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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시대에 우리는(2)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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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우리는(2) (벧전 4:7-11)

스위스의 한 노인이 80세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 노인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시간을 양(量)으로 계산한 통계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의 80년은 대개 이렇게 소비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26년 동안 잠을 잤습니다.  
움직이지도 않고 생각도 않는 시간을 어떤 일보다 많이 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21년 동안을 노동에 바쳤습니다.  
또 6년이라는 세월을 식사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남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기다린 시간이 무려 5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5년을 불안스럽게 혼자 낭비해 버렸습니다.  
수염을 깎고 세면을 하는 것에 228일을 보냈으며, 
아이들과 노는 것에는 26일을 썼습니다.  
넥타이를 매는데 18일이 걸렸고, 
담뱃불을 붙이는 일에는 12일이 소모되었습니다.  
그가 마음속에 행복을 누렸던 가장 기쁜 시간들을 찾고 찾아보았을 때 
그것은 약 46시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긴 인생 속에 과연 행복한 시간은 얼마나 되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어제 저녁 유명한 디자이너 앙드레 김 선생이 소천하셨더군요. 
늘 하얀 옷을 입고 앙녕하세요. 라고 밝은 얼굴로 웃던 그, 수 많은 개그맨들이 그를 흉내낼 정도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았던 그,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던 그였지만 그 역시 결국 하늘의 부르심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이어서 우리는 오늘 말세 마지막 시대를 맞이하는 성도들에게 던져주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함께 살펴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루 하루 한 시간 일분 일초는 다시는 우리에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마지막 시간을 향해 가고 있는 시간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즉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외치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이 외침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에 말씀하셨던 외침입니다. 그렇다면 그때로부터 200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이야말로 말세중의 말세 말세지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국내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천재지변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 날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처럼 말세중의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지난 수요일 첫 번째로 7절 말씀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첫 번째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이 말세 마지막 이 시대에 우리 성도들을 어떤 성도들이 되어야 할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이 말세 마지막 시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랑입니다. 
바울도 고전13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함으로 우리의 삶에 있어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 역시 이 사랑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여러분, 요3:16절 말씀 알고 계시죠?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면 여러분 요1서3:16절을 아십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3:16절의 엄청난 사랑을 받은 우리는 사랑을 받은 그것으로 만족하며 그냥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처럼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이기에 우리 역시 목숨을 다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가스펠이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가스펠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받는 것에만 만족하고 끝날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동시에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성경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강조하며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요1서4:20절 말씀을 볼까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 하는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가 없느니라. 
무엇입니까?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것이 거짓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가족들, 직장 직원, 교회 성도, 구역식구, 친척과 이웃을 먼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먼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눈에 보이는 가족과 이웃과 친척과 교회 성도와 회사 동료와 친구들을 먼저 사랑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걸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 이것을 어느 한 사람에게만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8절말씀을 다시 보시죠?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서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네가 나를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먼저 사랑을 요구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서로 먼저 사랑하라고 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서로 서로 자기에게 적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전에 어느 교회에서 청년들 에베소서 말씀을 가르치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어떤 청년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랬는데 알고 봤더니 제대로 된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어머니가 저에게 상담을 요구하는데 봤더니 이 청년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에 은혜를 받은 게 아니라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는 엄마한테 엄마, 말씀에 뭐라고 했어? 자녀를 노엽게 기르면  안 된다고 했쟎아. 엄마 왜 나한테 이러는거야 하면서 막 엄마에게 말씀을 가지고 가르치더랍니다. 

