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삼상 5:1-6:21)

첨부 1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삼상 5:1-6:21)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나라의 혜왕(惠王)이 맹자에게 자기는 이웃 나라 왕보다는 좀 더 백성을 잘 돌보는 왕이 되고 싶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생색을 내었습니다.
그러자 맹자가 혜왕에게 "전쟁터에서 '오십 걸음' 도망친 병사가 '백 걸음' 도망친 병사를 보고 '비겁한 놈'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혜왕은 "'오십 걸음' 도망친 병사나 '백 걸음' 도망친 병사나 둘 다 도망친 것은 똑같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명령을 어기고 전선에서 이탈한 그 자체로 이미 병사로서 최악의 잘못을 저지른 것은 둘 다 똑같으니, 도망간 거리의 차이를 두고 누가 좀 더 잘 났고 못 났는지를 따진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웃기는 소리일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맹자는 그런 비유를 들어서 혜왕이 백성들 앞에서 '완전한 군주'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저 '이웃 나라 왕보다는 조금 더 나은 왕'이 되겠다고 하는 말을 비꼬았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오십보백보'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둘은 같을 수가 없었고 또한 결코 같아서는 아니 될 민족들이었습니다.
전자는 대표적인 우상숭배 민족이었고 반면에 후자는 명색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선민(選民)이었으니 달라도 한참 달라야 마땅한 사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가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못난 꼴'을 보여 준 적이 있었는데, 바로 언약궤를 대하는 자세를 통하여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영적으로 피장파장의 신세가 되었던 것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그래도 불신앙보다는 조금 더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오십보백보의 불신앙'에 불과한 것들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해도 우상을 동시에 믿으면 오직 불신앙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블레셋 사람들이 보여 준 '백보(百步)의 불신앙'이었습니다.
5장 1절로부터 5절까지의 말씀에 "1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2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3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4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5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이 탈취한 "하나님의 궤"를 블레셋의 5대 도시 중에 하나였던 "아스돗"이라는 도시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궤를 "다곤의 당" 즉 다곤 신전 안에 있던 다곤 신상 바로 곁에 두었습니다.
이 '다곤'이란 유명한 바알 신의 아버지로 여겨졌으며 비를 내려주고 농작물의 수확을 풍성하게 해 주는 신으로서 블레셋 사람들의 주신(主神)이었습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다곤 신상 곁에 나란히 세워 둔 것은 자기네 신이 이스라엘의 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전리품처럼 갖다 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 즉 이스라엘을 도와 준 신이니 자기네들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곤 신상 곁에 그 언약궤를 두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그들의 행위는 '여러 신들을 동시에 인정하는' 범신론 혹은 다신론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다음날 아침에 다곤 신당에 들어가 보니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멀쩡히 서 있던 다곤 신상이 언약궤 앞에 저절로 넘어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이려니 하고는 쓰러져 있던 다곤 신상을 다시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는 다곤 신상이 또 언약궤 앞에 넘어져 있었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그 신상의 머리와 사지가 아예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번의 연속적인 사건을 통하여 당신은 우상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신이 결코 아니시라는 사실과 또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은 우상을 완전히 압도하는 전능의 신이심을 보여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의 영적 무지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는 새로운 전통이 생겼을 뿐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처럼 '끊어진' 다곤 신상의 조각이 다곤 신전의 문지방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 장소마저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즉 그들은 그런 불가해한 일을 보면서도 계속 다곤 신을 숭상했으며, 기껏해야 그저 '이스라엘의 신도 무언가 신기(神技)가 있기는 있구나.'라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사람의 기본적인 신관(神觀)은 '각 민족에게는 고유의 신이 각각 따로 있다.'는 범신론이었고,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들만 믿는 여호와라는 신이 있다.'라는 정도까지는 얼마든지 인정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 외의 다른 모든 신들을 완전히 배격하시는 '유일신' 하나님께서 그런 정도의 '인정'을 용납하실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6절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셨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그제야 '어마뜨거라' 하면서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라고 급히 대책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이 터가 이스라엘 신의 궤하고는 뭔가 궁합이 잘 맞지 않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는 언약궤를 "가드로 옮겨가라"고 자기네 나름대로의 처방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드"와 "에그론" 등 그런 식으로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옮기는 곳마다 어김없이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셨습니다.
