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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격과 태도 (삼상 17: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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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과 태도 (삼상 17:4-10)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5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6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7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 8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9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10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삼상 17;4-10)

  인생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가 ‘성공(成功)’입니다.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자기 자신이나, 가족이 실패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청년들은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공부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학 4년 졸업하는데 1억 정도 드는 것은 다 아시지요? 요즘은 대학가 주위의 하숙집 비용도 엄청 올랐습니다. 기본이 1년 계약입니다. 방학 때도 무조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요즘 대학생은 5년 공부가 기본입니다. 외국 어학연수도 필수 옵션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학 졸업하는 비용이 2억에 육박합니다. 부모가 얼마나 벌어야 자녀 2~3명을 대학공부를 시키겠습니까? 게다가 결혼시키는데 또 수천만 원 목돈 듭니다. 부모의 노후계획은 불가능합니다.  노후계획을 포기하고 자녀 뒷바라지에 자기의 모든 비용을 다 쏟아 부어야 하고,  빚지는 것도 필수 입니다.  우리 청년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정말 부모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제가 충고 한 마디 할까요? ‘결혼하고 나서 분가해서 살겠습니다. 우리끼리 잘 살겠습니다. 한 달 용돈 10만원도 무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좀 더 생각해 보고 하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이렇게 어렵게 공부를 해도, 졸업을 하면 거의 백수입니다. 취업의 문이 얼마나 좁은지 모릅니다. 정말 인생을 성공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합니까? 성공의 필수 조건은 무엇인가요?  자격인가요? 믿음인가요?
  
성경(聖經)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에 답을 주는 책입니다. 성경은 윤리책이나, 교훈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의 답을 찾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주 사용합니다. 운동 경기에서나 승부를 겨루는 게임에서 상대가 너무 차이가 많이 날 경우 항상 다윗과 골리앗으로 비유를 해서 말을 하곤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이 골리앗은 3m넘는 거인입니다.  반면 다윗은 홍안(紅顔)의 작은 소년입니다. 키로 따지면 아마 두 배 정도의 차이가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덩치나 전쟁 경험이나... 모든 조건이 다윗과 골리앗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싸움을 한다 해도 분명 지는 쪽은 다윗일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깁니다. 성경은 거짓말을 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길 수 없는 다윗을 일부러 이기게 해서 헛꿈을 심어주는 동화도 아닙니다. 다윗이 이길 수 밖에 없으니까 이기는 것입니다.   

만약 어른과 아이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 것 같냐고 질문을 한다면 아이가 이길 것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이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더구나 어린아이와 거인의 대결입니다. 그것도 토끼와 거북이이야기처럼 토끼가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서로 마주쳐서 노려보는 상황 아닙니까? 그러면 성경에서는 왜 다윗이 이깁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여러분은 이기는 다윗이 되고 싶지, 지는 골리앗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지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밖에 없는 그 진리를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기고 지는 것, 성공과 실패가 우리의 자존감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말씀합니다. 

며칠 전에 신문을 보니 ‘청년 취업의 제일 조건은...’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흥미가 있어 자세히 보았는데 남자는 學閥이고 여자는 外貌였습니다.  학벌은 노력해서 얻은 자격이고 외모는 타고난 자격입니다.   골리앗은 자격(資格)의 대표입니다. 누구든지 골리앗 앞에서면 기가 죽습니다. 감히 그와 대적할 생각도 못하고, 붙어서 이긴다는 생각은 꿈도 못 꿀 정도로 그는 많은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 사회 식으로 말하면 ‘서울대학교 수석입학 수석졸업 정도? 일류대학 졸업 후에 외국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 소유?’ 뭐 그런 정도입니다. 그만큼 당시 사회에서 골리앗은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자격(資格)을 과하도록 가지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5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6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7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삼상17;4-7)  

규빗은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에서 사용된 길이의 단위로 팔꿈치에서 가운뎃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기준으로 하며 17∼21인치에 해당합니다. 1인치가 2.54cm이니까 한 규밧은 43.2cm~51.3cm입니다. ‘여섯 규빗 한 뼘’ 결국 골리앗의 키는  258cm~306cm에서 한 뼘 더 됩니다.   

