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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3∙1절과 한국교회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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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과 한국교회 (행 7:54-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로되 주 예수여 내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오늘은 3∙1절 92주년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3∙1절의 역사도 깊어져 3∙1절을 경험한 세대들은 극소수만 생존하고 있습니다. 전후 세대들은 그 때의 아픔이나 고뇌를 잘 몰라 오늘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는데 경험이 참 중요합니다. 고난도 배고픔도 경험이 중요합니다. 이런 경험들은 살아가는데 많은 유익을 줍니다. 특히 배고픔의 경험은 생각을 넓게 해 줍니다. 쌀 한 톨의 소중함을 알게 해 줍니다. 인생의 깊이를 알게 하고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여 삶을 겸허하게 해 줍니다. 

실패의 경험도 일부러 할 필요는 없지만 기왕 했으면 참 좋은 기회가 되고 소중한 기회로 활용됩니다. 삶의 눈이 뜨이고 모르던 부분을 알게 하고 보게 해 줍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자만하지 않게 해 줍니다. 암담한 현실의 경험도, 중병의 경험도 때로 삶을 침착하게 만들고 겸허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그때 삶에는 또 다른 손길이 있음을 알게 되고 신비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여 삶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북에 살다가 월남한 분들은 대부분 강합니다. 사선을 넘어 온 경험 때문입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들고 역사가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민족이 오늘 세계 속의 한국을 이룬 것을 기적이라고들 말하지만 사실은 이런 고난이나 아픔을 일찍 경험했고 그 아픔 속에서 얻은 경험과 의지가 오늘의 이 발전의 삶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일제의 압제를 당할 때 현실의 암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배고픔과 절망과 서러움을 경험하였습니다. 서러움 중에는 나라 없는 설음이 최고입니다. 내 땅에서 남의 지배를 당하고 농사를 지어도 모두 수탈당하고 처녀들이 공출당하고 젊은이들이 좌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라의 소중함을 발견하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이고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오늘 한국이 기적을 일구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배경에는 이런 고난이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스데반의 순교하는 모습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일곱 집사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열정이나 행동이나 결단은 제자들 보다 월등했습니다. 

스데반 이야기는 사도행전 6장~7장에서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8장부터 마지막 28장 까지 내용은 사울이라는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진두지휘한 것이 사울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사울이 회심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울의 회심의 시작을 스데반의 순교에서부터 시작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죽음과 순교로 당시는 상당한 핍박이 시작되고 환란이 시작되었지만 그런데 스데반이 죽음으로서 사람들은 복음전파에 장애가 될 것을 알고 걱정하였겠지만 오히려 기독교의 복음이 더 거세어졌고 기도와 전도의 열기가 불붙었습니다. 그 결과 스데반 순교를 계기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고 빌립을 통하여 에티오피아에 복음이 들어가고 사울이 회개하고 그 후 복음이 확장되어 퍼져 나갑니다. 

우리는 오늘 현실만 보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주어진 현실의 암담함에 낙심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주어진 암담한 현실을 사용하여 미래를 여십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초기 기독교에 상당한 손실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주어진 핍박은 기독교에 위기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그 핍박은 기독교의 확장으로 세계화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성령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보면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기독교 강국이 된 것도 이 역사속의 핍박과 고난과 전쟁과 일본 압제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고난을 통해서 성장하였고 기도하였고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나라로 하여금 기독교 강국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더불어 확장되는 종교라고 말 하는데 그 말은 사실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날 고난을 통해서 기도하는 체질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DNA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우리민족은 아픔이 주어질 때마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일제 침략이 우리나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민족은 외부로부터 압박과 설움을 받을 때마다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적으로는 미국을 의지하게 되었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미국과 하나님을 떼어낼 수 없는 관계로 작용되었습니다. 


