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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침묵과 거절, 모욕을 뛰어 넘어 ...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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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거절, 모욕을 뛰어 넘어 ... (마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리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겠다며 목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 믿는 데 1년에 비용이 얼마나 드나요. 담뱃값 정도면 되나요?” 
목사는 엉겁결에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0년쯤 지난 뒤 목사는 집사가 된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요즘은 예수를 믿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나요.” 
그 분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해가 갈수록 제가 계산한 것보다 비용이 더 드네요. 담뱃값으로는 어림도 없더군요. 하지만 기왕 예수님을 믿을 바에야 싸구려 예수가 아니라 비싼 예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비싼 예수’라는 용어는 독일 신학자인 본회퍼 목사의 저서 ‘나를 따르라‘에 처음 등장했던 용어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는 데에는 아무런 대가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전적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는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16:24절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치르어야 할 댓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은 오늘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어떤 댓가를 치르고 있습니까? 
진정한 복을 누리고 하늘나라의 영원한 복을 소유하기 위해 어떤 댓가를 치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봉독한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지나가실 때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께 나왔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이방인 여인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흉악한 귀신들려서 고생하는 딸이 있었습니다. 
딸의 병을 고쳐보려는 간절한 마음에 이 여인은 지나가는 예수님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23절에 보면 한 마디도 대답지 않았다고 했고 24절에 보면 나는 유대인외에는 상대하지 않는 다는 투로 말씀하셨으며 26절에는 어떻게 자녀의 떡을 어떻게 개에게 주겠냐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지 않으시니까 23절 끝에 보면 “큰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외에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투의 말씀에는 그저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리고 자녀의 떡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말에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산다면 그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만큼 이 여인은 절박했습니다. 

결국 이 여인을 주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28절을 봅시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인의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절박한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다. 딸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우린 딸의 병이 나았다는 가시적인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결과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 여인이 주님께로부터 그 믿음을 인정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린 이 여인의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그것은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 그리고 진정한 복을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치루어야 할 댓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가 치루어야 할 댓가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기도해도 응답 없다고 느껴질 때 그때가 바로 내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며 넘어야 할 산입니다. 그리고 치루어여야 할 댓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목마른 여인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관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다윗의 자손으로 즉 이스라엘의 주권자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울면서 통곡하며 간구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 고백이야 말로 그가 얼마나 절박한 순간에 있었는지 한마디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흉악한 귀신에게 시달리는 딸을 안고 찾아온 이 여인의 절박함에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문 23절에서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고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고난과 아픔의 시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간절히 찾을 때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실 때도 있지만 때때로 깊은 침묵 속에 가만히 계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침묵에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일본의 크리스찬 작가 ‘엔도 슈사꾸’ (遠藤周作·1923∼1996)의 소설 중에 ‘침묵’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화두로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천주교 신도인 농부 두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굴하지 않고 순교당하는 두 농부를 숨어서 바라보던 신부가 그들을 살려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오기는 커녕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신부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까?” 라고 울부짖으며 애원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고요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난에 참예하고 있노라” 

우리의 고통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그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기 때문이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사59:1)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깊고 오묘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에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더 깊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침묵을 극복해야합니다. 
우리의 고통에 침묵하실 때“하나님의 응답이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내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믿음이 어디 있는가”"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침묵의 단계를 뛰어 넘어 살아계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고 그분에게 한걸음 가까이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거절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침묵을 더욱 소리치며 극복했습니다. 제자들이 이 여인이 뒤에서 계속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어떻게 좀 해주시라고 예수님에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고 하심으로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린 하나님께 거절되는 경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의 근본적 진리는 하나님은 당신에게 나오는 자를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마 12:20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이사야서 42:3절을 인용하셔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 라고 했습니다. 특히 그 다음절 21절을 보면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를 때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거절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나서에 보면 하나님께 거절당한 한 선지자를 봅니다.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는 중에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바다가 그를 거절한 것이지만 내면으로 보면 하나님이 요나의 안전한 항해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잔잔한 항해를 예견했던 뱃사공들은 갑자기 불어 닥친 원인 모를 풍랑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풍랑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결국 사공들에 의해서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은 풍랑 속에서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위해서 커다란 고래를 한 마리 준비하시고 요나를 삼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견디게 했습니다. 
요나가 3일 동안 캄캄한 물고기 위장 속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의 생명이 보호 되었을 것입니다. 그 3일 기간 동안 요나는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요나의 기도를 들어봅시다. (욘 2:4-5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당하는 것 같은 환경이 오더라도 의심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요나처럼 주의 성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여인은 거절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여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거절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뒤에서 소리치던 자리에서 이젠 예수님 앞으로 바짝 다가와서 그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거절은 여러분의 환경에 작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 구한 것 이루어지지 않아도 뒤로 물러나면 안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님 앞으로 하나님 목전으로 나와서 꿇어 엎드려 부르짖고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절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거절을 극복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주님께로 나아가는 자가 다시 싸매시고 어루만져 주시는 은총을 받습니다. 요나를 다시 살려서 니느웨 성에 복음을 전하여 그 성의 수십만 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지는 사역을 하게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거절을 극복하시고 쓰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는 모욕입니다. 
셋째로 뛰어넘어 극복해야 할 것은 바로 인격적 모욕의 단계입니다. 
거절의 단계를 지나 정말로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단계가 모욕의 단계입니다. 명예나 자존심 그리고 최소한 보장 받아야 할 사람으로서 인격적인 대접도 다 짓밟아 버리고 몽땅 뭉게 버려서 자아가 허물어진 상태가 모욕의 단계입니다. 
본문에서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로부터 정말 듣기 싫은 모욕적인 말을 듣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은 너는 개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고귀한 자녀의 떡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극단적인 인격 모욕적인 언사입니다. 

여러분 혹시 신앙 때문에 또는 하나님 때문에 이런 인격적 모멸감을 느낄 정도의 모욕을 당해 보셨습니까?
정말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그런 상황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이것은 신앙의 가장 높은 차원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마지막 시험입니다. 모욕의 단계를 견디면 끝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잘 나가다가 이 단계에서 넘어지고 맙니다. 
고전 4:11-13절 까지 내용을 보면 바울이 주를 위해 받았던 모욕의 단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이 말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순간 만큼은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를 박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개만도 못한 존재” 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을 때 이 여인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그게 누가 되든 화내고 기분상하여서 욕을 하며 물러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런 심한 말을 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믿음의 순수성 확인 때문입니다.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이 아닌 어떤 이해 관계에 얽혀서도 아닌 그저 순수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그 믿음을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믿음 때문에 모욕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라고 하신 자기 부인과 같은 의미입니다. 자아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아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가장 높은 단계는 “나와 세상은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라고 고백한 찬송 288장의 내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신의 인격은 십자가에 못 밖아 없어지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내 안에 들어와 예수의 마음이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결국 모욕의 단계까지 이르러 여인의 믿음은 주님께 인정되어집니다. 28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인은 원하던 것 다 얻었습니다. 침묵 같았는데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거절 같았는데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모욕 같았는데 모욕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루어야 값 비싼 댓가가 있습니다. 너무 싼 예수를 믿으려 하지 마십시오. 비싼 예수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침묵과 거절을 뛰어넘고 모욕을 뛰어 넘어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큰 복을 받고 누리는 차원 높은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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