 열린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서 다가설 줄 아는 열려있는 성도들이 모여 있는 열려있는 교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우리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 교회로서의 열려있는 공동체가 될 수가 있을까요?

두 번째로, 먼저 성도들 상호간에 마음의 문이 열려져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이 교회 밖 세상에 나아가서 담대하게 복음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공동체 안에는 세상에서 경험될 수 없는 사랑이 충만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기의 교회는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에게는 세상이 갖지 못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가 작은 힘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공동체 안에 사랑이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불신자들이 기독교 공동체나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써놓은 글들이 남아 있습니다.  정치, 사회적인 문서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는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62년부터 113년까지 비두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Pliny the Younger)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로마의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기독교인들에 대한 활동보고서가 있습니다.  그 보고서의 한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무리들은 목숨을 걸고 서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관찰자에 의해서 보여졌던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1세기의 작은 기독교 공동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그 원인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의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에서는 경험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이 넘쳐나기를 축복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동일한 그런 사랑이 21세기의 우리 교회 안에서 다시 한 번 나누어지고 실천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만일에 주일 예배만을 의지하는 공동체라고 한다면 사랑이 있는 공동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저 주일에 한 번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우리는 결코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와서 조금 은혜를 받고, 조금 느끼고 간들 그래 가지고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교회가 목장 교회를 강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작은 교회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대안,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목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목장에 열심히 참여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작은 모임에서 당신의 마음을 여십시오.  내가 세상에서 살면서 받았던 고통이나 아픔이나 상처들에 관해서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동일한 아픔과 고통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 들어보십시오.  거기에서 서로에 대한 진실한 이해가 시작될 것입니다.  사랑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서히 우리 안에는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마음을 열고 마음을 나누는 그 열린 마음의 자리에 성령이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교회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과 한줌 밖에 안 되는 목장의 식구들인 우리가 우리의 작은 능력으로 선교와 사랑의 명령 앞에 순종해서 이웃들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공동체들이 불빛처럼 발하기 시작할 때,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21세기의 빌라델비아 교회가 태어나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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