즉 블레셋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도저히 바꿀 수도, 대항할 수도 없는 위대한 신적 능력을 직면케 함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이 알고 있던 우상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이심을 명백히 증거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그런 엄청난 재앙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기껏 내린 결론이란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5:11)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니 그저 이스라엘 땅으로만 돌려보내면 우리와는 더 이상 상관할 바가 없는 신이 될 것이다.'라고만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6장 1절 이하에 보면, 그런 큰 재앙을 받으면서도 블레셋 사람들은 그 탈취한 언약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무려 "일곱 달" 동안이나 그것을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면서 계속 재앙을 당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배겨내지 못하고 그네들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 즉 블레셋 사람으로서는 최고 종교지도자들을 불러서 대책을 강구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인과 바로"에게 행하셨던 일까지 잘 알고 있을 정도로 그 방면에 있어서 나름대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6장 7절로 12절에 기록하기를 "7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10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고 했습니다.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이런 테스트를 시도한 목적은 자기네들이 당한 재앙이 과연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내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만난 것"인지를 알아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소위 "속건제"란 것을 준비했는데, "금독종" 형상은 독종 재앙을 생각해서 만든 것이며 "금쥐" 역시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이라고 했으니 '금독종'과 같은 의미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을 각각 "다섯" 개씩 만든 것은 나중에 6장 17절과 18절에서도 다시 설명하고 있듯이 블레셋의 5대 도시의 숫자에 맞춘 것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속건제'란 것은 어떤 '액땜'을 위한 미신적 제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제법 머리를 써서 그 테스트를 준비했습니다.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소"들로 하여금 언약궤와 금보물을 담은 수레를 끌고 가게 함으로써 수레가 똑바로 가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더구나 송아지를 떼어놓은 "젖 나는 암소"는 본능적으로는 새끼를 찾으려고 "울며"(12절) 갈팡질팡할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레가 "벧세메스로 가면" 그야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진짜 능력이 있어서 이런 재앙을 자기에게 내린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1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블레셋 사람들이 일부러 '바로가기 힘들게' 만들어 놓은 수레를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며 대로로 가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도록" 이끄셨습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이 당한 재앙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다곤 신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자기네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준 '다른 민족의 신'을 잘 달래어서 무사히 돌려보내었다고 생각하고 만족한 기분으로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던"(6:16)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자기네가 믿는 우상신은 따로 있으면서 기독교의 신앙도 인정해 준다는 소위 '마음 넓은 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는 불교를 믿지만 기독교에도 역시 모든 종교인들이 나눌 수 있는 '진리의 공감대'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팔을 활짝 벌리고' 다가옵니다.
"기독교도 우리 천주교와 사실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그저 '나누어진 형제'일 뿐이다."라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접근해 옵니다.
"매주일 교회에 가는 것은 허락해 줄 테니까 일 년에 딱 두 번만 제사에도 같이 참석하자."라고, 실로 '너그러운 유화책'을 제의해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종교인들이야말로 '현대판 블레셋 사람'들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표시해 준다고 해도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고 있거나, 자기는 무신론자이지만 신을 믿는 종교인도 '존중'해 준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신앙'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이 '언약궤의 능력'을 인정해 주고 '금독종 형상의 속건제'를 바친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실제로 '범신론'은 인류 역사상 어느 시대에도 결코 사라진 적이 없으며 참된 '유일신 신앙'에 항상 최대의 적이 되어 왔습니다.
'종교가 달라도 서로 인정해 주자.'라는 사상은 소위 세상의 고명한 종교지도자들이라 하는 사람들이 함께 만나 포옹을 나누게 해 주는 최대의 공감대입니다.
'각 종교의 모든 신들은 결국 다 같은 하나의 신으로 통한다.'라는 교리는 세상 앞에서 종교인을 미화시켜 주는 최고의 화장품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범신론 신앙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 이 말씀은 시내산에서부터 오늘날 21세기의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요지부동의 '제1계명'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벨리알'을 동시에 섬긴다는 것은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일신 신앙'이 아닌 것은 아예 '신앙'이라고 불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섞어' 믿든지 '다른 것과 함께' 믿는 것은 결코 '아량 있는 신앙'이나 '화해의 종교'가 아니라 오직 '불신앙'일 뿐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경외와 순종으로 섬기지 않으면 역시 불신앙일 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나타났던 '오십보(五十步)의 불신앙'이었습니다.
6장 13절 이하 15절까지의 말씀에 "13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14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5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돌려보낸 "벧세메스"는 유다 지파의 한 성읍으로서 특별히 제사장들에게 할당되었던 곳이었습니다(수 21:13-16).
따라서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다 제사장의 가문이거나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언약궤가 돌아온 것을 보고 처음에는 기뻐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번제와 다른 제"로써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이어서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6장 19절로부터 21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9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본 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20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21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가로되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고 했습니다.

