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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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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27절-31절: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땅 끝, 하늘 끝’ 하면 어디를 말하는 거냐? 전 우주적, 전 세계적이다. 교회는 천국화 돼야 하는데 마지막 때가 되어감을 볼수록 세상 모든 교회가 완전히 세상화 된다. 그러니까 이게 남 얘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 자신에게 하는 말씀이다. 세상 모든 교회가 세상화 됐을 때 예수님은 큰 권능과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셔서 천사들을 시켜서 땅 끝까지 보내고 하늘 끝까지 보내신다고 한다.


그러면 ‘땅 끝, 하늘 끝’ 하는 게 뭐냐? 네가 어디에 있더라도 끝까지 찾아간다는 것이다. 왜 보내느냐? 그곳에 누가 있느냐? ‘끝까지’ 하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저 멀리 저 구석에’ 그런 의미가 있다.


‘땅 끝, 하늘 끝’ 할 때 전 세계적 전 우주적이지만, 문제는 ‘그런 곳에, 그런 환경에 어떤 성도가 어떤 차원으로 살고 있느냐’ 하는 신앙사상의 끝도 봐야 한다. 그러니까 택하신 성도가 땅 끝에서 살고 있고 하늘 끝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끝, 낮은 끝’이라는 말도 있는데, ‘높은 끝’이란 천국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으로 말할 때 ‘네 키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몇 센티냐’ 하고 묻듯이 말하자면 직분적으로 제일 훌륭한 직분을 가진 머리로부터 저 밑의 종살이를 하는 발끝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끝에서 끝’이라 할 때 ‘전 우주적, 전 지상 세계적’이라는 의미인데, 그러면 우리 모두 현재 자기가 그 안에 있는 거냐, 그걸 벗어나 있는 거냐?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자기의 위치, 자기의 신앙의 수준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자기가 어디에 있든지 자기에게 말씀이 돼 있는 거다.


그러면 말세에 택하신 성도가 왜 땅 끝에 살고 있을까? 도시에서 살다가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외곽으로 나가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집값 땅값 전세값 월세값 물값 교통비 등등을 따라잡기 힘들어서 시골 저 구석으로 가서 사는 사람도 있고, 그런 와중에도 수단을 잘 쓰는 사람은 중심도시로 들어가서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큰 집에서 더 큰 집으로 자꾸 옮겨갈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게을러서 가난해지니 시골로 가서 사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본문은 비진리가 노아홍수 때나 소돔 고모라 때처럼 판을 치는 고로 성도가 노아처럼 도망을 하여 방주를 짓는 신앙사상으로 땅 끝에 가서 사는 것을 말한다.


시편1:에 ‘복 있는 자는’ 하는 게 있는데 보통 보면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말은 낳으면 제주도로’ 하는데 마리아와 요셉은 성경을 이루려고 어린 예수를 데리고 나사렛으로 갔다. 이걸 우리에게 그대로 끌고 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이런 표현이 붙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소원 목적대로 사는 것이 나의 삶이므로 나를 인간으로 만드신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인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신앙적 교훈으로 말하자면 아기 예수를 신앙적으로 키우기 위해서 애굽에서 저 나사렛 시골 촌으로 이사를 갔다. 그런데 요즘은 보면 도시에 사는 사람이 아기를 낳으면 그 아이는 낳자마자 핸드폰이나 컴퓨터 등의 기계문명이 머릿속에서 늘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시골에는 그런 게 별로 없고 자연관찰을 하면서 산다. 그러니까 시골에서 사는 아이들이 도시에서 산 아이들보다 훨씬 더 정서적이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으로 생각해 볼 때 시골에서 산 아이들이 훈훈하고 따뜻한 인간미가 더 있다.


도시의 아이들은 자고 일어나면 가족들 얼굴 보기도 힘들다. 그러니 기계문명 속에서 물질문명 속에서 맨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이해타산이나 따지고, 세상에서 훌륭한 것이나 따지고 있으니 참 힘들다. 참 각박하다. 창조의 목적에서 인간을 놓고 보면 왜 그렇게 각박한가? 껄끄럽고 빡빡하고 정이 하나도 안 들고.