또 한 세겔은 약 11g입니다. 갑옷으로 입은 오천 세겔은 55kg입니다. 들고 있는 창 날 육백 세겔은 약 7kg입니다. 창날이 7kg이라면 창 전체의 무게는 얼마쯤 될까요? 알렉산더 시대에 보병용 창의 무게가 4~5kg이라고 합니다. 골리앗은 창날의 무게만 해도 창 무게보다 더 무거웠으니 얼마나 힘이 센 장사인지 짐작이 갑니다. 누가 이런 골리앗과 일대일로 싸우고 싶을까요? 이런 골리앗과 ‘비교’하면 있던 용기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공의 조건’이 자격(資格)이 아니라 태도(態度)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니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믿음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자주 긍정적인 태도, 적극적인 태도를 갖고서 인생을 살아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문제는 긍정적인 태도, 적극적인 태도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골리앗처럼 내가 가진 나의 자격(資格), 나의 소유(所有)에서 나오는가요?  다윗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나의 태도(態度)에서 나는가요? 

ex)한 청년이 있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모시고 사는데...고교시절부터 메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의욕적인 학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절친한 친구와 같이 A라는 회사를 같이 경영했는데,  그 회사는 자기 아버지 회사였고, 친구 분은 거들어주는 정도였는데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면서 친구에게 회사를 부탁하고,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회사를 물려주도록, 그때까지 회사를 잘 경영해 주도록 유언을 남겼고, 친구는 승낙을 했다. 그 후 회사는 날로 번창했고, 이 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 친구였던 사장에게 찾아가서 유언대로 회사를 자기 앞으로 해 달라고 요구했다. 친구 사장이 해주었을까? 해주었다. 

그때 A회사는 이름을 B라고 바꾼 상태였는데, 사장은 A회사를 아들 앞으로 해주었다. 이 A회사는 B회사 안에 있는 하청업체처럼 되어있는 회사였고, 벌써 부도가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의 불량회사였다. 친구 사장은 아버지가 물려준 A회사와 지금의 B회사는 전혀 다른 회사이며, 죽은 친구와의 의리로 경영불량의 A회사를 지금까지 적자를 보면서 지켜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장은 회사의 이름을 바꾸면서 모든 서류를 다 치밀하게 준비해서 회사를 자기가 삼켜버린 것이다.

자.. 이 청년은 어찌되었을까요? 믿었던 아버지 친구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자기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회사마저 날아가고,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싸워서 빼앗아 올 힘도 없는 이 청년은... 그래 어차피 아버지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니었어. 내 인생은 이제 시작이야...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자신감을 다 잃어버리고... 술에 취한 폐인이 되어버렸다. 그의 자신감의 근원인 회사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고교 졸업후에 미래를 꿈꾸는데...자기는 오히려 폐인이 되었으니 정상적인 사람보다 더 못하게 된 것이다. 회사가 사라지면서 그의 자신감도 사라지고, 그의 미래도 사라진 것이다. 죽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85세의 할아버지인 갈렙은 전혀 반대의 마음이었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수14;10-12)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과 85세의 할아버지 둘 중에서 누구의 인생이 더 활기차야 하고, 더 희망적이어야 할 지는 상식이지만...자기 소유에서 오는 자신감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자신감은 정 반대로 드러납니다.  솔직히 85세의 할아버지가 아무리 건강해도 할아버지의 건강 아닙니까?  20대 청년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거인족인 아낙 자손과는 아예 비교가 안 됩니다. 수백 명의 골리앗과 85세 된 할아버지와의 싸움입니다. 갈렙도 사람인지라, 눈이 있고 머리가 있습니다. 말도 안 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압니다. 

그런데 어째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가요?  결국 갈렙은 자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도를, 신앙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꼭 자격을 말하라면,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 갈렙의  자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공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소유한 것인가요? 믿음인가요? 자격인가요? 태도인가요?

보세요. 다윗과 골리앗이 서로 싸우려고 마주 보며 달려갑니다. 달려나가는 다윗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삼상17;40) 그리고 거인 골리앗이 싸우러 나오면서 한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입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골리앗을 개로 여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반대로 골리앗 앞에서면 자기가 강아지 같다고 여긴 사람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다윗은, 믿음을 가진 다윗은 달랐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다윗은 지금 개 한 마리를 잡으러 달려갑니다.  골리앗도 벌써 알았습니다.  다윗에게는 자기가 거인도 아니요, 장수도 아니라 그냥 개 한 마리입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라 다윗과 개와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막대기를 든 사람과 개와 싸우면 누가 이길 수 있나요? 당연히 사람이 이깁니다. 개는 막대기로 두들겨 패면 됩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도 분명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골리앗을 보았을 때 골리앗이 장수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골리앗이 크고 강하다는 것을 못 보았을까요? 그도 눈이 있고 생각이 있기에 분명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상대방을 쳐다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알았습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6-47)

자기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자기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실한 생각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하나님의 소유다’ 이것이 다윗의 자존감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자존감(自尊感)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존심(自尊心)과 자존감(自尊感)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자존심이나 자존감은 똑 같이 자기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 내면에 자기를 존귀하게 여기는 동기(動機)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존심이란 자기 스스로 특별한 존재 같이 생각하여 자신을 존귀하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자존감이란 자신의 존재가 귀한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때문에 존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겨 주시기에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 자존감입니다.  

