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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깨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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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28절-37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세상 유혹과 미혹자들의 말에 잘 넘어간다. 특히 교회에서 유혹 미혹 즉, 교훈과 물질에 그만 넘어간다. 그래서 교훈을 분별해야 한다. 먼저 지식적으로 교훈을 분별을 해야 안 넘어간다.


이 세상은 엄밀히 따지면 생명과 먹은 지식과 선악과 먹은 지식이 있는데, 생명과 먹는 주님의 말씀을 먹는 지식, 하늘의 지식, 영원히 가는 지식,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영원한 지혜, 그 삶의 목적, 그리고 질적인 면에서 거기에 관한 도덕성을 가져야 한다.


지식적인 면에서 먼저 구별을 못하면 그 다음은 자동적으로 속는 거다. 먼저 지식을 구별하면서 ‘그 지식 속의 질이 어떤 질을 놓고 말을 하느냐? 영원히 가는 썩지 않는 살아있는 영생적인 지식의 질이냐, 세상 임시적 썩고 불타는 면에 목적을 둔 질이냐? 어느 쪽으로 말을 하고 있느냐?’ 하는 그런 면에서 분별하고, 그 다음에 말은 그렇게 늘 한다고는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봐야 한다. ‘내가 과연 그 질대로 내가 나가고 있느냐’ 하는 면에서 자신을 모든 속성적으로 취미적으로 분별을 해 들어가야 한다.


분별을 하는 사람은 그 무엇을 봐도 원인으로 들어가고, 원인을 보면 결과가 나오게 된다. 경험을 하지 않아도 속지 않을 정도는 알게 된다. 안 그러면 그냥 속는다. 속는 사람으로 돼 있는 거다. 배짱으로 ‘안 한다’ 해서 되는 게 아니라 한 마디로 자기 스스로가 내리막길로 가게 돼 있다. 스스로 가진 차원적 지식이 내리막길이다. 오르막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향상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그러면 모든 결과는 다 내려가게 돼 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지식의 수준이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해서 가는 영생적인 사는 지식이 아니라면 그거는 내리막이다. 내리막이면 그 물질을 어디에 쓰겠느냐? 결국은 세상 누림으로 들어가게 돼 있다. 누림으로 들어가면 자기의 소원 목적만큼 되는 거냐? 그건 아니다. 정신이 병들어 있으니 감정이 병들고, 감정이 병이 들면 육신이 병이 든다. 그러면 육신이 병이 들면 그 다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잘못된 지식을 갖게 되면, 세상 속화된 지식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의 오각의 오감성 희로애락은 병 드는 거다. 사망으로 병 드는 거다. 그 다음에는 세상은 사건이 원치 않아도 늘 오고 가고 부딪히는 곳이니 그 사람은 비로 서지를 못한다. 강인한 사람이 돼지지를 않는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세상 흐름에 죽은 고기처럼 흘러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상하고 썩은 상태이기 때문에 산 것에 의해 다 먹히고 만다. 우리가 자연계시적으로나 일반계시적으로 이걸 얼마든지 본다. 이건 일종의 심판성을 띤 거다.


우리는 저질적인 그들에게 휩싸여서 왕도 되지 말고,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해 주지도 말고, 그건 네가 이용감이다. 그런 지식을 갖지 말라 그 말이다. 자기를 추켜 올려 세울 때에 올려 세우는 그 사람들은 환경에 노는 사람들이니 자기를 추겨 올려 세워놓고 환경에 의해 그들이 딴 데로 가버리면 자기는 확 떨어진다. 세상 정치세계에서도 이걸 많이 보는 거다. 문제는 자기를 하나님 앞에 늘 바로 세워야 한다. 말이야 쉽지만 하나님이 눈에 보인다면 그 앞에 딱 서겠지만 보이지를 않으니 어떻게 바로 서느냐? 하나님의 소원 목적대로 하나님을 알고 나가는 거다.