마지막 때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성도의 삶을 볼 때 왜 땅 끝까지 하늘 끝까지 간 건가? 신앙 때문에 피한 건지? 자기가 게을러서 쫓겨 간 건지?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도 신앙을 위해서 신앙의 환경 때문에 나가서 사는 건지? 그게 있는 거다.


땅 끝은 더 이상 양보가 없는 신앙 사상적 끝을 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상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도망을 갔다는 게 아니라 간단히 말하면 소돔 고모라 성 안에 유황불이 떨어질 텐데 왜 그곳으로 파고 들겠느냐? 그걸 안 받으려면 피하라. 계:에도 있듯이 ‘내 백성아, 왜 그들이 받을 심판 자리에 같이 있느냐? 피하라’ 그게 들어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걸 먼저는 신앙 사상적으로 보고, 그 다음에 몸도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거다. 마음이 없는데 왜 몸이 거기 있느냐? 이룰구원은 몸과 마음이 하나로 움직이는 거다.


또 성도가 왜 하늘 끝에 있는가? 사실 하늘 끝도 없고 땅 끝도 없는 건데 왜 ‘하늘 끝, 땅 끝’ 하는 표현을 하느냐? 땅 끝이 뭘까? 하늘 끝이 뭘까? 하늘 끝은 멀다. 그러니까 하늘 끝은 신앙정신 사상적 영적 세계의 끝을 말한다. 즉 더 이상 양보가 없는 신앙을 말한다. ‘여기까지는 내가 봐준다마는 더 이상은 양보가 없다’ 그런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건 더 이상 신앙에 손해를 안 보겠다는 것이다. 그런 신앙사상을 생각을 말하는 거다.


그 다음에는 ‘하늘 끝, 땅 끝’을 비교를 하면서 ‘신앙의 본질을 벗어나서 더 이상 내가 못 가겠다’ 하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세상 속화된 신앙정신과 섞이지 않겠다는 이룰구원의 사상을 말하기도 한다. 거짓된 신앙자들이 땅 위에서 진리인 것처럼, 주인인 것처럼 행세할 때 그들과 섞이지 않고 그 유혹과 미혹을 다 이기고 물리치고 나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온전으로 참 사람으로 영적 실상화 된 사람은 땅 끝에서 살아도 하늘 끝에서 살아도, 그 어디서 살던 주님은 그 사람을 기억하셔서 천사를, 영물들을 보내서 불러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사는 영물들인데,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 보고 실수를 할 수도 있지만 천사를 보내는 것은 영물의 느낌과 감각으로 그런 성도를 빠짐없이 보고 전부 다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땅 끝에서 사는 신앙은 환난 핍박을 받아 쫓겨 간 것 같으나 가만 보면 실은 비진리가 따라올 수 없는 데까지 갔구나. 못 잡을 수밖에 없는, 잡히지 않는 그 신앙실력이로구나.


동물의 세계에 보면 염소나 산양이 왜 깎아 비탈로 뛰어다니느냐? 편안한 땅을 내버려두고 왜 그런 데로 다니느냐? 이리나 늑대 등의 천적이 못 따라오게. 이게 우리에게 뭘 보여주느냐?


하늘 끝에서 살아온 신앙은 마귀가 따라올 수 없는 신앙이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시험을 걸었지만 예수님은 마귀가 따라올 수 없는 마귀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고차원적인 수준이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걸 느낄 줄 알아야 한다.


28절-31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국에 관한 신앙이 어떻게 바뀌나 그 징조를 보고 배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화과나무를 왜 만들어 놓은 것이냐? 우리에게 신앙징조를 가르쳐 주려고. 망하지 않게 해 주려고.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 즉, 모든 존재와 사건은 비유와 비사다. 우리의 영인성장 면을 돕는 계시들이다. 여기에는 일반계시가 있고 자연계시가 있는데, 일반계시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 생태계를 말하고,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사람이 없는 자연 그대로, 또 그 생태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가지고 영적 면을 볼 수 있도록 이치와 법칙적으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무화과나무가 가지가 연하여지고 가지가 쭉쭉 벗어나가고 잎사귀가 많이 열려서 훈훈한 더운 바람에 나부끼고 있으면 보기는 참 좋다. 열매는 열지 않고 해마다 철 따라 그렇게 잎사귀만 청청하게 있으면 보기는 좋은데 열매를 바라는 주인은 화가 난다.


