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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답게 산다는 것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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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산다는 것(마태 6:25-34)

   
지난 금요일에는 구제역으로 희생당한 가축들이 100만 마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정도 되면 재앙이지요. 이런 와중에서 우리들은 가축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안도감을 느끼고 다행스러워해야 할 것인지...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이참에 아예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면서 여러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10:29) 

아마도 수많은 가축들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책임성을 더 많이 느끼도록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리고 이 귀한 생명을 우리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오늘도 수많은 가축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을 다시금 생각해 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천양희 시인은 ‘물에게 길을 묻다’라는 시에서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과 ‘사람같이 살아가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누구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아마 시인은 다른 것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내게 주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이루어 가는 것... 현실 생활 속에서 내가 성취하고 이루어야할 것들을 향해서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 이렇게 사는 것을 시인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만 하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 쳤지요.....
그 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오로지 자기의 목표만을 위해서 집중하던 그에게 비로소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와는 다른 삶의 모습이 그에게 떠오릅니다.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아마 이 대목이 그가 자신의 삶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뚜렷이 어떤 형태의 삶인지... 시인은 그것을 자세히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나만을 위해서는 더 이상 살지 않겠다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것 같고... 이러한 형태의 삶은 이전의 삶에 비해서는 더욱 어려운 것이지만... 여기에서 그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가리켜서 시인은 ‘사람같이 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는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
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의 설교를 모아 놓은 산상수훈의 한 대목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7장에 걸쳐 있는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에 행하셨던 여러 설교들 중에서 예수의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산상수훈을 접하면서 그 급진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원수를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당하는 폭력이나 탄압을 결코 악으로 갚지 말라든지... 사람들에게 인격적인 모독만 주어도 살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음욕을 품고 여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든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도무지 실천하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들에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윤리학자는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라는 유명한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산상수훈 속에 깔려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전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놓여 있는 깊은 친밀함입니다. 다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를 잘 아시고 계시며, 우리의 필요와 부족함을 채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결코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어 낼 수가 있을까... 마치 무역업자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바이어를 설득해서 자기가 가지 목적을 간신히 이루는 것과 같은...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는 결코 이런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마태6:8)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일이 다 말하지 않더라도... 애써서 하나님을 설득하려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것을 알고 계시며, 그것을 아낌없이 우리들에게 내려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생각이 잘 반영된 말씀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 속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단어는 어떤 것입니까? ‘걱정’이라고 하는 말이 아닌가요? ‘걱정하지 말아라’ 이런 말씀이 얼마나 자주 언급되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십시오. ‘v.25 '걱정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아라... v. 27 걱정을 해서... v.28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v.31 걱정하지 말아라...  v.34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길지 않은 말씀 가운데서 걱정이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옵니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들에게 살면서 걱정할 일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는 걱정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걱정은 다 부질 없는 일이고 쓸 데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라고 걱정이 없었을까요? 예수님은 세상에 살면서 걱정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예수님도 걱정을 하신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v.27)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아마 예수님도 걱정을 하신 적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걱정을 해봐야 그것이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나...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하나의 이유는 걱정이 우리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는 우리들에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더 중요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면서 걱정하는 모든 일들... 아마도 우리가 걱정하는 까닭은 우리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할만한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먹고 살아야하는데... 입고 살아야 하는데...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걱정하게 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다 해결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중을 날아다는 새와 들에 피어있는 꽃입니다. 이것들은 먹을 걱정도 하지 않는데... 입을 걱정도 하지 않는데... 그들에게는 곡식을 비축할 창고도 없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를 화려하게 꾸밀까...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는데... 그래도 누구보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고... 