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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쁨, 사랑에 있습니다 (요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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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사랑에 있습니다 (요 15:1-11)


얼마 전 신문에 실린 기고문을 읽었습니다. 글을 쓴 분은 일본에서 파 견 기자로 일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한국에 와서 운전면허증을 갱신하게 되 었습니다. 서울면허시험장 접수창구에는 여직원 서너 명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 다고 합니다.여직원 뒤에 두 줄로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죽 앉아 일 없이 지켜 만 보고 있는 일본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보였습니다. 

그 분은 서류를 접수한 후 기다리는 동안에 점심을 먹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때 직원이 말했습니다. <그냥 잠깐만 계세요. 금방 됩니다.> 3 분쯤 후 직원이 새 면허증을 내밀었습니다. 손에 쥐어보니 기계에서 금방 꺼내어 따스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빨리 되다니, 일본 같으면 직장에 하루 휴가를 내고 아침부터 와서 기다려 저녁에나 되는데, 내 나라가 이렇게 발전했나?> 새삼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미국은 두세 달이나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대한민국 정말 놀랍게 좋아지고 발전했습니다. 우린 지금 대단 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예전의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예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나요? 몇 장의 사진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진들> ...... 옛날 생각 나시지요? 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잘 살고 있습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나라에 살면서도 우리는 별로 감 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것들이 있다고 합니 다. 처음 인천공항에 내릴 때 그 규모와 빠른 입국 절차와 공항직원들의 친절에 놀란다고 합니다. 시내로 진입하면서 한국의 발전된 모습에 놀란다고 합니다. 그 리고 조금지나면서또 놀라는데, 그것은 사람들얼굴이 모두 화난듯 굳어있음 에 놀란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굳었습니다. 별로 행복하지 않은 듯이 보입니다. 

작년 1월 25일, 세계 주요 30개국의 행복지수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한국은 최하위 수준인 25위였습니다. 지난해 영국 신경제재단(NEF)의 국가별 행복 지수에서도 한국은 143개국 중 68위였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도 기쁘지 않을까요? 전에 우리교회 집회에 오셨던 장경철 목사님은 <기쁨을 유통하는 삶>에서 그 원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쁨의 생활은 2층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1층과 2층에서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1층입니다. 1층이 없으면 2층은 당연히 없으니까요. 그런데 1층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감각>이라고 합니다. 감각이 살아있으면 작은 것에도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감각이 죽은 사람에게는아무리 좋은 것을가져다 주어 도 기뻐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죽은 감각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1층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감각을 살리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죽은 감각을 살아나게 만드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 평생을 살면서 정말 감각이 예민했던 때는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별 것도 아닌데 가슴이 설레던 때는 언제입니까? 다름 아닌 사랑할 때입니다. 연애를 해 본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어제도 우리 교회 집사님 따님의 결혼식에 다녀 왔습니다. 신랑 신부가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별 의미 없는 몸짓 하나 하나에서도 행복이 보였습니다. 이 때는 문자 한줄, 전화 한통에도 가슴이설렙니다. 인터넷이나 전화가 없던 시절의 연인들은 그림 엽서 한 장도 너무 소중해서 손 때가 묻을정도로 보고 또보았습니다. 쪽지 메모 한장도 책사이에 꽂아서보 관했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건넨 단풍잎 하나에서도 기쁨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왜이렇게 합니까? 그가슴에 사랑이끓고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하늘도,별 도, 꽃도, 사람도, 온 세상도 기쁨으로 활짝 웃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어도 기쁘고 행복합니 다. <어떤 외식>이라는제목이붙은그림 몇컷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한번보 십시오. ***** 무슨 이야기인지 금방 다 아셨지요? 이 부부는 매우 가난해서 만삭 의 아내가 먹을 게 없습니다. 두사람은 우는대신에 마트에 갑니다. 거기서 구경도 하고 맛보기 음식으로 배를 채웁니다. 참 마음 아픈 장면이지요. 그러나 두 사람은 행복해 보입니다. 여러분, 누가 기쁘고 행복할까요? 사랑의 터에, 사랑이 란 재료를 사용해서 지은, 사랑의 집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행복하고 기쁨이 충만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계 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라고 말씀합니다. <내 기쁨>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기쁨이 있 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기쁨은 어디서 왔습니까? 다름 아닌 사랑에서 온 기쁨이었습니다. 그 바로 앞 10절에 기쁨의 이유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10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할렐루야! 

예수님은 당신이 <그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란 성부 하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계셨고, 그 사랑으로부터 기쁨이 충만하셨 습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354-430>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 명하면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사이에 사랑의 일치가 있 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예수님은 기쁨을 얻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참 기쁨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결코 그 누구도 참 된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느 본당 신부의 일기>라는 영화를 아십니까? 이 영화는 1951년에 만 들어진 오래된 흑백 영화입니다. <어느 본당 신부의 일기>는 유명한 소설가 <조 르주 베르나노스>의 작품인데, 1634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프랑스 문학 아카데미 인 <아카데미 프랑세즈, Academie francaise>로부터 소설부문 대상을 받은 명작입 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930년대에 젊은 신부가 암브리코트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부임합니다. 그는 성실과 친절로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합니다. 그는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자신 의 무능함을 한탄하면서 우울증에 빠집니다. 그 모든 사연을 일기로 적습니다. 
그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중 하나는 이웃에 있는 백작 가정문제였습니 다. 백작부인은 아들이 어려서 죽은 후로 마음 문을 걸어 잠그고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딸의 가정교사와 부정한 관계를 맺어도 모른 척했습니다. 아들 사진만 들여다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신부는 그녀를 찾아가 대화를 나눕니다. 아들을 먼저 데려간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아들 사진 을 보면서 집착해도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아들을 붙잡지 말고, 천국의 아들에게로 나가는 것이 순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 라고 설득합니다. 