예수님이 교권과 세관과 폭도들에게 즉, 혼합사상에게 묶여서 간다. 묶여져 있는 그 상태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당신이 맡은 책임에 바로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지금 묶여져 있어야 되는 거냐, 안 묶여져 있어야 되는 거냐? 당신이 책임적으로 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역의 순서 중에 그 장면이 안 묶여야 되는 게 아니라 묶여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 앞에 바로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묶는 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묶었지만 예수님은 묶여지는 그 상태가, 하나님을 기준해서 보는 거다. 그러면 그 묶임은 우리의 구원이 들어있는 묶임이요, 그리고 묶여진 그 상태가 당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부자유스럽고 ‘왜 묶이느냐’ 하는 변명이 붙게 된다.


그리고 폭도들은 제각기 막 이런 거 저런 걸 묻는다. 그런 말에는 한 마디도 대답을 해 줄 필요가 없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공의회 가운데 서서 ‘네가 영광 받을 그리스도냐’ 할 그 때는 대답을 해줘야 한다. 대답을 안 해주면 안 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정확히 말이 들어가야 한다. 즉 구원을 중심하고 나의 이룰구원을 의식을 하면서 거기에 세워놓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 할 말이 있고 말할 필요가 없어서 안 해 줄 말이 있는 거다. 그런데 보통 보면 자기의 감정에 의해서 할 말 안 할 말을 막 쏟아낸다. 그건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


죄를 지었으면 ‘예, 죄를 지었습니다’ 그게 옳은 답이다. ‘안 지었습니다’ 하면 형벌이 가중이 된다. 거짓말에 얻어맞고 그 전에 죄 지은 것으로 얻어맞고, 자꾸 불어난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로 세우는 것.


시1:에 복 있는 자가 누구냐? 뭘 많이 가진 자를 복이라고 하느냐, 사람의 속성을 두고 복이라고 말하는 거냐? 그 사람의 인격 성품 도덕성을 보고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복 있는 자가 누군지를 다윗을 통해서 가르쳐 주는 것이다. 복 있는 자가 누군지 성경에 말을 해 놨으니 그걸 보고 자기를 바로 세우면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자가 된다.


이런 걸 세상 물질적 개념에 붙이면 마귀소리가 된다. 그러니까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하는 게 하나님을 기준을 두고 오만한 자리가 뭔지, 교만이 뭔지, 거만이 뭔지를 인격적 속성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교회 교인들은 세상을 소원 목적한 그곳에 앉으면 그 사람은 멸망할 사람이다. 거기는 복 있는 곳이 아니다. 거기는 교만도 들어있고 거만도 들어있고 오만도 들어있다. 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교회 목사님들은 질을 두고 하나님 앞에 말을 해야 한다. 교회에서 선악과 따먹은 소원 목적으로 가르치면 세상 멸망할 것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 그건 예수 믿어도 선악과 따먹는 것이니 형벌이요 심판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보면서 자기를 생각해야 하고, 우리교인들은 성경의 표현은 인간의 말로 돼 있지만 그걸 천국까지 죽 늘어뜨려라. 그러면 천국에서 가난한 거, 천국에서 부요자를 하나님과 대보면 답은 금방 다 나온다.


우리는 일반적으로도 자기의 언행적 품행을 늘 주의해야 한다. 장소적으로도 늘 주의해야 하고. 교회에서는 남을 도와주고 싶으면 받을 생각을 말고 도와줘라. 그러나 상대가 빌려달라고 할 때 그 액수가 너무 커서 부담이 되면 법적인 근거를 남겨야 한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으면 주고 없으면 말고. 그리고 남이 돈을 빌릴 때 자기가 보증을 섰다면 거지가 되는 한이 있어도 그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러자니 얼마나 지혜가 요하느냐?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자기가 옭아 매여질 짓을 하지 말아라. 없으면 없는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살아라. 없으면 작은 집을 사고, 노력해서 모여지면 큰 집을 사고. 욕심이 잉태하면 안 된다 세상은 자기를 호락호락 봐주지를 않는다.