‘무화과’ 하면 열매를 먹는 것이지 잎사귀를 따먹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해마다 열매는 없고 계속 잎사귀만 무성하면 주인이 그 나무를 가만 두겠느냐? 이 마지막 시대에 교회들이 성령의 열매는 맺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종교적 문화 예술이나 일반세상 밑으로 들어가서 활동 봉사하고 청소해주고 세상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나가는 그런 잎사귀를 보거들랑, 이 교회 저 교회에서 그러는 것을 보거들랑 주님이 문 앞에 이른 줄을 알아라.


마지막 그 날이라면 세상 마지막 심판의 날이고, 이걸 개인적 현재적으로 보면 주님이 널 때려잡으려고 가까이 왔다는 말이다. 신앙사상의 이치는 똑같다. 내 개인적으로 비진리를 품고 있으면 개인적 종말이요, 교회가 전체적으로 그러고 있으면 그 교회 전체적인 종말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그곳에서 등불을 옮기신다. 목회자를 치우든가, 목회자가 그 모양이면 진리와 성령의 감화를 없애든가 한다. 세계 전체 교회가 그렇게 돌아가면 이건 세상 끝 날이다.


그래서 ‘신앙이 있네. 없네’ 하는 것은 행동은 마음을 따라서 나중에 나오는 것이고, 그에 앞서서 그 사람 속의 신앙사상을 보고 말하는 거다. 이걸 가지고 ‘미래적으로 이거 꺼지겠구나. 미래적으로 밝아지겠구나’ 하고 보는 게 선지자들이다. 선지자가 그런 이치를 가르쳐 줄 때 자기 속에서 무슨 불이 타고 있는지, 꺼지고 있는지? 인간이 붙인 불인지, 하나님께서 붙인 불인지를 알아라.


‘가까이 너희 문 앞에 이른 줄 알아라.’ 하나님의 심판이 네 코앞이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네 앞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신앙의 본질을 버리고 이방세상을 따라갈 때, 그런 정신으로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이걸 비사적으로 가르쳐 줬고, 오늘날 마지막 시대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을 모르면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 거다.


30절: ‘이 세대가 다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이 세대’란 하나님의 온전에 관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은 안 하고 현상적 가시적 종교적 활동적으로 마치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만 무성하듯이 그렇게 예수 믿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이 세대가’ 하는 것은 그런 신앙정신을 가진 그 자들에게 심판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열매 없는 일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열심히 불붙고 있을 때 이루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령적으로나, 예수 믿은 지 오래 됐다거나, 또 시대적으로 교인들과 자기를 볼 때 자기의 신앙의 질을 검토해야 한다. 일을 한 양이 아닌 신앙의 질을 가지고 검토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걸 따질 줄 모르고 생각도 못하고 예수를 믿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 속에는 세상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인생은 끝이다. 볼 것 없다. 가치가 없다. 써먹을 데가 없다. 창조의 목적에 일꾼으로 심부름꾼으로 하나님의 일에 써먹을 데가 없다.


교회는 장기자랑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전문가로 만드는 곳이다. 천국복음으로 낚아 올리는 곳이다. 천국창고에 들여놓는 곳이다. 이게 창조의 목적대로 정확하게 사는 인간이다. 목사만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 전체가 창조의 목적대로 들어가게 하는 곳이다. 전도하는 것도 ‘하나님-->인간-->물질’의 순서대로 창조의 목적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인간’의 순서로 산다. 하나님은 없고.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물질-->인간’의 순서로 살면서 하나님은 자기의 종으로 써먹는다면 이건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은 자기의 연령대도 신앙 안에서 따져야 한다. 자기가 언제까지 살겠는가? 선지자가 언제까지 살겠는가? 진리이치를 가지고 자기의 나이와 연대와 생애를 따져봐라.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나에게 그게 부정적이던 긍정적이던 다 이루어지겠구나. 이걸 세상 마지막 날에 되어지는 일로만 보지 말고 인간의 나이로서 자기 나이를 봐라. 그래서 이 세대가 그런 정신으로 살고 있다면 네 코앞에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 현재 자기 신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신앙과 질이 똑같이 들어있다면 이 자에게는 언제고 심판이다. 항상 마지막 신앙의 질을 가지고 있는 현재 자기이니 그렇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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