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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고후 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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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고후 4:7-15)


최근의 우리나라 TV 드라마를 소위 “막장”드라마라고 부릅니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반전의 반전을 만들기 위해 비정상적인 설정을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설정들 중에 하나가 “출생의 비밀”입니다. 재벌 가문에서 정략결혼을 해서 불륜을 저지르고, 출생의 비밀을 가진 아이가 태어납니다. 또한 태어나기 직전에 어떤 사연으로 아이가 뒤바뀌어 부모 아닌 사람을 부모로 알고 자라납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자라면서 그 출생의 비밀이 하나씩 풀리며 드라마가 전개됩니다.

시청자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아이의 성장과정을 지켜봅니다. 왕실의 피를 받은 아이가 근본도 모른 채 자랍니다. 재벌의 피를 받은 아이가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고생하며 자랍니다. 시청자들은 동정의 눈빛으로 지켜보면서, 어서 속히 그 아이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 드라마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자라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되기 이전과 변화된 이후 정체성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게 되는데 그게 쉽지 않아서 혼란을 느낍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전의 모습이 남아있어서 혼란을 겪습니다. 그러다 그가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달라지게 됩니다. 그 때 그의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불리게 됩니다.

바울의 예도 들 수 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박해하던 사람이 예수를 전하는 사람으로 180도 변신하게 됩니다. 도대체 자신은 누구인가를 놓고 치열한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은둔의 생활을 하며 씨름했습니다. 고향 다소에 가서 10년여 씨름하면서 나름대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됩니다. 그 때 그의 이름이 “바울”로 불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제대로 만나고 나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이것을 고후 5:17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믿고 나면 사람이 새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면 먼저 찾아오는 것이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 때문에 혼란을 겪게 됩니다. 변화하고 난 뒤 자신은 도대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변화하고 난 뒤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고 난 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 점을 분명히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보배를 가진 질그릇

본문 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우선 질그릇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은 간단히 말해서 진흙을 구워 만든 그릇을 말합니다. 한자어로는 “도기”(陶器)라고 하고, 일본식 표기로는 “토기”(土器)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뚝배기나 옹기 그리고 항아리 같은 것이 질그릇입니다. 

이 질그릇의 특징은 우선 값이 싸다는 것입니다. 재료가 그 흔한 진흙이기 때문에 비쌀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주로 서민들이 손쉽게 사용해왔습니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재료가 아주 쌉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질그릇처럼 정말 싼 존재입니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할리 멘센은 인간의 육체를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의 인체는 2.25kg의 칼슘, 500g의 인산염, 252g의 칼륨, 168g의 나트륨, 28g의 마그네슘, 28g의 철, 그리고 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또 우리 체중의 65%가 산소, 18%가 수소, 10%가 탄소, 3%가 질소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물질을 현 시가로 계산한다면 겨우 89센트(cent)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저 우리 돈으로 천원 밖에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 소리를 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정말 싸구려입니다. 

질그릇의 또 다른 특징은 약하다는 것입니다. 손에 들고 있다가 떨어뜨리면 깨집니다. 뚝배기는 떨어뜨리면 그냥 깨지고 맙니다. 항아리는 날아오는 돌에 맞으면 속절없이 깨지고 맙니다.

로널드 레이건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임기를 마친 미국 대통령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민주와 공산 진영으로 양분되었던 냉전을 종식시킨 장본인으로서 역사의 큰 획을 그은 미국 대통령으로 기억됩니다. 한 마디로 그는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얼마 안 돼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조차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끝내 자신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기억조차 못한 채 10년 동안 투병하다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자녀들을 돌보지 못하여 척을 졌는데, 질병 때문에 끝내 자녀들과 화해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어도 질병으로 한 순간에 인생에 금이 가고 만 것입니다. 자식 문제로 늘 피할 수 없는 연약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질그릇처럼 연약하여 조그만 충격에도 일그러지고 깨지고 맙니다. 질병 때문에 그 육체가 깨집니다. 스트레스나 마음의 상처 때문에 그 마음이 깨지고 맙니다. 우리가 대단한 것처럼 큰 소리쳐보지만 그 연약함은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인간이 이렇게 값싸고 연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냥 질그릇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안에 보배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같은 질그릇이라도 그 안에 보배를 가졌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보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본문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한 마디로 “예수”입니다.

