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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백하는 믿음 (요 9: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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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는 믿음 (요 9:20-34)
  

믿음의 성숙은 단계적이다. 체험이 없는 믿음은 분명한 확신의 단계로 세워지기 어렵다. 우리는 지난 주에 듣는 믿음과 보는 믿음이 서로 보완을 하며 예수님을 더 잘 믿게 해준다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보여주는 표적과 기사를 보게 되면 나도 믿고 너도 믿게 된다. 하나님이 들려주는 말씀을 귀로 듣고 믿고 나가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는 체험을 갖게 된다. 신앙은 체험이다. 체험이 있는 자가 되면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신앙의 태도를 갖게 된다.

금번 지방회 때 어느 장로님께서 심사를 받으실 때 교회를 다니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장로님은 몸이 아파서 다 죽게 되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면 산다고 해서 교회를 다니는데 그 나간 날이 부활절이었다. 담임목사님이 부활절 계란을 들고 “이 계란은 부활의 상징입니다.”라며 설교를 하고 이 계란을 부활의 표로 이웃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부활의 상징인 계란을 먹으면서 나도 부활에 참여한 것임을 믿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계란을 들고 와서 계란을 먹었다. 간이 악화되어 매일 죽도 제대로 못 먹는 차에 먹고 부활을 체험하라고 하는 말로 들려서 계란을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 탈없이 소화가 되었다. 너무도 감사해서 그 이튿날에는 밥을 먹었는데 그때부터 살아나서 두 다리에 힘이 생기고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번 지방회 자격 심사에 들어왔기에 물어보니까 죽을 몸을 살려주신 분이 주님이기에 자신은 추우나 더우나 주님에게로 달려간다고 고백을 한다. 살려주신 주님에게 충성하며 살 뿐이라고 말한다. 이 여자 장로님은 살아난 체험, 간암에서 치료된 체험이 있기에 새벽에 일어난다. 왜 저렇게 기도의 단을 쌓을까? 이는 강요가 아니다. 굴레가 아니다. 체험의 신앙이 빚어낸 자발적인 신앙의 태도다. 

체험은 신앙의 소중한 에너지다. 보는 믿음, 듣는 믿음을 통해 체험을 가지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온다. 그것이 고백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살리셨어요.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어요.”라는 체험이 없으면 고백을 못한다. 흉내내는 고백은 할 수 있어도 진정한 속내에서 솟아나는 고백은 할 수 없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날 때부터 맹인된 이 사람을 보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이 된 이 사람을 보라. 그는 이웃 사람들 앞에서 고백한다.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라고 물어올 때 요9:11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눈을 뜨게 된 이 사람의 고백은 이렇다.  

1. 사실적인 고백이다. (요9:11)

이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덧붙이거나 숨기지 않았다. 체험하지 않은 이야기는 가감이 있다. 사람이 적당히 둘러대는 이야기는 허구가 되기 쉽다. 그러나 체험을 이야기하기에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가 눈을 뜨게 하셨다.”

여기 그의 부모를 보라. 나면서 소경이었던 아들이 눈을 뜬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아들의 체험이지 자신들의 체험이 아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질문 앞에 고백을 담지 못한다. 다만 얼버무린다. 요9:21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사실적인 고백대신 모든 물음의 대답을 피해간다. 그들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면 출교하기로 했기에 무서움에 압도 당하고 만 것이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고백하는 믿음으로 나갈 수 없다. 관념의 신앙은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2. 담대한 고백이다. (요9:25)

요9:25을 보면 눈을 뜬 이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대답한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유대인은 이 사람의 고백 앞에 “어떻게?”라고 묻는다.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죄인에 불과한 예수, 보잘 것 없는 예수가 어떻게 눈을 뜨게 하였는가? 유대인은 출교시키는 결의를 앞세워 예수가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적 고백을 은폐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욕까지 하면서 예수는 한낮 작은 죄인 일뿐이라는 고백을 강요하게 하였다. 허나 이 사람은 담대하다. 핍박을 받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담대함으로 외칠 뿐이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요9:25에 이어 요9:30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모세의 제자라 자처하는 유대인들, 이 사람에 대해 무지한 것을 보고 눈을 뜬 이 사람은 단호하게 외친다. 예수가 내 눈을 뜨게 하였다. 두 번, 세 번의 물음 앞에서도 달라질 것은 없다. 예수가 보게 하셨다. 욕설과 성가신 괴롭힘, 출교의 결의 앞에서도 달라질 것이 없다. 체험은 담대한 용기의 고백을 쏟아놓는다.
  