솔로몬보디도 더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지 않는가? 누가 이들을 먹이고... 누가 이들을 입히시는가? 생각하여 보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계신데...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을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우리들을 그냥 내 버려두실 리가 있겠느냐? 우리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런 것들보다 비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인데... 그렇게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답게 산다는 것! 그것은 바로 이런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더 이상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걱정하거나 위축되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 먹여주시는 대로 먹고...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대로 입는 것... 그러면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디에서 살든지... 그것 가지고 자랑할 필요도 없고... 그것가지고 주눅들 필요도 없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에 기대하셨던 바로 그 삶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v.25) 무엇이 더 중하고 덜 중요한가? 무엇이 앞서는 문제인가? 예수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중요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또는 무엇을 입느냐에 따라서 많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밥을 먹더라도 아주 근사하고 화려한 곳에서 먹는다면 인생이 더 근사한 것처럼 보입니다. 같은 옷을 입더라도 유명한 상표가 붙어 있는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더 근사하고 멋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먹고 입는 문제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주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는가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와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우리가 세상에 올 때부터 부여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예수는 여기서 말씀을 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 그리고 우리들의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손길이 깃들어서 우리가 형성되었다는 것! 마치 도예가가 도자기를 만들 때에 손으로 일일이 다듬어서 작품이 만들어 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존귀하신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 여기에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나 우리가 입는 옷으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가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진정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답게 산다는 것 가운데는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정말로 귀한 존재 사람입니다.’ 무엇을 먹고, 어떤 집에서 살고... 어떤 상표가 달린 옷을 입는지... 그것은 내게는 별로 중요한 관삼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이미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고... 그것이면 나는 충분합니다... 이러한 자부심과 당당함이 항상 우리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면서 진정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먹고, 입고,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이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사는 것에 상관없이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중 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알고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해서... 이제는 우리가 좀 근사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다운 멋진 목적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v.33)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에 꿈꾸셨던 삶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세상을 가장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라든지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우리에게 낯설고 쉽게 다가가가 힘듭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을 바꾸는 것이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중요한 가치의 순서를 바꾸어 보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미 우리들에게는 저마다 세상을 살면서 세운 목적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 것들이 여기에서 빠질 수가 없는 것들이지요. 공부하고... 일하는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공부하고 일하면서도 좀 다른 것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모습으로 살게 하셨을까?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게 하려고 그러셨을까? 혹시 하나님의 목적은 없을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은 없을까? 그런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적어도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 날부터 우리들은 우리의 삶을 단지 내가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어도 우리가 단지 나만을 위해서 살도록 세상에 우리를 보내신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지난 연말에 아프리카의 수단에서 예수님처럼 살다가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고 이태석 신부님에 대한 영상을 다시 보면서... 우리들에게는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 맞아 삶이란 바로 그런 거야... 나도 언젠가는... 살면서 한 번쯤은 저 분처럼 저렇게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할터인데...’ 혹시 여러분들은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마음이 들지는 않으셨는지요?  바로 그러한 삶이 예수가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것에서 멀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그 분처럼 의술과 같은 뚜렷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선택을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얽혀 있는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꿈과 희망은 가질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적어도 나만을 위해서 살지는 말아야 하겠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누군가에게는 꼭 전하며 살리라... 이런 맘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우리들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v.34) 이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어떻게 우리의 걱정을 맡아 줄 것인지... ‘세월이 약이겠지요...’인가요? 그것은 아니겠지요.  우리의 삶이란 우리가 어제에서부터 오늘을 거쳐서 내일로 가는 것 같지만... 내일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이기도 한 것이라고... 단지 나만을 위해서 살려 한다면... 우리의 시간은 여전히 과거에서 오늘을 거쳐서 내일로 흘러가는... 참 재미도 없고 마지못해 사는 그런 인생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목적으로 채울 때... 우리들에게는 내일이 참으로 새삼스럽고 기다려지는 시간입니다. ‘내일,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에 어떤 일을 준비하고 계실까? 나는 내일에는 어떤 일을 통해서 세상을 살고 있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을까?’ 이런 기대와 궁금함 속에서 오늘을 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부터 우리가 살아야할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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