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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을 미리 아시는 예수님 (눅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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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미리 아시는 예수님 (눅 19:1-7)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눅 19:1-7) 


I. 본문해설 

본문은 세리장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를 찾아주셨고, 불러주셨기 때문에 만나게 된 사건입니다. 


II. 세리장인 삭개오 

당시 세리는 정상적인 공무원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리들은 결국 동족들의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유대인들이 보면 정말 반민족적인 행위를 하는 앞잡이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세금 징수 행위에는 늑탈과 토색이 뒤따랐고 그래서 많은 동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리장은 지역의 세리들을 지휘하며 이 일을 하는 사람이니 세리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삭개오였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다른 세리들과는 달리 그는 부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인 것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이 이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갈증이었고, 또 종교적인 갈증이었습니다. 부자였으나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으니 동족들이 자신을 개같이 여기고 그들의 교제 속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종교와 사회생활이 일치를 이루고 있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는 경건한 종교 생활에 있어서도 낙인찍힌 죄인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질은 있고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은 허허로운 인생의 날들 동안에 찾아온 수많은 허무감으로 곤고해 있었습니다. 동족들에게 사람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물질로서만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어떤 막연한 빈 잔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III. 어려움을 딛고 만난 예수님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본문에 보면 어려움을 딛고 만난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더 뜨거운 열심으로 예수를 만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도저히 예수 오시는 그 길의 앞자리에 나가서 설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오늘 성경은 이 사람이 키가 작았다고 했습니다. 헤쳐 나가고자 해도 나갈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정도면 예수님 만나길 포기하고 돌아갈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키도 작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도저히 예수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전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열망은 모든 창조적 행동의 원천입니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 뒤로 돌아가 정면으로 나아갔고 마침 길거리에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기에 적합한 뽕나무 한 그루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른인데도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삼거리 한복판에 있어서 정말 그 나무 위로 올라가면 어느 길에서 누가 오든지 정확히 볼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전망을 가진 나무였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죄인들을 부르시지만 주님을 찾는 죄인들에게만 주님의 애끓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고 난 뒤에는 주님이 우리가 돌아온 그 순간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관심 한번 두지 않을 때조차도 그렇게 안타깝게 부르셨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IV.먼저 부르시는 예수님 

A. 이름을 알고 계심: “삭개오야!” 

우리는 여기서 먼저 부르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의 이름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삭개오야’ 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시야에 벗어난 줄 알고 뽕나무 꼭대기에 있었던 삭개오는 얼마나 커다란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가슴이 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름을 알고 계셨다는 것은 곧 그를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이름은 곧 그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 이름을 높인다는 것은 그 분을 높인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의 이름을 알고 계셨고 알고 계신다는 것은 사랑하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삭개오 한 사람을 심방하기 위해 오신 것처럼 특별 대우해 주실만한 그 무엇이 삭개오에게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이것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의 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마음속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파를 헤치고 그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망을 차지하였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진실하고 간절한 갈망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던 많은 죄의 능력보다도 훨씬 큽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가득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이 희망이 없는 세리장 삭개오를 만나주시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곱 주 동안에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교를 들었고, 희망이 없는 다양한 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증언들을 들었습니다. 형편과 처지는 각각 달랐지만 그들에게는 모두 부인할 수 없는 일치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진실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듣도록 삭개오의 이름 석 자를 불러주었을 때 그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예수님께 다가와 한 송이 꽃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지만 우리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더없는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이 마을에 삭개오 한 사람 심방을 오신 것처럼 지탄받는 쓰레기 같은 이 인간을 이름을 이미 알고 계시고 사랑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B. 친교에로 부르심: “네 집에 유하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어느 집에 유한다고 하는 이 말은 유대인의 문화에서 보면 그들과 가족 관계와 방불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뭇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가 저 쓰레기 같은 죄인의 집에서 묵으실 수 있다는 말이냐’ 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자신이 의롭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마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심방을 오신 것처럼 그에게 독점적으로 관심을 표명하시고 그와 가족처럼 하루를 지내길 원하셨다는 이 소식은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고 실망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와 같이 비천한 세리들, 창기들 이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고 버림을 받아 자신이 아무리 자신의 편에 서도 주님을 만날 만한 장점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얼마나 커다란 복음이었겠습니까? 

우리가 이 복음을 읽으면서도 예수님같이 훌륭하신 분이 왜 이 더러운 삭개오의 집에? 라는 반발이 들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마음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은 더 찬란한 것처럼 죄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눈부시게 빛납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유하게 된 사건은 거기 모였던 많은 사람들 중에 정말 주님을 마음으로 찾는 사람과 자신을 의지하고 주님의 은총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을 갈라놓았을 것입니다. 


V.결론 

오늘 이 기사를 읽으며 여러분들의 마음이 뛰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미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고 부자였지만 허허로운 인생의 날들을 사는 이 사람 삭개오를 불러주셨습니다. 당신의 가족처럼 부르셨고, 당신이 그들의 가족이 되기를 원하셨고 생명적인 교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 일생을 살아온 삭개오였지만, 주님을 뵈옵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의 갈망이 주님의 사랑을 붙들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주님을 찾기 전까지는 주님의 부르심이 여러분들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그 사랑을 찾기 전까지는 주님이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애타게 찾으시는 목자의 음성으로 들려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곱 번을 설교했습니다. 몇 번을 주님이 여러분들을 더 부르셔야지만 이제 어두움을 뿌리치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언제나 거기서 스스로 당신을 떠난 죄인들을 마치 그들이 떠난 것이 당신의 잘못인 것처럼 주님을 부르지 않는 여러분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가서 주님을 만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날지 투신할 지 누가 우리의 미래를 보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이야말로 주님을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날이고, 우리 주님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기에 가장 아름다운 날임을 우리가 어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영혼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나의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부끄럼 없이 기도할 수 있도록 주님을 찾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여러분들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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