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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손 그는 누구인가? (삿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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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 그는 누구인가? (삿 13:1-7)


몇 해 전에 중국 쓰촨성에 일어난 지진으로 10만 여명에 달하는 사상자거 발생을 했습니다. 그때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어린 학생들의 죽음이었습니다. 학교 건물이 무너져 학생들 수백명이 한꺼번에 매장 된 것이 부지기 수였습니다. 700개가 넘는 학교들이 무너졌다는 중국 당국의 통계가 나오면서 부실 공사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졌습니다. 어린 학생들의 희생이 더욱 안타까 왔던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가능성을 한번 꽃피워보지도 못한 채 죽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도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엄청난 축복과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실패로 끝낸 인물, 다름 아닌 삼손의 이야기입니다. 실패한 인생이 모두 안타깝기는 하지만, 삼손의 실패가 가슴 아픈 것은 그가 지닌 자원이 참으로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경건한 부모를 두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잉태되었습니다. 나실인의 서약을 통해 일생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가 있었고, 성령의 임재가 귀했던 구약 시대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한한 육체의 힘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사자를 염소새끼 찢듯 찢어버릴 정도로 힘이 셌습니다. 마른 당나귀 턱뼈, 그 보잘 것 없는 뼈 하나로 천명이 넘는 불레셋 사람을 쳐 죽였고, 기둥을 뽑아서 집을 무너뜨릴만큼이나 힘이 대단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육체적인 힘이 상대적으로 별게 아니지만, 힘이 곧 남자다움이었던 그 시대에 그는 엄청난 축복과 능력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능력과 자원으로 말하자면 그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능력과 자원을 받았던 삼손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오늘 날 우리 주변에도 삼손처럼 큰 자원과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삼손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16:21절에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멀쩡하던 두 눈이 뽑혀나가고 그 엄청난 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놋줄에 매여 맷돌을 돌리며 세상의 구경거리가 된, 이 삼손을 보세요!! 태어날 때부터 이런 모습이었다면 차라리 덜 비참했을 텐데, 한때 불레셋을 덜덜 떨게 만들었던 큰 용사 삼손이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가 오늘 이 말씀을 붙잡고 여러분과 한 주간 삼손을 붙드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지금 성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세속의 썩은 물줄기가 터진 부패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살면 실패한다는 교훈성 설교를 하려고 본문을 붙들었나요? 맞습니다. 저는 저 자신뿐만 아니라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심각히 고민해야 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할 우리 시대에 책임에 대해 생각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삼손을 설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삼손을 붙잡고 싶었고 또 이렇게 설교하는 것은 히11:32에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이 말씀에 보면 다윗과 사무엘 같은 기라성 같은 믿음의 전당에 실려 있는 그들과 동일하게 삼손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성경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의 상식에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이 엄청난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삼손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바로 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 앞에 선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실패에 자리에 있고, 이제 막다른 골목에 섰다는 절망의 자리에 있다할찌라도 다시 일어서서 인생의 반전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여러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여기 "다시"라는 말은 "계속 또 다시"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나 봅니다. 하는 것이라곤 다시 악을 행하는 것뿐입니다. "악을 행했다"고 했을 때 우리말 번역엔 생략이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엔 정관사가 붙어 "그 악을 행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그랬듯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바알을 섬긴 바로 그 악을 말합니다. 악을 행하면 그 다음 반드시 따라오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여호와께서 40년 동안 블레셋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겼다" 이 구절은 사사기에 너무나 잘 나타나는 구절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삿21:25절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구절은 사사기의 결론 구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이것이 멸망을 치닫는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왕 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제 마음대로, 제 멋대로 제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여기 40년은 이스라엘이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이방을 섬긴 고통의 기간을 말하는데 지금까지 있었던 압제와 고통의 기간 중 가장 긴 기간, 가장 불어난 수입니다. 입다 때에 고통의 기간을 18년, 사사로 일한 기간을 6년 - 고통과 사사의 사역 기간이 역전되더니 압제와 고통의 기간이 삼손이 나타날 무렵엔 40년으로 팽창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삼손시대에는 "백성이 부르짖었다"는 표현이 어디에도 보이질 않습니다. 이제 아무리 고통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만큼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심각해졌다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레셋의 지배하에 놓였지만, 놀랍게도 그 속에서 아파하지도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간구하지도 않습니다.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 채 불평 없이 불레셋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 해답은 블레셋의 정책에 숨어 있습니다. 불레셋은 철기 문화가 매우 발달하여 군사력이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태어날 즈음에는 이스라엘을 힘으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화친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스라엘과 교역을 하고 자기 아들 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결혼하도록 허용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불레셋의 지배를 받았지만, 큰 불편함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평안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불레셋의 지배를 받으며 40년 동안이나 평안하게 지냈습니다. 

