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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명에 이끌리는 삶 (렘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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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에 이끌리는 삶 (렘 1:4-10)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건물을 열심히 짓는 세 인부에게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거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첫째 인부가 대답합니다. "보면 모르오? 돈 벌고 있수다." 둘째 인부가 대답합니다. "보면 모르오? 돌 깎고 있소." 그런데 세 번째 인부는 "저요? 하나님이 시켜서 하나님 집을 짓지요."라고 대답합니다. 

똑같이 집을 건축하는 일을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일하는 자세는 다릅니다. 우리 성도님은 지금 어떤 자세로 일하고 있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직장인으로 직장 생활을 하고, 사업가로 사업을 하고, 주부로 자녀를 볼보고, 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교인으로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데 무엇에 이끌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소명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소명에 이끌림을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고 부르시는 것을 소명(召命, calling)이라고 합니다. 

이 소명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구원에로의 부르심과 사역에로의 부르심(고전7:20)입니다. 구원에로의 부르심은 다시 내적 소명(내소)와 외적 소명(외소)이 있습니다. 외소란 복음을 듣고 교회에 오는 것처럼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지만 교회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적 소명을 받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고전 1:9; 롬 8:30; 엡 1:10) 

사역에로의 소명은 교회내의 직분에로의 소명과 교회 밖의 직업으로의 소명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것 다 소명입니다. 직장에서 사장으로 부장으로, 직원으로, 가정에서 주부로, 학교에서 학생으로 공부하는 것 다 소명입니다. 그러면 소명에 이끌리는 삶이란 어떤 삶이겠습니까?오늘 성경에 보면 한 평생 소명에 이끌려 산 한 인물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눈문의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1. 소명에 이끌리는 삶은 어떤 일이든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이 주신 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삶입니다./ 맡기신 분 하나님 

우리가 직장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합니다. 그 때 그 일을 자신이 원해서 맡았다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면 사장님께서 맡겨서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더 나아가면 소비자들이 맡겨 주어서 일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맡겨준 일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일에 대한 자세와 태도는 전혀 달라집니다.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소비자가 맡겨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태도가 전혀 다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통치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맡겨주었다고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에 이끌림 받는 사람들의 첫 번째 자세입니다. 소명의식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이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다. 주부가 집에서 설거지 하고 밥하는 일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 나와 교회 화장실 청소하는 것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퇴직했다고, 실직했다고, 큰 일이나 작은 일이라고, 위대한 일이나 볼품없는 일이라고 교만하지 않고 낙심하고 의기 소침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한 일간지를 보니까 청소부가 된 교장 선생님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고 남이섬에서 매일 아침 8시면 출근하여 빗자루와 집게를 들고 청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 건강이라면 여든살이 넘어서도 일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소명으로 생각하면 보람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죄 짓는 일이 아니라면 주어진 일을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북쪽 베냐민 땅 아나돗에서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나돗은 솔로몬 때에 아비아달 제사장이 유배된 곳입니다. 그곳에 태어났다는 것은 예레미야 가문은 몰락한 제사장 가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께서 떨어뜨리셨다'라는 말입니다. 당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독 가문의 제사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때의 남유다는 바벨론의 남하 정책과 애굽의 북진 정책 사이에 끼어 국외적으로 극심한 혼란과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지도자들의 불신앙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태에 있었는데 분단된 조국은 부패하고, 정치 지도자들은 타락하였고, 경제 질서는 제 길을 가지 않아 가난한 사람은 너무나 가난하여 굶주리고 부한 사람은 호화롭게 살고 있을 때 였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를 하나님이 불렀습니다. 이 때 민족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예레미야를 하나님이 불러 소명에 이끌림 받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이 때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5절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알았고”, “성별하였고”, “세웠다”는 것입니다.

첫째 모태에서 태어나기 전에 알았다고 합니다. 

몰락한 가문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척박한 땅, 유배지에서 태어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같지만 하나님 만세 전에, 태어나기 전에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이론적이며 피상적인 앎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품에 안으시며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정 지금 형편 아무도 모른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가문이 기울고, 사업이 어렵고, 건강이 좋지 않고, 나이가 들고, 내 모습 아름답지 않다고, 나 알아 주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 모른 것 같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과 나를 알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을 맡기십니다. 우리는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이 일을 맡기셨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소명의식입니다.