종교 독립 

1831년9월9일 로마교황청은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독립시켜 조선교구로 설정하였습니다. 지난 5천년 동안 한국은 중국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해 본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오로지 종교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이 로마교황청에 엄중 항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로마교황 그레고리 16세는 엄격하게 한국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켰습니다. 그리고 1882년3월 미국이 한국과 우호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때 중국은 또 항의했습니다. 한국은 중국의 속국인데 중국이 대신 조인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때 미국이 단호하게 거절하고 한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북경의 미국 공사관과 동격으로 서울에 미국 공사관을 설치합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미국과 연대의식을 강화하여 조선의 근대식 교육을 위해서 1886년6월에 미국 정부에 훌륭한 교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요청에 미국은 3인을 보내왔는데 그 3인을 모두 신학교 출신자들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한국에 기독교와 기독교 정신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기독교의 영향이 조용히 이 땅에 들어오면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기독교가 마침내 우리민족의 대들보로 입지를 굳히게 된 사건이 1895년에 두 가지가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는 청일전쟁 이후 온 나라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사대문 안에 살던 사대부의 지배층들도 전염병으로 가족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밖의 출입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길거리에 그냘 버릴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재앙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고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시국이 뒤숭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완장을 차고 내다버린 시체들을 정중히 입관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기독교는 그때나 지금이나 장례 치르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장례가 임박하거나 늙으신 부모님들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례가 나도 당황하지 않게 됩니다. 그때도 그리스도인들이 길거리에 버려진 시체들을 수습하였고 또 전염병에 걸려 앓고 있는 환자들을 데려다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환자 308명 중 145명이 살아났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기독교가 민족교회로 자리매김하게 된 한 가지 사건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사건은 명성황후인 민비의 시해사건이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던 날 고종은 분노하기에 앞서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명성왕후를 구둣발로 침실까지 들어와 칼로 죽인 일본 군인들이 자신에게 또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종은 선교사들을 불러 신변보호 요청을 하였습니다. 일국의 왕이 이 땅에 와 있는 외국의 선교사들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할 지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상황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력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때 5명의 선교사가 입궐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고종을 곁에서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때에 이 나라를 붙잡아 준 것은 기독교 뿐이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지 10년 밖에 안 되는 기독교가 왕을 보호해 주었고 이 민족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 두 사건으로 한국 기독교는 고난 받은 우리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로 발전하여 한국은 유일하게 종교가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고 일본으로부터 싸울 용기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애국하는 교회 

이 두 사건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이 나라의 임금을 충성스럽게 모시고 고난 받는 이 민족과 함께 한다는 것을 확인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감리교 출신 존스 선교사가 1901년 한국에서는 기독교보다 더 나은 애국과 충성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문서로 보고했습니다. 그 살벌한 때에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당시 기독교인들이 정동교회에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고 일 년 후인 1896년에 영천에 있는 독립문에서 고종 탄신기념축하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 행사가 있기 하루 전 독립신문에 “하나님께 찬미하고 기도할 것이고 애국가로 노래할 것”이라고 광고까지 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백성들이 임금님의 탄신을 경축하는 대회를 연 것은 그때 기독교 뿐 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부터 한국 기독교는 모든 일을 민족과 함께 합니다. 1907년에 윤치호가 찬미가를 발행하였습니다. 전체 15장에 불과했지만 당시에는 큰 사건입니다. 그곳에 찬송가도 넣었지만 특이한 것은 그 찬송가 속에 애국가와 황제송을 삽입한 것입니다. 찬송가에 애국가를 삽입한 것은 한국교회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빨리 기독교로 돌아가게 된 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의 공로입니다. 일본이 이 나라를 무자비하게 지배하니까 우리민족이 그때 기댈 곳은 기독교 밖에 없다고 믿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의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의 지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눌림 받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힘도 없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때 믿을 것은 오직 기독교 뿐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민족이 가장 많이 부른 찬송이 “예수 예수 내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쉬 떠나지 마시고 부형같이 되소서”입니다. 그 무렵 1907년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베어드 선교사가 집회에서 한국민족의 아픔과 설움과 탄압을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했는데 그 내용이 “나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버지시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성령이 불같이 떨어져 교회를 휩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탄신경축 예배가 평양 대동강 건너편 사각대청에서 열렸는데 그때 300여명이 모여 기도를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때 기독교인이 300면이면 오늘 3만 명과 비슷한 숫자일 것입니다. 그때 교인들이 성령이 임하심으로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독립가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전국의 교세는 6개 교파에서 파송한 90명 선교사가 있었고 전국에 2천명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50여 교회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독교가 국민생활을 이끄는 세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때 당시 황제탄신축하 행사는 고관대작들이 개최하여야 하는데 일제가 두려워 못하던 것을 기독교가 나서서 더 크게 행사를 치렀는데 그때 빈부귀천 모두가 참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교회는 애국심으로 체질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바탕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때 태극기를 가장 많이 게양한 곳이 교회였습니다. 고종이 평양지방을 순시할 때 교회가 태극기를 높이 게양하였고 고종을 위해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런 열기가 마침내 교회로 하여금 무력까지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천주교인 안중근은 조선의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암살하였습니다.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본 안중근은 순간 무릎을 꿇고 “천주님, 폭살자는 죽었습니다, 감사합니다”고 기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구국기도회 