3. 영향력을 끼치는 고백이다. (요9:33)

고백은 사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고백하므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 역사하심을 증거케 된다. 고백은 사실 행동하는 신앙의 출발이다. 불의에 둘러싸이고 불신에 둘러싸이고 불법에 둘러싸여 있어도 그 속에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행동하는 신앙이다. 죽음에 던져지고 다수의 사람들의 악함에 놓여 있어도 구원의 예수, 치료의 예수, 보게 하신 예수를 고백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신앙의 표현이다. 그리고 고백하는 신앙은 영향력이 된다. 

요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 눈을 뜬 사건을 겪고 보니 “이 사람은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다. 예수는 땅에서 온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다. 예수는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는 이 고백이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가려는 유대인들의 가슴에 쓰나미처럼 밀고 들어갔다. 

그래서 그들은 요9:34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맹인이었던 자의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 강력한 영향력이 되었을 때 유대인은 반발하였다. 눈 뜬 소경의 고백이 진리가 되고 고백이 되어 그들의 불신을 깨뜨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게 하는 가르침의 권세가 되었기에 “네가 우리를 가르치느냐?”하고 쫓아내었다. 눈 뜬 소경은 가르치는 교사도 아니었다. 다만 바리새인들 앞에 고백한 것이 가르침으로 느껴지는 영향력이 되어버렸다. 

체험 신앙은 고백 속에 능력이 담긴다. 영향력이 담긴다. 그래서 주님은 고백을 요구하시고 고백을 듣기를 원하시며 고백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눅8:40~48에 나오는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여인의 이야기를 보라. 옷자락에 손을 대므로 병에서 놓임 받은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묻고 계신다. 혈류 근원이 마르고 고침을 받은 이 여인을 그냥 내버려두면 부끄러운 질병의 여인이었음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묻고 계신다. 내가 손을 내밀어 주의 옷자락을 붙잡았고 치유함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믿음을 요구하고 계신다. 고백하므로 그의 삶이 더욱 돈독해지고 힘이 있고 은혜 입은 사람으로 세워지기에 고백하므로 더 큰 축복, 또 새로운 축복을 받을 수 있기에 고백을 원하신다. 

그렇다. 입술의 고백, 고백하는 믿음이 보는 믿음과 듣는 믿음에서 따라오는 다음 단계다. 혈류병에서 치료 받은 여인은 예수님께 엎드려 고백했다.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백하였다. 그때 예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해 주셨다. 고백하는 믿음은 치료의 표적을 넘어 구원의 은혜와 평안의 삶을 선물한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을 열어 고백하는 믿음, 우리는 이 믿음이 구원을 가져오고 이 믿음이 행동하는 믿음의 시작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자.   

나는 중학생 시절, 학교에 다닐 때였다. “너 연애당에 다닌다면서?” 교회 다니는 나를 친구들이 그렇게 조롱할 때 정말 슬펐다. 그러나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너 교회 다니며 까불지마” 하고 주먹이 날아왔다.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왜 주먹이 날아왔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이제 보니 이는 핍박이었다. 그러나 나는 교회 다니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냐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지금에 와서 보니 고백이었다. 교회에 모든 것을 걸고 다니는 날 이해 못하시는 아버지가 금족령을 내렸다. 그래도 몰래 몰래 예배당을 갔다. 

어느 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지!’ 하는 그 결심이 말씀을 듣다가 마음 속에 비수처럼 꽂힌 이후 나는 크리스챤 예수쟁이라는 이름을 갖고 사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나는 고백한다. 주님의 사랑, 자신을 다 내어준 예수님 앞에 고백한다. 보는 믿음을 주신 분, 예수님! 듣는 믿음을 주신 분, 예수님! 고백하는 믿음을 주신 분, 예수님! 행동하는 믿음을 주신 분, 예수님임을 고백한다. 예수님이 나의 전부이며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체험적 신앙을 통해 자라나라. 언제 어디서든지 고백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 그러면 더 큰 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하’자도 모르던 내가 목회자가 되고 쓰임 받는 사람이 된 것은 바로 고백하는 믿음 때문이다. I am a real Christian! 어디서든지 고백하라. 식당에서든지, 회사에서든지 편의 시설에서든지 항상 고백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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