둘째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성별했다는 것입니다. 성별했다는 것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세웠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따로 떼어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예레미야가 별 볼일 없는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를 민족을 살리는 선지자의 사역을 위해 구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주셨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소명의식입니다. 

셋째는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구별한다는 것은 2가지의 방향을 가집니다. 하나는 '… 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 에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었는데, 그것은 열방의 선지자 '에로' 의 구별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이 지금 무엇을 의미하는 지 깨닫지 못합니다. 너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는 열방의 구원에 대한 놀라운 메시지,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구별해 놓았습니다. 결국 누가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까? 내가입니다. 바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소명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님의 나라 열방을 위해 일을 맡겨 주셨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소명의식입니다. 

청소하는 것도, 식당일 하는 것도, 교역자 일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어, 누가 시켜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긴 일이라고 받아들이면 무엇이든 태도가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선택하였습니다. 우주를 만들기 전에 이미 선택하였습니다. 축복받기로, 사랑받기로, 악천후 속에서도 승리하기로, 건강하여 사명 이루기로 선택받았습니다. 그리고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불러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위기 앞에 사람을 세워 소명을 주었습니다. 민족의 위기 앞에 모세(출3:11)를 불러 소명을 주었습니다. 기드온(삿6:14-16)을 불러 소명을 주었습니다. 다윗(시131:1,2)을 불러 소명을 주었습니다. 열두 제자를 불러 소명을 주었습니다. 바울(고전15:9,10)을 불러 소명을 주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를 불러 소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2. 소명에 이끌리는 삶은 어떤 일이라도 능력 부족이라고 회피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는 삶입니다./ 맡기신 분의 힘으로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때 자기 힘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장이 그 직책을 주었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백성이 그 힘을 주었다고 생각해야 건강합니다. 소명이란 바로 하나님의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극복해야 할 두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실 때 예레미야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슬프다는 것입니다.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때 예레미야는 20살 쯤 되었을 것입니다. 선지자직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기 선조들이 제사장으로 유배된 가정입니다. 지금 주류가 아닙니다. 비주류입니다. 유배지 출신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7절 8절을 보십시오. 아이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가라는 것입니다. 너는 말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극복해야 해야 할 것이 능력부족입니다. 자기 과소 평가입니다. 열등감, 의기 소침입니다. 

소명에 이끌리는 삶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보면서 소명 앞에 능력 부족이라고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는 여전히 희망적입니다. 소명에 이끌림 받는 사람이 그 소명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 첫 번째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부족하다는 예레미야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6,7). 
성경에 보면 사실 예레미야는 홍해를 가르는 모세같은 기적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엘리야처럼 바알을 섬기는 850명을 불로 멸망하게도 못하였습니다. 다윗처럼 물맷돌로 골리앗을 넘어뜨린 것도 아닙니다. 여호수아처럼 여리고 성을 기적적으로 무너뜨리는 특별한 기적을 일으킨 것 아닙니다. 무능력하게 잡혀갔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반역으로 고발 당해 옥에 갇혔습니다.(렘37:4-15). 

진흙 구덩이에 던져짐(38:1-6) 당했습니다.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43:5-7). 정말로 예레미야의 고백처럼 아이같습니다. 연약합니다. 그러나 연약한 예레미야를 다 아시고 그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의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눈물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약점, 허물 단점 다 아십니다. 그리고 맡기십니다. 가장 능력 있어서가 아니라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맡기시는 것입니다. 부족하다고 회피하지 마십시오. 부족하기 때문에 맡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수가 적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통하여 얼마든지 일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300명의 군사를 사용하십니다. "테크노헤게모니"란 책에는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이끌어 가는 국가가 있는데 그 국가는 기술의 주도권을 가진 국가이다. 바로 기술(Technology)의 주도력(Hegemony)을 지닌 국가가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이다. 

