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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믿음(Ⅰ) (약 2: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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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믿음(Ⅰ) (약 2:14-19)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는 서신이 아니라 행함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진정한 믿음을 강조하는 서신입니다. 야고보서 2장 후반에는 가짜 믿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14-17, 18-19)와 행함을 수반은 진정한 믿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20-24, 25-26)를 대조해서 소개합니다. 오늘은 가짜 믿음에 대해서만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첫째로, 아무 이익이 없는 죽은 믿음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 먼저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는’ 사람이 아님을 주의해야겠습니다. 흔히 오늘날 윤리적으로 부패한 기독교계를 보면서 믿음만 강조하고 행위를 강조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비판을 합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정한 믿음을 강조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행함을 낳는 통합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따로 분리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닙니다.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진정한 믿음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14절에서 야고보가 문제 삼고 있는 대상은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는 사람, 즉 믿음이 있다는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금광석을 시련하면 금이 나옵니다. 아무리 금광석 비슷하게 생겼어도 금을 내놓지 않는다면 무익한 돌덩이일 뿐입니다. 이 사람이 가진 “그 믿음”도 믿음의 행실들을 내놓지 않는 가짜 믿음입니다.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구원과 관련해서 아무런 유익이 없는 무익한 믿음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그를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부를지라도 이 사람은 유사 그리스도인일 뿐 참 성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가짜 믿음을 가졌음에도 스스로에게 속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도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실천이 없습니다. 참으로 긍휼의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분의 뜻에 따라 긍휼히 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합니다. 그런데 15-16절에서 언급된 사람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자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하며 말로만 긍휼을 베풉니다. 얼핏 보면 따뜻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단히 무정한 사람입니다.

도와줄 형편이 안 되면 말이라도 따뜻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흩어진 나그네와 같은 처지라 실제로 나눌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겠지요. 하지만 교회가 한 몸 공동체임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교회는 한 아버지를 모신 한 가족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 혹은 자매로 부릅니다. 넉넉하기 때문에 나누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나누는 것이 가족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참으로 형제요 자매라면 뻔히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줄을 알고서도 빈손으로 보내면서 평안히 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고 평가합니다. 믿음이 외부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이미 내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아무리 미미할지라도 행함이라는 열매를 나타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긍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난 존재입니다. 그 은혜를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에 긍휼이라는 특성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의 행위에서 긍휼의 실천이 전혀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 속에 긍휼의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형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핵심 진리입니다. 이 사실을 가르치지 않거나 부인한다면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만 선포한 교리가 아닙니다. 야고보 역시 1장 18절에서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말함으로써, 중생이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선물임을 드러냈습니다. 

야고보는 이미 행함이 구원에 기여하지 않음을 밝힌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즉, 행함이 없거나 행함이 부족해서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조금이나마 긍휼을 행했으면 구원 얻을 수 있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의 행함 없음이 진정한 믿음을 소유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구원도 없다는 것이지요. 야고보는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면 마땅히 그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나와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도 요한은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믿는 소자 한 사람에게 행한 행위를 당신님께 행한 것과 동일하게 여기셔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고 칭찬하시며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진정한 믿음을 가지면 가장 먼저 믿는 형제자매에 대한 긍휼의 실천하는 것으로 표현됨을 가르칩니다.

둘째로, 진정한 믿음이 아닌 귀신의 믿음을 살펴보겠습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 이 구절에서 혹자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행함을 통해 자신이 가진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한 셈입니다. 일단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19a)고 칭찬합니다. 문제는 그 정도로는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귀신조차 그 보다 더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b).

여기서 “귀신”은 우리 민족의 토속적인 용어로 번역된 것일 뿐 머리 풀고 소복입고 나타나는 상상적인 존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원래의 뜻은 ‘악령’(다이모니아)인데 타락한 천사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참으로 귀신같이(?) 압니다. 세상에서 신으로 숭배되는 많은 것들은 자기들이 꾸며낸 가짜임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알겠지요. 지식으로만 본다면 귀신보다 더 하나님을 정확히 알 존재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귀신은 떨기까지 합니다. 그분의 존재와 능력과 영광에 대해 너무나 생생하게 알기 때문에 덤덤하게 있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확실하게 반응합니다. 하지만 귀신은 결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기 뜻을 이루려 하지요.

정통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바른 신앙은 감성적으로나 의지적으로 바르게 반응할 수 있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식에 머무는 정통이라면 죽은 정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 떠는 것도 잘 하는 일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그분을 경외함으로 인하여 그분의 말씀 앞에서 떠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까지 갖추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전인적인 반응이어서 지식적인 반응과 감성적인 반응을 거쳐 의지적인 반응까지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귀신과 같은 정도의 믿음이나 귀신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 채 안심하는 사람을 문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말씀을 듣고 긍휼의 실천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가진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야고보가 말한 ‘행함’은 조금 예민하게 따져야 할 문제입니다.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행악자에게 예수님은 낙원에 있게 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행동이 없는데도 그의 믿음의 진정성이 확인되었다는 것이지요. 먼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그의 고백에서 그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또한 예수님을 비방하는 다른 행악자를 꾸짖는 태도에서 한 영혼에 대한 참된 긍휼의 행위를 희미하지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눅 23:40-42). 그의 고백과 꾸짖음은 ‘말’이지만 넓은 의미로 말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행동(action)은 없었어도 행함(work)은 있었던 사람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행동은 많았습니다. 세리들이나 일반 백성들에 비해 윤리적인 행동들도 탁월하여 그 시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요구하는 행함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지요.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단순히 구제하는 윤리적 실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 행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신이 마비되어 전혀 활동할 수 없는 사람도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면 나타나야 할 행함이 무엇인지는 다음 시간에 아브라함과 라합의 사례를 통해 좀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모태 신앙인은 당연히 자기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따르면 이러한 자기 생각이 진정한 믿음을 가졌음을 보장해주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독실한 신자라는 다른 사람의 평판도 진정한 믿음을 가졌음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종교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기독교 분위기에 익숙해 있다고 해서 진정한 믿음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가졌다고 말하는 믿음이 죽은 믿음은 아닌지, 귀신같은 믿음은 아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피게 합니다. 청교도들이 많이 했던 일이 이처럼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자신의 믿음의 진정성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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