이방 세상 사람들은 장소를 가지고 ‘터가 세다느니 귀신이 있다느니’ 한다. 그런 말에 속지 말아라. 습기가 많은 집에서 살면 병이 나게 돼 있다. 이걸 미신적으로 말하면 터가 세다고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장소적 분위기를 가지고 말을 하지만 예수 믿는 성도는 그 사람의 성격 성질 품행을 보고 감지를 해야 한다.


‘예수님이 언제쯤 오실까’ 하며 연대를 측정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성경구절을 꿰어 맞추고, 과학적으로 계산을 하고, 고고학적 유물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마귀의 시험에 빠져 있는 거다. 마귀시험에 빠져 있다는 것은 자기의 현재적 이룰구원을 다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 그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지식, 하나님의 도덕성, 능력성이 다 들어있는 거다 이게 없으면 구원이 아니다.


‘깨어있으라.’ 온 교회가 마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여름이 가까이 오니 그 가지가 연해지며 쭉 쭉 뻗어나가는 것처럼 될 때 즉, 교회의 현상이 규모가 조직적으로만 커지고 여기저기서 구멍가게처럼 교회를 한다고 하면서 무당 점쟁이 짓하는 것처럼 늘어나고, 잎사귀가 무성하며 바람에 나부끼는 것처럼 세상이 보기 좋게 물질적 활동이, 세상 사회적 활동이 활발해지면 이것이 말세의 일곱 교회 중에 어느 색깔의 말의 운동인지 얼른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도 교회의 운동이 계:의 어느 말이 뛰고 있는 건지, 어느 운동이 활발한 건지를 잘 봐라.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자기가 어느 색깔의 말을 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무슨 말의 운동이 사상적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그런데 대부분 그건 생각도 안 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고 들어가는 피비린내가 나는 건 붉은 말이다, 전쟁의 말이다. 교회 안에서 선악과를 먹이고 들어가면 그 신앙 믿음이 다 죽어버린다.


34절-37절: 모든 사람 중에 나도 들어있다. 그러니 깨어있어야 한다. 졸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갈 때 집에 있는 종들에게 권한을 주면서 각각 사무를 맡기고 문지기에게 깨어있으라 하고 타국으로 갔다. 종들이 주인에게서 각각 권한 받을 때 종들의 마음 느낌이 어떠했을까?


첫째 사람은 ‘나도 직분을 받았으니 일을 한 번 크게 해 봐야지.’ 직분을 안 줘서 일을 크게 못하는 사람이 있느냐? 두 번째 사람은 ‘내가 충성봉사를 열심히 했으니 이 직분을 받는 게 마땅하다. 이제는 내가 편히 쉬고 다른 사람을 시키자.’ 세 번째 사람은 ‘내가 직분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지자.’ 네 번째 사람은 아무 마음도 없이 직분을 받았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느냐? ‘직분을 받을 때 어떤 마음인지’ 하는 것은 직분을 받은 후에 나타난다. 직분을 받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심사를 해 봐라.


교회에서 직분을 주는 것은 키우기 위해 주는 게 있고, ‘저만하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길 수 있겠구나’ 해서 봉사심에서 주는 게 있다. 그게 다 성품적으로 들어가는 거다. 교회에서 봉사할 줄도 모르고 순종할 줄도 모르면 어떻게 되겠느냐? 교회에 들어가면 교회의 일원으로서 머리를 주님으로 하고 자기가 손발의 역할 하던 인체적으로 말하면 무슨 역할이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성경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몰라도 예배드리는 곳에 턱 앉아있으면 그 많은 사람 중에 자기도 한 사람의 숫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앉아주는 교인도 있다. 먹어주는 교인도 있다. 교회 안에는 여러 형태의 사람이 있다. 어쨌든 자기 발전이다. 안 해 보면 모른다. 죽을 때까지 안 하면 전혀 모르는 거다. 안 해 본 사람은 하는 게 뭔지, 안 하는 게 뭔지 모른다. 웬만하면 해 버릇을 해야 하고 할 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딴 데 가서도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지 교회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가 딴 데 가서 리더십 발휘가 되겠느냐? 정신을 그렇게 가지면 안 된다.