여러분, 시험관 속 개구리를 잘 알 것입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넣으면 깜짝 놀라서 뛰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개구리를 찬물이 든 시험관에 넣고 천천히 물의 온도를 높이면 물이 뜨거워져도 전혀 거부하지 않고 서서히 익어서 죽어 갑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위기는 이렇게 ?아 왔습니다. 이무런 아픔과 눈물과 고통과 부르짖음 없이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말씀을 여기에 기록하셔서 우리에게 읽도록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장 큰 위기 역시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강장 큰 위기는 폭풍과 눈물과 고난이 아니라 평안으로 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불레셋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시험관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시험관은 다름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우리를 영적인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험관이 될 수 있다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요일2: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야고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강조합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세상을 사랑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과 원수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닌 오늘 교회에 있는 우리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이 세상에 대해 말하는 전부가 아닙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빛처럼 어두움 가운데로 들어 가야하고 소금처럼 짠 맛을 내기 위하여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정말 후회함이 없는 주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갑니까? 아니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이미 세상에 젖어 그것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하는 사사가 바로 삼손입니다. 절망의 시대, 절망의 땅에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도 들리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은 한 구원자를 준비하십니다. 2절입니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삼손의 부모는 단 지파 사람들입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이 지파 사람들은 다 북쪽 라이스라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부모들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한나님 곁을 떠난 그 때에 삼손의 부모들은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자손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자손이 없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닌 수가 없습니다. 

기업을 이을 수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이 나나요? 창세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아브라함아, 내가 네게 땅을 주마”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점잖게 그러나 실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이 제게 땅을 주시면 뭘합니까? 결국 저의 모든 땅과 기업은 종 엘리에셀의 것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손이 귀중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삼손의 부모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아이를 갖지 못해 고민하고 있던 그들에게 어느 날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이를 약속합니다. 오늘 날 우리로 말하면 기적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기적이 일어날까요?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납니다. 롬8:11절에 보시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연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할렐루야!! 죄를 이기는 기적, 시험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따라가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변호시키는 능력을 우리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적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다름 아닌 나실인의 서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히브리어로 ‘나자르’라고 합니다. 구별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서약을 따라 삼손은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게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 보편화 된 음주 문화와 부정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야만 합니다. 세상과 구별 된 것, 이것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축복에는 언제나 의무가 따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방종이 아닌 헌신으로 이끕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자녀 삼으며, 거룩한 성령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여 죽을 우리 몸을 살리는 기적을 약속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비로 거룩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름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에 달려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그를 고향에서 불러냈셨을까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 된 우리를 예수 믿도록 불러내셨습니까? 왜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자! 여러분! 25-25절을 보세요.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삼손을 감당치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받아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삼손은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였습니다. 홀홀단신 적진으로 쳐들어가 적병 삼십명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여우를 삼백 마리나 붙잡아 꼬리에 횃불을 달아 적군의 곡식단을 다 태워버리기도 했습니다.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삼손의 삶은 들릴라의 유혹 앞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습니다. 멀쩡한 두눈이 뽑혀 나갑니다. 놋줄에 매여 짐승이나 돌리는 맷돌질을 하는 비참한 자리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삼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삼손이 눈이 뽑혀 보지 못하게 되었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이 떠나면 현재도 미래도 볼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적군의 맷돌이나 돌리듯이 헛수고만 하게 됩니다. 능력을 잃은 삼손이 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광대가 되어 웃음거리가 되었듯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우리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눈 빠진 과거를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맷돌을 돌리며 재주를 부리는 처참한 오늘을 가슴만 치고 이를 갈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패는 창피한 것도 아니며, 두려운 것도 아닙니다. 실패한 과거를 붙잡고 절망에 빠져 살아가는 인생이 실패한 인생입니다. 삼손은 비록 종이호랑이로 전락하여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그러나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국을 위기에서 건져냈습니다. 분명 말씀을 드리지만. 그는 완벽한 자가 아닙니다. 그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우리와도 너무도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만져 주시지 않는다면 일어설 수조차 없는 그를 세워 세상을 당신의 영광을 펼쳐 보여 나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이 강단에서 수없이 외치는 말씀을 또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한 우리를 결코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쓸모없으면 용도 폐기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을 가지고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그 자리에서 다시금 당신의 보혈로 내 영을, 내 삶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부흥 집회에서 꼭 하나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거굴하지도 못해!! 나는 이런 저런 약점이 있어!! 아니요 더 나와서 은혜를 구하십시오. 삼손,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머리털이 밀려 힘이 없어졌어도, 눈동자가 빠져 소경이 되었어도 주저앉아 눈물만 짓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갈아야 할 맷돌을 쉼 없이 갈고 또 갈았습니다. 큰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아름드리 기둥을 붙잡고서 기도했습니다. 최후의 순간에도 희망과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성령님께 붙잡혀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줄로 확신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항상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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