영국이 16세기에 들어 산업혁명을 먼저 일으키게 된 것도 영국이 당시에 먼저 기술력을 선점하였기 때문이다. 영국 다음에 독일이 강대국이 되었던 것도 독일이 화학공업과 기계공업을 중심으로 당시에 첨단기술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된 것도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영국, 독일, 미국이 기술의 헤게모니를 잡게 된 원인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종교개혁 직후에 모여진 개신교 신자들의 창조정신과 개척정신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창조적인 사고방식, 개척정신과 모험심, 합리성과 과학정신을 가진 개신교 신자들이 영국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었고 독일 산업화와 미국 건국의 초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리 약한 자들이라도 하나님의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소명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두 번째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예레미야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앞으로 할 일을 보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힘으로 감당해야 합니다(8). 두려워하는 예레미야를 향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예레미야와 함께 하여 예레미야를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미래는 우리는 모릅니다. 

윌리엄 A. 서든 지은 “욕망을 파는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경제예측, 경영예측, 증시예측, 기술예측, 기상예측, 인구예측, 사회예측 등 다양한 예측사업은 그 신뢰성과 상관없이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였습니다. 매년 예측산업은 2천억 달러 규모의 정보를 퍼붓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고의 인재와 기술을 활용하는 데도 이들은 매번 세상이 만들어가는 주요 사건들은커녕, 현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바뀌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조차 예측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경제나 증권시장, 날씨나 신기술 등 어떤 분야이건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기술예측에 많은 사회적 자원이 투입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예측가들의 성적을 분석한 결과 장기 기술예측은 약 80%가 빗나간 것으로 밝혀졌답니다. 

경제 예측가들의 1970~1980년까지의 예측 성적을 보면 48건의 예측 중 46건은 경제의 전환점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경영예측도 1984년 《비즈니스 위크》는 1979~1980년 사이에 소개되었던 33가지 전략을 분석한 뒤, "극히 소수의 전략만이 성공한 것으로 나타났다"라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경영예측도 유행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증시 예측도 어떤 해이든 뛰어난 예측을 할 확률은 1천분의 1이며, 두 번 맞힐 확률은 100만 분의 1, 세 번 연속 적중할 확률은 10억 분의 1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미래는 법칙대로 굴러가는 단순계가 아니라 복합계입니다. 수많은 변수가 있습니다. 카오스의 세계입니다. 작은 변화가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낳는 것처럼 안정적으로 보이면서도 안정적이지 않고, 안정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안정적인 세계입니다. 미리 미래를 예측하며 염려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우리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7절 8절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5절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있습니다. 낳기 전에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의 부모 형제도 우리를 몰라 준다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별하여 특별히 세워주셨습니다.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일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우리 하나님께서 권세와 권능을 주십니다(10). 예수님께서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139:8)” 팔자 타령하고 운명 타령하고 남탓하지 말고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힘으로 소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소중한 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소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가 어둠속에서 헤멜 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셔 내가 시험당하여 외로울 때도 주님은 함께 계셔 기뻐찬양하네 할렐루 할렐루야 할렐루 할렐루야”


3. 소명에 이끌리는 삶은 어떤 경우든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드리는 삶입니다(5,9, 10)./ 맡기신 분의 일 이룸 