여러분, 말씀은 이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교훈이 아닙니다. 자기가 적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아 그동안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을 더 공경하는 자신을 세워가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가도록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왜 남편들아 하는 부분에서 씩 웃으며 은혜를 받고 남편은 왜 아내들아 하는 대목에서 은혜를 받습니까? 그리고 집에 가면 말씀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깎아내리고 말씀 때문에 부부 싸움 비슷한 것을 벌입니까? 중요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은 남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설교하는 설교자로 서는 그 순간 이 말씀은 저 밑에 있는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적용해 본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먼저 설교하고 있는 내 자신이 적용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먼저 적용하며 함께 말씀을 가르치며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는 제가 완벽한 사랑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 아직 한 없이 부족하고 연약하기에 제가 먼저 적용하고 실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이 설교를 함께 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중의 완벽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부족하고 연약하기에 우리에게 주님이 필요하고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부족함을 알기에 그 부족한 모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나한테 적용하는 성도가 됩시다. 서로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사실 내가 먼저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을 받기에 앞서 먼저 사랑할 줄 아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목사님, 다 좋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 좋지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질문을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베드로가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8절의 다음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그냥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영어성경에 보니 deeply 깊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전보다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예전에 발끝의 깊이까지 사랑했으면 이제는 발목의 깊이까지 사랑했으면 이제는 무릎의 깊이까지 예전에 무릎의 깊이까지 사랑했으면 이제는 허리의 깊이까지 예전에 허리의 깊이까지 사랑했으면 이제는 가슴깊이까지 예전의 가슴깊이까지 사랑했으면 이제는 목의 깊이까지 그 다음엔 머리끝까지 
그래서 누구의 말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공이 뭔지 아십니까? 열심히 공부하라.입니다. 열일이 뭘까요? 열심히 일하라. 열사가 뭔지 아시겠습니까? 열심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열공하는 학생이 머리띠에 열공이라고 쓰고 밤을 세워 공부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무슨 띠 사랑의 띠를 매고 서로를 열심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안 되면 저렇게 저렇게 안 되면 또 이렇게 방법을 찾고 몸부림을 치면서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조금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해도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조금 하다 안 되면 포기하고 만다면 어떻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저도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한 편이었습니다. 저도 공부를 꽤 열심히 했습니다만 대학 다닐 때 선배들을 보면 정말 혀가 내둘러질 정도로 공부를 하더라구요. 24시간중에 20시간을 책상에 앉아있어야 고시를 패스한다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엉덩이가 짓무르고 치질이 생겨도 그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거, 사랑의 고시에 합격하는 것 그것도 그렇게 쉽고 만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포기할 수 없는 그것이 또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서로를 열사하는 귀한 성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이.. 목사님 그래도 너무 어려운데요? 맞습니다. 그래도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엄청난 사랑을 하기에 앞서 가장 첫 단계의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8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용서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의 가장 첫 단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했을 때 그것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상대방이 용서해달라고 할 때  그래 그럴수도 있지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래 라고 하는 그  말 한 마디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하면 되는데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래 그럴수도 있지가 아니라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의 마음이 들고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용서가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나 우리의 헌금이나 우리의 봉사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너희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사화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과 막힌 관계속에서 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여 이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걸림이 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시간에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익스피어는 사랑은 장님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허물과 잘못과 실수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용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에게는 한 여고생 동생이 있었습니다 이 여동생은 너무 깔끔해서 아줌마들이 아이들을 자기 집에 데리고 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아줌마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이 아무데나 오줌을 싸고 집안을 어지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이 여동생도 사랑에 빠졌고 멋진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오랜만에 그 여동생이 오빠네 집에 놀러 왔습니다. 부엌에서 어머니와 함께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부릅니다. 여보, 나와 보세요.. 철이가 오줌쌌나봐.. 여기가 척척해  여동생이 말합니다. 여보 오줌인지 아닌지 맛보고 오줌이면 갈아입히세요... 
너무나 깔끔해서 아이들이 자기 집에 오는 것조차 싫어했던 이 여인이 아이의 오줌을 맛보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오줌을 싸든, 그것보다 더한 것을 싸더라도 불평 없이 용서하고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오줌 싸고 똥 싸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이해= 사랑   오해+오해= 열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해주십시오. 그렇게 이해하고 또 이해하려는 노력을 계속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아닌 오해를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계속해서 열 받는 거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나한테 잘 하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다 오해할 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해는 오해를 가져오고 계속되는 오해 속에 내가 열 받고 그 사람이 열 받고 결국 관계는 악화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의 시작은 이해입니다. 용서입니다.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덮는다는 말 하면 생각나는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노아와 노아의 세 아들 사건입니다. 하루는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발가벗은 채 하체를 드러내놓고 잠들고 말았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 중 둘째 함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떠들어 댔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에 발가벗고 잠들었네 하하하..
그러나 두 아들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쳐 들어가 아비의 하체에 덮었고 그 광경을 보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술이 깨자 함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셈과 함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물론 먼저 잘못한 것은 노아였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에 대한 비판과 질책은 아들함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에게는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로 세우신 노아에 대해서 아들 함은 함부로 비판하거나 조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함에게 주어진 몫은 아버지의 허물에 대한 덮어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 함은 덮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들어내고 떠벌렸습니다.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자손대대로 영원토록 종이 되는 저주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람이기에 누구나 허물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허물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엇인가, 어디에선가, 어떤 면에서건 분명히 부족한 부분과 아쉬운 부분과 모자른 부분이 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허물이 보이고 연약함이 보이고 실수가 보일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허물을 들추어내고 떠벌리는 것은 저주 받는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세우신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의 허물이 보일 때 덮어주고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한번 더 이해하고 이해해준다면 그 사람을 결국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면서 오해하고 오해하면 열 받고 화나고 짜증나 시험에 드는 일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우리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성도들 되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과 이번 시간을 통해 말세 중의 말세를 만난 이 시대 과연 어떤 성도가 되어야 할 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깨어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오늘은 두 번째로 서로를 열심히 사랑하는 성도가 되자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두 시간에 걸쳐 살펴보았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동떨어져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는 성도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 사랑하는 성도는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시작은 용서입니다. 덮어줌입니다. 이해입니다. 용서하고 이해하고 덮어주면 사랑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이해하면 점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고 오해하기 시작하면 열 받고 시험에 드는 일밖에 없습니다. 매사에 오해의 생각이 아닌 이해의 마음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는 성도들 되심으로 사랑을 시작하는 성도들 되길 바랍니다. 

오늘 이 밤 사랑하는 안디옥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이 악하고 어두운 시대속에서 늘 깨어 기도하며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복된 믿음의 성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의 은혜가운데 묶였던 모든 관계가 회복되고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며 용서와 사랑이 시작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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