얼마 후 신부에게 편지가 도착합니다. <한 아이가 나를 고독하게 만들 었다면, 한 아이가 나를 고독에서 끌어냈습니다. 신부님은 어린이입니다. 하나님 이 신부님을 영원히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후 백작 부인은 죽게 되는데, 신부는 부인의 시신이 평안한 미소로 가득한 것을 보고 그녀가 하나님의 은총으 로 들어간 것을 보고 안심합니다. 

소설의 끝 부분에 어떤 사람이 죽어간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가는 장면 이 나옵니다. 그런데그가도착하기전에 병자가세상을 떠나서 그를 위해 기도 해 줄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 때 신부가 말합니다. <아무려면 어떤가? 모두 가 은총인 것을....> 그리고 얼마 후 신부도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결국 그 자 신도 하나님의은총에 자신을 맡기게되는것이지요. 이 소설은 우리 인생은벽 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기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고통, 번뇌, 삶의 무게에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 모든 것이 우리 얼굴에서 웃음을 빼앗고, 우리 마음에서 기쁨을 빼앗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불행하다고말합니다. 저는이 시간우리안에 기쁨이회복되길원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기쁨을 가지길 원하셨습니다. 11절을 다시 보십시 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 만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기쁨이 충만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여러분,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을 얻으셨습니다. 여기서 사랑과 은총은 하나 님의 품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품에서 해결됩니다. 그 품에 안기십시오. 그 품에서 행복하시고, 기쁨을 누리시길 원합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을 보면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할렐루야! 여호와로 인한 기쁨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자그 다음이야기를해봅시다.하나님의사랑 안에참 기쁨이있다면, 우리는 어떻게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겠습니까? 10절을 다시 한 번보 십시오. <내가아버지의계명을지켜그의사랑안에거하는것같이>라고했 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비결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 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논리의 순환이 숨어 있습니다. 그 다음 질문은 <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계 명을 지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계명을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바로 여기서 다시 사랑이 나옵니다. 계명을 잘 지키려면 하나님의 사 랑을 받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감격,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다짐이 있을 때> 계명을 지키기 됩니다. 사랑 안에서 하면 어려운 계명도 힘들게 억지로 지키는 게 아니라, 쉽게 기쁨으로 지키게 됩니다. 

무엇이나 사랑으로 하면 쉽습니다. 새벽밥은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네 어머니들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된 몸으로 새벽밥을 지어 도시락을 두 개 씩 싸서 보내면서 몇 남매씩을 키워냈습니다. 다 사랑으로 하신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가를 바라지 않 고 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돈을 위해 구두를 닦는 사람과 아버지를 존경하기 때문에 구두를 닦아드리는 아들은 다른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는 것에는 기쁨이 따릅니다. 결국 기쁨은 하 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그 분의 계 명을 지키고, 그 기쁨을 누리길 원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을 한 가지 비유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 비유는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살 수있고, 열매를 맺을수 있습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 어지면아무열매도맺을수없을뿐만 아니라,죽게됩니다.4절을보세요.<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 리라> 주님께붙어있지않으면,다시말해그사랑안에있지않으면열매가 없습니다. 아무 열매도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기쁠 수 있겠습니까? 그 때의 초라한 모습을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 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 르느니라> 포도나무이신 주님으로부터 떨어진 사람, 그 사랑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참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 성도의 기쁨, 성도의 행복은 그 원천이 분명합니다.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받고있다>는확신보다 우리에게더 큰기쁨을가져다주는것은 없습니 다. 아빠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어린아이가 그 품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바로 그 모습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이런 기쁨은 원초적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은 <자신이 원하는 무엇을 얻었기 때문에 생기는 기쁨 그 이상>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돈, 명예와 영광을 얻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모든 기쁨의 원조입니다. 이 기쁨은 얻기는커녕 아끼던 돈과 명예를 다잃어버린사람, 그래서 기뻐할 일이 하나도없어 보이는사람도 느낄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의사로부터 더이상 치료의방법이 없다는 마지막말을들 은 환자까지도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게 만드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독 일의 <본 훼퍼, Bonhoeffer, Dietrich, 1906-1945>목사님은 히틀러 축출 음모에 가담 했다는 죄로 39세의 아까운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그 분은 교수형을 받기 전 감옥의 동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나의 새로운 여 행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결코 마지막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새로운 여행을 위 해 출발합니다.> 목사님이 죽음 앞에서 맛본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 람만이 맛볼 수 있는 근원적 기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 습니다. 지고의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기쁨은 환경이 조금 어려 워진다고 없어지는 시시한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서, 그 분의 계명을 기쁨으로 지키면서,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안에서 솟구치는 기쁨입니다. 

미국 최대 신학자요 목회자 중 한 분인 <조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 1703-1758>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무한하신 분, 최고의 존재, 영원하신 여호와를 사랑하고 순종하고 경배하고 송축하고 찬송하는 즐거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즐거움, 그 분의 아름다움과 탁월함과 영광을 묵상하는 즐거움, 인류와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을 묵상하는 즐거움, 그의 무한하신 선과 놀라운 인자를 묵상하는 즐거움, 세상의 창조주요 통치자인 하나님과 대화하며 성령님과 교제하는 즐거움, 우리의 본분을 다하며 인간답고 아름답게 행하는 즐 거움, 그거야말로 인간이라는 고귀한 피조물에 합당한 즐거움이다> 
거의 완성되어 가는 비전센터가 <홀리 조이 센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이런 기쁨이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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