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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욕망과 신앙 (요 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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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과 신앙 (요 4:7-26)


이십세기 초반, 미국에 성령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처음 경험하고 방언을 했습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서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영적인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적으로 그것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욕구불만의 표출이다. 이것은 육신적인 욕구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표출이다. 그것을 보상하려는 데에서 발생한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었습니다.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의 불,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끌 수 있겠습니까. 맞불을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그저 외면하고 부인하고 억제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방법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없고 긍정적인 신앙, 육신의 정욕과 맞먹을만한 영적인 충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욕심을 대체할 만한 것으로 성령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억제하고 금욕의 삶이 아니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창조적이고 긍정적이고 바쁘고 즐거운 삶인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이 본문을 읽고 이해해야 됩니다. 

오랜 세월동안 오늘의 본문을 강해한 사람들은 여기 등장하는 이 사마리아 여성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서늘한 아침이나 저녁에 우물에 물을 길러 오지 않고 대낮에 물을 길러 왔을 것이다.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사람 없는 대낮에 물을 길러 왔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추측하고 소설을 쓰고 사람들은 그런가보다 이렇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로 이 여성이 자기 동네에서 따돌림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는 이 사람이 예수 믿은 후에 자기 동네에 가서 예수님을 전할 때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존중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따돌림의 대상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둘째로 이 여성을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여자로 치부하는 것은 우리의 편견일 뿐입니다. 이 여성은 특별히 죄가 많은 여성이 아닙니다. 굳이 특징을 짓자면 남자에게 인기가 많은 여자입니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입니다. 사랑을 많이 하는 여자입니다. 자기의 감정에 충실했던 여자입니다. 다만 결혼생활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을 뿐입니다. 현실과 소원이 맞지 않았습니다. 이 여성은 사랑, 행복, 애정을 원했는데 인생이 그것을 제공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이 다섯 번이나 깨어진 것입니다. 다섯 번이나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성에게 필요한 것이 있었다면 책망이 아니고 오히려 위로였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여성을 여기에 등장시킴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여성이 우리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그들에게 배울 것이 없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이 여성도 특별히 더 죄가 많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남자를 더 밝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더 행실이 나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보편적인 사람을 대표합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 말이 시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편적인 사람 속에도 많은 욕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보편적인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속에도 많은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심리학과 인간에 대한 연구는 한결같이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욕망을 알게 될 때 아, 남자는 역시 속물이야, 이렇게 반응한다든가 아, 정숙한 여자가 없어, 이렇게 반응한다면 우리는 진지한 대화를 나룰 수 없습니다. 인간의 내면은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습니다. 뚜껑을 열지 않아서 그렇지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면 별의 별게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건 비판하기 위해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좋다는 말도 아니고 나쁘다는 말도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인간의 성에 대해서 거의 침묵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은 아주 점잖은 문학입니다. 성이 인간의 삶에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것은 의아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좀 불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금욕을 요구하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독신으로 살기를 원하시는가. 성적인 욕구는 죄인가.’ 그런데 적어도 예수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 거의 유일하게 언급하신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진지하게 읽어야 됩니다. 이걸 남의 이야기로 매도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인간의 성의 문제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첫째는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누군가가 좀 더 엄하고 좀 더 분명하게 규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일괄적으로 엄하게, 분명하게 규제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고 그러나 둘째로 실제로 그렇게 규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마리아 여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일평생 한 남편, 한 아내와 살려고 애쓰는데 이 여자는 남편을 다섯 명이나 두었습니다. 남들과는 다른 특권을 누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미워하는 이유가 있다면 특별히 나쁜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성을 책망하지 않았어요. 그것도 또한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가 내가 살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나쁜 여자인데 왜 예수님이 그녀를 책망하지 않으셨을까. 불공평하지 않느냐. 나쁜 여자라고 하셨어야지.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다 똑같은 기준과 똑같은 방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걸 우리는 불편하게 생각하고 불공평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는 그것이 세상의 현실이에요. 

그리고 세 번째로 이와 같은 것을 그냥 이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고 규정한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옳고 그르다는 것을 밝힌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행위는 자녀를 키워본 분들은 아십니다. 옳다 그르다 말해준다고 해서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 이상을 필요로 합니다. 옳고 그른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신앙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나는 당신이 사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못마땅하다. 나쁘다.’ 그렇게 말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할 겁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그 사람을 도와주겠습니까. 

어떻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전할 수가 있고 어떻게 그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냥 그 사람이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은 쉽지만 그 다음에 그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식으로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인간의 욕망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 그냥 이건 좋다, 나쁘다, 그러지 말아라, 이 차원을 떠나서 좀 더 깊고 진지한 말을 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 그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13절과 214절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물’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이 여성의 특별한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여성이 왜 우물가에 왔습니까. 목이 말라서 온 거에요. 목이 말라서 왔다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여성이 이 물을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마르다는 현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한 것입니다. 이걸 우리가 봐야 됩니다. 여기서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이 물’이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인간의 욕망의 문제, 특별히 성적인 욕망의 문제는 무엇이냐. 채우고 채워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만족이 오래가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만족이 없습니다. 영구적인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유효기간이 짧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벌써 결혼을 다섯 번 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유효기간이 짧은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효기간이 떨어질 때마다 남편을 바꿨으니까. 유효기간이 의외로 짧아요.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뿐이지요. 행복의 유효기간, 만족의 유효기간이 길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거기까지는 우리가 인정하는데 이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인간의 욕망의 문제에서 신앙의 필요성을 접목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이것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초반에 말했던 성령운동을 했던 사람들, 성령의 은사에 몰두했던 사람들을 외부인의 관점에서는 저들이 저렇게 하는 것이 어떤 욕구불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고 보았지만 사실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젊었을 때 길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신앙적인 뜨거움을 가져야 됩니다. 

신앙적인 뜨거움과 소명과 열정이 없이는 젊음의 유혹과 젊음의 방탕함과 젊음의 방황을 극복할 길이 없습니다. 이건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에요. 우리 내면에 채워지지 않는 욕망, 오래가지 못하는 만족 ,인생이 주지 못하는 행복, 길지 않은 유효기간, 이것을 어떤 이들은 드러내놓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말할 수 있느냐.’ 사실 그렇지요. 누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문제는 이 물을 마시는 자다마 다시 목마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욕망의 문제의 현실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건 대단한 말씀이지요. 사람들은 신앙과 욕망은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섞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양극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느끼는 순간만큼은 하나님에 대해서 민망하게 생각하고 죄송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멀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신앙을 말하는 자리에서는 욕망을 생각하는 것을 불경한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두 부분이 서로 교차하는 부분을 지목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이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예수님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자신의 욕망에 탐닉하려고 하고 거기에 대해서 실망하고 허무함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어느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이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믿음에 더 가까울 수 있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아십니다. 사람의 어떠한 면도 하나님을 놀라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놀라게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어떤 면에도 놀라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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