어느 교회에 한 학생이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담당 목사님이 집으로 전화를 했답니다. 학생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자녀가 교회에 못가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시면서 너무 어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학생이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얼마 전부터 말이 그려져 있는 폴로 옷을 사달라고 졸랐는데 어머니가 사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뜸 "그럼 나 교회안가"라고 하더랍니다. 그 아이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유명 메이커의 신발을 신어야, 유명 메이커의 옷을 입어야지만, 가슴을 펴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러지 못한 학생들은 괜히 주눅이 들고, 기가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명 메이커가 뭐길래 그것이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가 되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존귀한 이유는 좋은 옷을 걸쳤기에 존귀한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존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을 가져야 존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이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기에 존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택해 주신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귀한 모습으로 만들어 주셨기에 귀한 존재이지 우리 자신은 보잘 것 없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사람은 지식이나 명예가 있고 부귀한 자가 아닙니다. 권세 있는 자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가장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존귀한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존귀한 이유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정도로 존귀한 존재로 대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재벌을 향해 ‘저 불쌍한 사람, 돈으로는 이 세상 뿐인데.. 영혼이 돈으로 되는 줄 아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확실한 자존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가 너무 힘들다고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도자 모세를 보내시어 그들을 해방을 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은 사막을 가로질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떠났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이 가서 40일 동안 세밀히 정탐을 해보니,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그 만큼 풍요롭고 좋은 땅이었습니다. 한 송이의 포도송이를 혼자 들 수 없어 두 사람이 긴 막대기로 끼어서 같이 들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낙자손이 살고 있기에 그곳을 차지하기란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거인들이라 그들의 눈에 자기들이 마치 메뚜기 같이 보였을 것이라고 하며 울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들은 메뚜기가 맞습니다. 잘 보았고, 바르게 보았습니다. 거인족의 후손이요, 서로들간에 싸움과 전투로 단련된 가나안 사람들에 비하면 철로 된 농기구하나 제대로 없고, 양이나 치던 자기들은 메뚜기 맞습니다. 바로 보았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자기 뒤에 있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자기 아버지가 힘이 있으면 자랑합니다. 아이의 자존심은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군부대 주위의 마을에 가면 남편들은 다 출근하고 부인들끼리 서로 모입니다. 누가 대장 노릇할까요?  당연히 남편의 계급이 높은 여자입니다. 남편의 계급이 부인의 콧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누구인지 자존감(自尊感)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누구인지를 잊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인도해 주시며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었던 것입니다. 고아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싸워 주실 텐데 그들은 메뚜기같은 자기가 싸울것으로 생각하고 절망을 합니다.  메뚜기는 손가락 하나로 꼭 누르며 죽는 존재입니다. 아주 연약한 풀벌레입니다.  당연히 자신을 이런 존재로 알고 사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승리하지 못합니다.          

성도여러분, 자신을 메뚜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고아로서 나는 부모가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악(惡)한 생각입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민14;1-4)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성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실패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불신(不信)은 그냥 안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侮辱)하고 멸시(蔑視)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가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불효는 부모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부모를 죽은 것으로 만드는 것 보다 더 큰 불효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화가 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존귀하다는 것을 인정하시지요? ‘나는 정말 귀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요?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혹시 이 세상의 판단 기준으로 나는 별 볼일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나요? ‘나는 돈도 많지 않으니 별 볼일 없는 존재야,  나는 세상 지식을 배우지 못했기에 별 볼일 없는 존재야, 내 직업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기에 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인가요?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목숨을 주신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분인가요?   그냥 죽은 후에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약속이나 하시는 분인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수단이 사람을 귀하게 만들거나 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이 세상의 직업이나, 많이 배우고 못 배운 것으로 사람을 귀하고 천하다고 판단하는 실수를 하지 마세요.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나는 존귀한 사람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존귀해서 존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존귀하다는 마음을 간직하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 이외에 두려운 사람이 없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대한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광활한 태양과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경탄은 하면서 정작 가장 경탄해야 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경탄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각자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지어진 오묘한 존재입니다. 공장에서 찍어낸 상품(商品)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일일이 만드신 작품(作品)입니다. 작품 중의 걸작품임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걸작품답게 살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 같이 행동하며 세상을 당당하게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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