그런 과정을 거치며 아픔과 핍박 때문에 한국교회가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구국기도회라는 것이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가장 많이 기도한 때는 6∙25때였습니다. 지금 한국이 살 길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 밖에 없다고 외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기도는 하나님께 손을 들고 기도하게 하였고 그것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손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한국을 당시는 조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전 세계에 한국 상황을 타전하기 위해서 당시 조선을 영문으로 쓰고 나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조선을 영문으로 써 놓으니 “초슨”(Chosen)이 되었습니다. 그 말은 “선택받음”이라는 말입니다. 선택이라는 “초슨”이라는 말의 어원은 한국말 조선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부를 영어로 “도네이션(donation)”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도 한국말 “돈 내슈”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또 우리나라를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성장의 원인을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가 성경을 구원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뜨겁게 기도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믿으면 반드시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부흥회를 자주하였습니다. 개교회단위로도 하였지만 군, 면, 리 단위로 모여서 사경회를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뜨거운 기도와 찬양이 함께 어우러졌고 그곳에 어김없이 성령이 임재하시고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구름떼처럼 모여 기도와 찬양을 하였습니다. 

1903년에 원산에서 선교사들이 시작한 집회가 여러 달 동안 계속되었는데 마침내 그 열기가 평양 장대현교회를 시작으로 그 유명한 새벽기도회를 하게 하였는데 그때 일본경찰들이 와서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그 기도소리를 듣기에도 눈물이 났다”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 있게 기도했으면 일본경찰까지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우리민족은 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서러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그냥 기도하지 않고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런 훈련으로 오늘까지 한국교회는 뜨겁게 기도하는 교회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형성되던 시기는 일제의 침략기였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민족교회로 출발하였습니다. 당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조직은 교회뿐이었습니다. 한국민족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한국교회는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면서 이 어려운 난국과 역사의 굴곡을 헤쳐 나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전통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국가나 민족을 생각하는 것 보다 개인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공공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나라를 앞세우고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에스더의 기도를 들으셨고,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다니엘과 스룹바벨과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늘 평안만 주시지 않고 환란도 핍박도 고난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잘 나가던 복음의 흐름이 갑자기 스데반이 순교로 주춤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몹시 당황하고 앞날이 캄캄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그 환란을 통해서 복음을 더 깊고 더 넓게 확장시키셨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보면 그 환란은 축복의 기회였습니다. 그 결과로 사울이 회개하고 복음이 사마리아로 유럽으로 신속하게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환란도 고난도 은혜입니다. 한국교회는 고난과 더불어 성장하였습니다. 그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앞으로도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이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주실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섭리 속에 나와 우리민족의 운명도 들어 있음을 믿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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