소명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첫째는 어떤 일이든 그 일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일을 주신 이가 직장 상사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일을 이루는데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룹니다. 주신 분이 일 만 맡겨 놓고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과소평가하며 회피하지도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여 시작하지도 못하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교훈은 소명은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맡기신 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어떤 일을 맡기십니까? 9절을 보십시오.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웠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어느 나라 선지자입니까? 여러 나라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유대인입니다. 유대 민족은 대부분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 정도로 생각하였습니다. 상종하기 싫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망해야 할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지자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수용하기 힘든 일입니다.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편협한 민족주의 즉 국수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편견과 아집,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고 자기 일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10절 보십시오. 심판 계획과 구원계획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세요. 심판이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까? 구원이 강조되고 있습니까? 심판이라는 말이 훨씬 강조되고 있습니다.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입니다. 심판에 대한 말이 4회여요. 구원에 대한 말은 건설하며 심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레미야서에는 심판의 메시지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입니다(9:1;13:17). 그래도 그것이 하나님이 맡겨준 일이기 때문에 시행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안 들어도, 내 취향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소명으로 이끌림 받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 백성이 멸망될 것을 선언하는 선지자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싶겠습니까?
하기 싫은 일 버거운 일, 환영받지 못한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이라고 소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단순한 이스라엘을 위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결국 메시야적 예언을 통하여 구원을 선포한 열방의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가 할 말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아닙니다. 자신의 견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할 메시지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파괴하신 후에 다시 건설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울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예레미야처럼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영광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홀로 사는 길일 수도 있고, 감옥에 가는 길일 수도 있고, 토굴에 갇히고, 진흙구덩이에 쳐 넣음을 당하는 길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겪는다고 해도 소명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십자가의 소명을 이루는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마굿간에 태어났습니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수치와 모독을 당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침을 뱉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채찍에 맞았습니다. 강도에게 자존심 상하는 모독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구원을 완수하십니다. 

낙농업으로 대표되는 덴마크는 구룬투비 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십니다. 그는 덴마크의 비극적인 역사를 가슴 아파 하면서 병든 민족을 살리기 위해 행동하는 목사로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룬두비가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고시를 치르는데 목사고시의 설교제목이 '덴마크 교회 지도자들이여 회개하라'였습니다. 하시 싫은 일입니다. 시험관들은 건방지다는 이유로 그를 떨어뜨렸고 멀리 떨어진 섬으로 발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덴마크 교회는 국교회여서 목사들이 정부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발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교회를 개혁하고 나라를 구하겠다고 일어섰지만 목사고시에 낙방을 하고 조그마한 섬에 유배당하다시피하여 신경쇠약에 걸려 잠도 못 자고 나중엔 헛소리까지 해가며 폐인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룬 두비는 완전히 절망하고 낙심하고 밑바닥에 떨어져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을 그때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간절히 통회 자복하며 눈물로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로 그를 뜨겁게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그 후 신경쇠약, 불면증도 고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룬 두비가 성령의 감동, 하나님의 치료하심으로 뜨거워지고 담대해지자 그 때부터 그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졌습니다. 자기 말이 아닙니다. 자기 사상이 아닙니다. 반대가 많고 이익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자 사람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던 청년들이 뜨거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덴마아크에 실현한 것입니다. 지금도 덴마크에 가 보면 곳곳에 그룬두비 목사님의 동상이 서있다고 합니다.

일본을 변화시킨 우치무라 간조오가 있습니다.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 하급 사무라이 가정의 아들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다가 유명한 클라크 선교사라는 분을 통해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나라를 천국처럼 변화시켜야겠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미국에 가서 신학공부를 하였습니다. 귀국한 후 일본의 군사정권이, 즉 제국주의가 자꾸 해외침략으로 손을 뻗쳐나가니까 우치무라 간조오 선생은 우려에 찬 목소리로 그 잘못됨을 지적하셨습니다. "일본이 계속해서 이렇게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일본 하늘에다 불벼락을 떨어 뜨릴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일본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입니다. 

군인들은 그분을 직장에서 쫓아내고 일본 사회에 발을 못 붙이게 했습니다. 이제 갈 곳이 없어진 선생은 어찌할 길이 없으니까 동경의 자기 집에 여섯 평짜리 다다미방에다 청년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성경 공부반을 시작했습니다. 이 공부반에서는 동경대학 총장을 세 분이나 배출시켰고, 오히라 수상도 그 성경 공부반 출신입니다. 무라야마 수상이 속한 사회당의 창립 멤버들이 모두 우치무라 간조오 선생의 성경공부반 출신이라고 합니다. 전후 일본 사회을 일으키는 기초를 닦은 분들이 다 그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이 백 년 되던 해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을 일으키는데 공헌한 사람 20명의 선각자를 선정하는 데 기독교인으로는 유일하게 그가 뽑혔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소명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소명에 이끌림 받는 삶이란 내게 맡겨준 일 모든 일을 맡기신 분이 하나님임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맡기신 분의 힘으로 일을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 일이 아니라 맡기신 분의 일을 성취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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