그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얼마 전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큰 "살륙"의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까닭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극히 존중하는 자세로 대해야 마땅하며, 특히 레위인들은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아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경고까지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민 4:17-20).
  
바로 그 명백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제사장이며 레위인이라는 벧세메스 사람들이 어겼던 것이었습니다.
7개월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궤를 승리를 위한 '마술적인 도구'로 사용하려 했다가 전쟁에서도 패하고 언약궤까지 잃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언약궤를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무슨 구경거리처럼 여기다가 또 한 번 큰 재앙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꼴을 당한 후에도 벧세메스 사람들이 한다는 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조금 실수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엄해서야 그 앞에서 누가 살아남겠느냐?'라고 오히려 불만을 터뜨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술 더 떠서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라는 소리까지 내뱉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돌아온 언약궤를 이제는 무슨 '재앙의 상징'처럼 여기고 당장 자기네 마을에서 떠나보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앞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5:7)고 말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이건 뭐 '오십보백보'도 아니라 아예 '구십보백보'가 아니겠습니까? 

다음에 나오는 7장 1절에 보면, 결국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이란 곳으로 옮겨져서 "아비나답"이라는 제사장의 집에서 그의 아들 "엘리아살" 제사장이 맡아 지키게 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언약궤를 경솔히 다루고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으로써 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블레셋 사람들과 똑같이 어떻게 하면 이 재앙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데에만 온통 신경을 다 썼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죽임 당해도 마땅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명색이 제사장이요 레위인이라는 사람들이 이처럼 블레셋의 우상숭배자들이나 진배없는 불경과 불순종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명찰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달고 있어도 당신을 경외하지 않고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그냥 버려 두실만큼 '흐지부지한' 신이 결코 아니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성호와 주권이 명색이 당신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무시당하는 것을 그냥 간과하고 넘어갈 만큼 그렇게 '줏대 없는' 신이 결코 아니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그래도 기독신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불경스럽고 불순종하는 모습을 나타내어도 그것을 그저 보고 넘기면서 '만홀히 여김을 당할' 신이 결코 아니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당신의 거룩하심을 경외함으로 받들지 않는 자, 당신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당신의 명백한 명령을 제대로 순종하지 않는 자를 절대로 '당신의 백성' 축에 끼워 넣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인들의 '소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불신앙'과 똑같이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만을 '신자'로 인정해 주시며, 반면에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와 똑같이 취급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논리가 아니겠습니까?
기독신자라 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면' 실상은 하나님을 살아 계신 절대주권자로 믿지 않고 그저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카운슬러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록하시고 명하신 성경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하나님의 인격을 완전히 무시하는 신성모독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며 기껏해야 하나님을 자기 인생 프로필의 수식어 정도로만 여기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의 겉모양은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그 말씀에 대한 '절대순종심'이 없는 교인은 비록 세상 앞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불신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말고 스스로 지극히 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라고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라고 한 블레셋 사람들이나 그야말로 '오십보백보의 불신앙인'들일 뿐이었습니다.
일단 명령에 불복하고 전선을 이탈했으면 '몇 걸음을 도망쳤는가?'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일단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사람'이라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하는 것 가지고서 누가 조금이라도 더 낫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백보' 떠나 있는 사람이라고 친다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경외와 순종'으로 섬기지 않는 교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십보' 떠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래도 '오십보' 떠나 있는 사람이 좀 더 낫다고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둘 다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는 사람'이기는 꼭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 외에 다른 신도 같이 섬기는 것을 '질투하시는' 유일신 하나님이시며, 당신을 믿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그야말로 모든 것을 '올인'해서 섬기는 것만을 인정하시고 받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기독신자이지만 그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불신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 나타내는 생활은 바 우상숭배자와 똑같은 '오십보백보 교인'들이 이 지상교회 안에는 여전히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른 종교도 인정해 주는 것이 참된 기독교 정신'이라고 자기가 무슨 새 시대의 선지자나 된 마냥 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믿지 않는 신앙은 다 불신앙에 불과함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신 하나님 앞에 벌벌 떠는 신앙'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하고, 평생을 성경 읽고 매주일 설교를 들으면서도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이란 단 한 번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사는 교인들이 이 현대 교회 안에서 점점 더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와 순종'으로 섬기지 않는 신앙은 여전히 불신앙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신을 믿는다 해도 어떤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신으로 믿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나, 신을 섬긴다 해도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바로 섬기는지 모르는 것이나 똑같이 '오십보백보의 불신앙'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신앙, 유일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으며 그 참 하나님만을 진실한 경외와 최고의 순종으로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