왜 예수가 보배입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질그릇처럼 한 없이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 안에 보배를 가지고 있기에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비록 자신은 지극히 연약하지만 그 안에 계신 주님을 의지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8절 이하를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네 가지 힘겨운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겨쌈입니다.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어서 몹시 괴로운 상황을 말합니다. 둘째는 답답한 일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을 말합니다. 셋째는 박해입니다. 혹독한 핍박을 받아서 견디기 힘든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넷째는 거꾸러뜨림입니다. 가장 낮은 곳, 정말 부끄럽고 비참한 처지에 던져진 상황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질그릇으로서 그리스도인은 넘어지고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 때문에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시는 예수 때문에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의 전설적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로마 황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포기하라는 
엄명을 받았지만 죽어도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하며 맞섰습니다. 그가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로마황제는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신하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그 놈을 독방에 쳐 넣어라." "아니 되옵니다. 기독교인들은 독방을 더 좋아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조용한 기도실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잔인무도한 악당들이 있는 곳에 집어넣어라" "그것은 더욱 아니 되옵니다. 악당들을 전도하여 기독교인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끌어내어 목을 쳐라" "그건 더더욱 아니 되옵니다.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최상의 영광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도 헛일이옵니다. 그들은 순교할 때 울지도 않사옵니다. 오히려 얼굴에서 광채가 납니다."/ "아니, 그러면 그 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질그릇처럼 연약하지만 그 안에 보배이신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늘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배를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그런데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배를 가진 그리스도인인데도 보배를 담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흔들리고 넘어지고 깨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배를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까요?

첫째, 내 안의 보배를 발견해야 합니다.

요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자 누이들이 급히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모셔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을 더 기다리셨다가 나사로의 집을 향해 가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병들었던 나사로가 죽었고, 나사로가 장사되어 무덤이 있은 지 4일 뒤에야 도착하셨습니다

왜 전달을 받고 바로 가지 않으셨을까요?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장사되고 충분한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기다리셨을까요? 사람의 힘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음으로 인정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음을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때는 대체로 인간의 무능이 드러나고 인간이 두 손 두 발 다 든 뒤입니다. 인간이 질그릇임을 깨닫고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입니다. 

모세는 인생의 절정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능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던 청장년기에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모든 기력이 쇠하고 이제 모든 꿈과 야망도 내 내려놓은 뒤 나이 80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인생의 절정기에 하나님의 약속의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나이 100세에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질그릇임을 깨닫고 고백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보배이신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그 보배만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질그릇임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의 보배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보배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후 12:9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 때문에 정말 큰 고통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이 육체의 가시가 열병 또는 간질이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그리고 로마 캐톨릭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바울에게 끊임없이 일어난 성욕이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반대자들과의 갈등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신약성서신학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안질 또는 시력장애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사역을 힘겹게 하고 자신을 한 없이 약하게 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주님께 정말 간절하게 세 번이나 기도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기는 커녕 계속 그 육체의 가시를 지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한 마디로 주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자기의 힘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께로부터 임하는 능력으로 사역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저도 육체의 가시 때문에 정말 큰 고통을 겪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습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데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정말 제가 얼마나 무능하고 연약한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처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육체의 가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정말 철저하게 주님만을 의지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때부터 교회가 본격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제가 찬송 67장 4절 첫 소절을 늘 기억하며 부르게 됐습니다. “질그릇 같이 연약한 인생 주 의지하여 늘 강건하리”

그렇습니다. 우리는 질그릇 같은 연약한 인생입니다. 저마다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저앉고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보배이신 예수가 계십니다. 그 예수를 의지하면 우리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는 보배를 가진 질그릇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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