문지기보고 깨어있으라고 했다. 그러니까 문지기로서 깨어있으라는 명령을 받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글자적으로 보면 ‘나는 문지기가 싫다. 하루 온 종일 서 있어야 하고 졸지도 못하고, 그 다음에 교대시켜 줄줄 알았는데 또 문지기로 세워놓고 항상 깨어있으라고 하니 주인이 야속하다’고 하는 것 같다.


문지기로서 생각할 때는 문 안에 있는 종들이 부럽다. 문 안에 있는 종들도 문지기직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지기가 졸거나 자게 되면 그 집안에서 종들이 노력봉사 해 놓은 거, 모아진 살림살이는 다 도둑맞는다. 재산 재물은 물론이고 사람들도 노예로 끌려가거나 죽게 된다.


집주인이 언제 올 런지? ‘저물 때 올 런지, 밤중에 올 런지, 닭 울 때 올 런지, 새벽에 올 런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문지기의 사명이 크다. 좁혀서 말하면 자기가 신앙 면에서 자고 있게 되면 자기의 모든 것은 다 도둑맞는다. 그러니 깨어있으라. 신앙 사상 면에서 구별 분별하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이다. 구별 분별을 못하면서 신앙이라고 하면 너의 시간 노력 투자 희생봉사 너의 생명까지 다 도둑맞는다. 다시 말하면 이룰구원이 아닌 곳으로 다 도둑맞는다.


자기의 구원은 영원에 속하는 거고, 하나님의 것으로 되어지는 건데 도둑을 다 맞으면 그런 원통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 창조의 목적관에서 보면 존재목적이 출생목적이 다 날아간다. 그러면 인간의 가치가 뭐가 있느냐?


우리가 성경의 정신을 가지고 창조의 목적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은 무목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고 하등의 가치가 없는 삶이다. 그러니까 인간창조의 목적을 아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힌 인생이다. 그러니 우리의 할 일이 그만큼 크고 많은 것이다. 세계적이다. 창조의 목적관을 놓고 볼 때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세계가 모르고 있다면 세계는 우리의 일터다.


밤중쯤 되면 사람들이 모두 잠에 떨어졌을 때다. 닭 울 때는 사람들이 더 깊이 잠이 든다. 시골에 새벽닭이 4시 경에 운다. 새벽은 조금 있다가 일어날 때이고.


문지기의 입장에서 볼 때 언제 주님이 오시는 게 좋겠느냐? 밤중? 닭 울 때? 새벽에? 주인이 오는 시간은 주인으로서 언제 가는 게 좋겠느냐? 주인이 오는 시간은 주인의 마음이다. 그런데 인간입장에서 ‘이때쯤 왔으면 좋겠다’ 한다. 그건 네 생각이고 주인이 오는 시간은 인간의 생각에 매이지를 않는다.


신앙 사상적으로 각 시대를 축소시켜서 하루의 때를 본다면 신앙 면에서 문지기는 절대로 졸거나 자면 안 된다. 항상 깨어있어야 할 문지기 역할은 인간으로 못할 짓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문지기의 사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이걸 교회로 갖고 와서 보면 목사님들은 문지기 역할을 해야 하는데 낮이고 밤이고 졸면 안 된다. 깨달음에 졸거나 쉬면 안 된다. 깨달음이 늘 자꾸 충만이 돼가야지 없어지면 안 되고, 깨달음이 하나도 없게 되면 이건 자는 거다. 심판에 붙여진다. 이런 것을 교회 전체적으로 본다면 문지기가 아무나 되는 거냐?


우리가 지금 깨는 거냐, 조는 거냐, 자는 거냐? 자꾸 깨어나야 한다. 모든 면에서 구별 분별이 자꾸 돼 나가야 한다. 잘 깨어있는 그 자가 문지기 역할이다. 그 자가 교회로서 인도자가 되는 것이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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